2021년 12월호 칼럼 나침반은 신라침반에서 유래했다Ⅱ

2021.12.19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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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침반은 신라침반에서

羅針盤             新羅針盤          

유래했다Ⅱ 


글·사진 이명우 운룡도서관·운룡역사문화포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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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나침반인 윤도(輪圖)에 자침을 얹고 있는 모습(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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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도(輪圖)



조선시대 풍수로 방위를 볼 때 사용하는 나침반을 윤도(輪圖)라고 하 는데 ‘바퀴모양 그림’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물품으로 허리에 차고 다 닌다고 하여 패철(佩鐵)이라고도 부른다. 나무로 된 원형 판에 4방위 와 팔괘, 십간, 십이지, 24절기, 28숙 등 음양오행과 역을 나타내는 한 자를 방위별로 층층이 새겨 넣고 가운데는 자침(磁針)을 넣어서 방위를 가리키도록 된 제품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도 4대째 조선시대 전통 윤 도를 만들고 있는 장인 김희수 씨가 전북 고창에 윤도장 전수관을 운영 하고 있다(2021. 8. 16 중앙일보).  


중국에서 최초로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진 나침반이 실은 우리 선조들 의 작품이라면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리고 내가 쓴 글을 보고 소 식을 들은 12억 중국인들은 뒤집힐 것이다. 또한 한국인들이 간덩이가 부었다고 하며 어쩌면 내가 중국을 방문하면 당장 공안에 끌러가 감방 신세를 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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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도장 보유자 김희수 씨(출처: 문화재청)



고려시대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 신라 문무왕 때 당(唐)나라 에 자석을 전한 내용이 아래와 같이 기록돼 있다(김부식 편찬/최호 역해, <신역 삼국사기>, 흥신문화사, 1994, p.136~137).


 “9년 봄 정월에 신혜법사(信惠法師)를 정관대서성(政官大書)으로 삼았다. 당나라의 승려 법안(法安)이 와서 천자의 명을 전하고 자 석(磁石)을 구하였다. (중략) 여름 5월에 천공·비열·각연 등 3군에 기근이 들어서 창름을 열어 구휼하였다. 급찬 기진산(祈孤山) 등을 당에 보내어 자석 두 상자를 바쳤다(九年春正月 以信惠法師為政官 大書省 唐僧法安來 傳天子命 求磁石 (중략) 夏五月 泉共比列各連等 三郡民饑 發倉賑脈恤 遺祈珍山等級滄等 入唐獻磁石二箱).” 


또한 문무왕 12년에는 당나라 황제에게 은(銀) 3만 3500푼, 구리 3만 3000푼, 우황 120푼, 금(金) 120푼 등과 함께 침(針) 400개를 보냈고, 경문왕 9년에도 여러 공물 중에 침(針) 1500개를 당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자석과 침(針)이 나침반의 재료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사용방법은 침(針)을 자석 위에서 비비고 그것을 가는 실에 매달면 바늘은 남쪽 을 가리킨다는 것이 송나라때 <몽계필담>에 나와 있다고 앞서 <중국고 대발명>책에서 설명하였다. <몽계필담>의 나침반에 대한 서술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방사(方士)는 자석으로 바늘을 문질러서 그것을 남쪽을 향하게 만 든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약간 동쪽으로 기울어 정확한 남쪽을 향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물 위에 띄워두면 불안정한 것이 흠이다. 손톱 위에나 그릇의 가장자리 위에 놓으면 잘 돌아가기는 하지만 금방 밑으로 떨어져버리기 쉽다. 가장 좋기로는 자침의 중심점에 밀랍을 달고 여기를 명주실로 묶어서 균형을 잡고 바람 없는 곳에 두면 바늘이 언제나 남쪽을 향한다. 바늘 가운데에는 북쪽을 향하 는 것도 있는데, 아직 아무도 그 이치를 설명할 수는 없다(<몽계필 담>제24권 18조).”


