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호 문화 다문화적 관점에서 본 영웅들의 이면 (2) - 에이브라함 링컨

2021.06.03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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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적 관점에서 본 영웅들의 이면 (2)

- 에이브라함 링컨 


글.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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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라함링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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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노예선장이었다가회심하여'어메이징그레이스'를작곡한존뉴턴의일대기를그린영화<프리덤>의한장면,

이렇게아프리카에서아메리카로끌어간흑인노예들이1600만정도로간주되고있다.그중30%정도가끌려가던배에서죽었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인 링컨에 대해선 수많은 전기와 책들이 있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링컨 관련한 책이 1만 6000권에 달한다고 한다. 그 정도로 링컨은 수많은 사람에 의해 추앙받고, 칭송받는 정치인이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에게도 존경하는 인물을 뽑으라면, 둘 중 하나는 김구 선생이고, 또 다른 한 명은 링컨을 꼽을 것이다. 그만큼 링컨은 전 세계 정치인들의 존경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에 반하는 주장도 없지 않다. 비판자들에 따르면 “링컨은 가난과 역경을 뚫고 성장하지도 않았으며, 노예해방을 지지했지만 인권주의적 측면에서의 지지가 아니라, 정치 전략적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그는 연방권력을 강화하려는 연방주의자였으며,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억압정책을 시행한 독재자였다는 것이다. 


이런 상반된 주장이 있음에도 링컨에 대해선 수많은 사람들이 존경과 추앙을 하고 있다. 수 많은 책들이 그를 미화하고 있으며, 미화된 일화들에 의해 존경받고 있음엔 틀림없다. 심지어 그가 숨을 거둔 금요일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금요일과 같은 날이라며 그를 성자의 반열에 올리기까지 한다. 


그럼 극과 극을 달리는 링컨의 진실에 대해 추적해보도록 하자. 


링컨은 1809년 캔터키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난 집이 비가 샐 정도의 통나무 집이었고,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는 링컨의 아버지 토머스는 날품팔이 농부도 아니었고 지독히 가난하지도 않았다. 링컨의 아버지는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 상위 15%에 준하는 세금을 납부하고 있었다. 


링컨의 증조할아버지는 영국에서 메사추세추주로 이주한 섬유노동자였다. 조부인 에이브라함(링컨의 할아버지)은 버지니아 로킹햄에서 81만 평방미터를 소유한 건장한 지주였으며, 지역의 민병대장이었다. 하지만 캔터키로 이주한 조부는 인디언의 습격을 받아 세 아들이 보는 앞에서 사망하고 만다. 


링컨의 조부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막내가 링컨의 아버지였다. 당시는 장자인 큰 아버지가 전 재산을 상속받게 되었기에 아버지는 형과 함께 지내면서 농장을 사고파는 일을 했다. 링컨의 아버지가 어느 정도는 수환이 있었기에 지역 납세자 기준으로 상위 15% 정도를 차지했다. 그렇기에 링컨의 친어머니가 우유병으로 사망한 뒤 곧바로 재혼할 수 있었다. 만약 무일푼 날품팔이 농부였다면 15% 정도의 납세도, 재혼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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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최대의인디언학살사건인‘운디드니학살’



이렇듯 링컨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평범한 중산층 정도의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학력이 없고 독학으로 변호사가 된 것은 학교가 거의 없었고, 학교에 다니는 것이 이상했던 당시의 상황에 견주어 판단할 문제이지 지금의 상황에서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이렇게 링컨은 새어머니의 보살핌으로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고, 이야기꾼인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언변을 지닌 변호사로 성장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 등은 노예제를 폐지하였지만 거대 플랜테이션 농장에 의존하는 미국은 노예 문제가 숙제로 남아 있었다. 산업화된 북부에서는 노예제를 폐지하고 있었고, 남부에서는 여전히 노예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노예제 존속 여부는 정치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이슈였다. 링컨 집안이 다니던 침례교회도 노예제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민주당 더글라스와의 논쟁에서 ‘노예제 폐지’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노예해방주의자로 알려졌지만 실제는 열렬한 인권주의자가 아니었다. 


부유한 은행가였던 그의 처가는 여전히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 역시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노예를 거느린 농장주를 변론하는 변호했다. 하지만 그가 흑인 노예의 편에 서서 변호를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노예제 폐지론자로 세상에 알려졌고 그가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은 공화당은 북부 산업지대를 중심으로 한 정당이었다. 그는 남부 주들의 자치권 강화에 반대해 연방정부 강화와 관세율 인상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특히 관세율 인상에서 남부 지역과 북부 지역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왜냐하면 연방정부에서는 남부가 부담하는 높은 관세로 북부 산업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북부와 남부는 노예제는 물론 관세, 횡단철도 건설, 외국 제조선박 불허 등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연방정부의 권한을 강화하자는 연방주의자들(공화당)은 관세율 인상, 횡단철도 건설, 외국 제조선박 불허 등을 밀어붙였고, 남부지역은 연방정부의 권한을 축소하고 자치권을 확대하자는 입장에 서 있었다.


즉 남부지역에서는 “왜 우리에게 세금을 걷어 너희들이 쓰냐?”며 착취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대통령에 당선될 것 같지 않던 링컨이 상대편 두 후보의 표가 나뉨으로 인해 당선이 됐다. 이에 남부의 8개 주가 봉기하게 됨으로써 남북전쟁이 발발하게 됐다.


남북전쟁은 4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1, 2차 세계대전 때 죽은 미국인보다 더 많은 75만 명 정도의 희생자를 냈다. 전쟁 초기에는 남군이 우세를 보였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의 지원을 이끌어낸 북군의 우세로 전환됐다. 북군의 우세를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이었다. 


그런데 노예해방 선언을 두고 상반된 견해가 존재한다. 링컨을 추앙하는 측에서는 노예해방선언이 인권의 역사에 기리 남을 금자탑이라고 여긴다. 이와 반대편에서는 링컨의 정치 전략적인 선택이었을 뿐 숭고한 인권적 차원과는 거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링컨은 노예제를 폐지하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 등의 남군 지원을 차단하고, 북군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예해방선언’을 했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북군과 연방정부로서 정책 시행이 가능한 북부와 남부의 경계지역의 주를 제외하고, 연방 정부의 권한이 미치지 못하는 남부의 주들에 한해서 노예해방 선언을 했다는 것을 들고 있다. 다시 말하면, 효력조차 미치지 못하는 지역의 노예해방 선언을 했다는 이유를 들어 정치 전략적인 ‘쇼’였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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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북전쟁을 그린 영화<바람과함께 사라지다>중에서, 타라농장이 불탄자리에서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거야”라고 말하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깊다.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은 북군에게 중요한 두 가지 힘을 가져다주었다. 하나는 노예제를 폐지하고 있던 영국 등을 북군의 편에 서게 만들었고, 또 다른 하나는 노예생활을 하고 있던 흑인들을 탈출시켜 남군의 힘을 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은 북군이 전세의 우위를 차지하고 승리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남북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서 북군은 남군과 전투를 하는 한편, 서쪽으로 진격하여 인디언들과의 전투를 진행했다. 특히 대륙횡단철도를 진행시키며 걸림돌이었던 중서부 인디언들을 학살하고 추방시켰다. 북군들은 남부지역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인디언들에게도 적용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미국의 인디언 3대 학살사건의 하나인 ‘샌드 크리크 학살사건’이다. 


목사이기도 했던 키빙턴 대령은 인디언들이 자신의 군대를 습격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1200명의 군대를 콜로라도 샌드 크리크 인디언 야영지로 끌고 들어가 어린아이와