따라서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나침반(羅針盤)은 신라침반(新羅 針盤)의 준말이고 대부분의 특산물은 그 지역의 지명을 딴다는 것을 생 각해보면 나침반은 신라가 만든 제품이 당나라에 전해진 것이 틀림없 다고 생각한다.


나침반이 우리나라에서 먼저 사용됐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리가원(李 家源) 박사이다. 리가원 박사는 지난 1987년 중국에서 구해온 고대 나 침반 모형을 연구해오다 나침반 설명문에 “방위표(지반, 地盤)는 고대 낙랑지방에서 출토된 옻(漆)지반을 복원한 것이다”라는 것에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지반은 낙랑의 것이라는 점과 일치한다.


1947년 중국 중앙문화부 문물국 박물관처에 처장으로 근무한 학자인 왕진탁(王振鐸)은 <사남 지남침과 나경반(司南指南針與羅經盤)>이라는 논문에서 나침반의 원리와 유래를 명확하게 밝혀놓고 있다. 왕진탁의 논문에 의하면 한(漢)의 나침반(司南)은 방위를 표시한 지반과 국자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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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자석(勺)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낙랑의 채광총(塗)과 왕광묘(王光 墓) 등에서 작(勺)과 지반이 모두 출토되었고 그것을 복원 사용한 것이 한나라의 나침반이라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보면 자석을 이용하는 나침반은 전국시대(기원 전 3세기 전후)부터 있었고 그 원형 및 재료는 신라에서 유래한다고 할 수 있다.


최근식의 2000년 논문 <9세기 장보고 무역선의 지남기(指南器) 사용 가능성에 대하여(국제고려학회 서울지회 논문집, 제2호 제4장, 2000, p.60~91)>에 의하면 “육상에서 지남기가 기원전 4세기부터 사용되었 는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하여 해상에서만 12세기에 이르러서야 지남기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비판하면서 여러 정 황 증거를 볼 때 9세기에 장보고의 무역선에서 지남기가 사용되었다” 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논지를 입증하기 위한 정황 증거로 중국에서 방위를 가리 키는 사남(司南), 지남거(指南車) 따위가 기원전 4세기부터 사용되었다


는 점, 지남거를 만들었다는 <송서(宋書)>의 기록, 울산의 달천철산(達 川鐵山)이 천연 자석의 원료인 자철광(磁鐵鑛)의 주산지였다는 점, 문무 왕 9(669)년 신라가 당에 자석을 보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 엔닌(圓 仁)이 839년 당나라에 갈 때 4월 16일과 17일 무중항행(霧中航海)를 하였으므로 지남기와 같은 방향지시기를 사용하였을 것이라는 추정을 제시하였다. 


이 논문의 내용을 보면 한민족이 세계 역사상 최초로 지남기를 항해에 이용한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 주장에 대해 학계에서 반론도 있지만 최근의 학계 논문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연구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한국해양대학교 해양박물관 전임연구원 김성준 외 2인의 논문 <항해 나침반의 사용시점에 관한 동서양 비교 연구(한국항해항만학회 지 제27권 제4호, 2003, p.41~424)>, <항해 나침반의 사용 시점에 관 한 동서양 비교 연구(김성준·허일·최운봉, 한국해양대학교 해양박물관 전임연구원, 한국해양대학교 운항시스템공학부 교수, 추후 한국해양 대학교 운항시스템공학부 박사과정)>의 논문에서 필자들은 유럽과 중 국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나침반이 항해에 이용되었음을 역사적 기 록과 최근까지의 연구성과들을 검토한 결과 중국인들이 세계 최초로 나침반을 항해에 이용했다는 기존 주장과는 달리 중국인들과 유럽인 들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서로 독자적으로 나침반을 항해에 이용하였 다고 주장하며 중국이 선박 항해에 나침반을 세계 최초로 사용하였다 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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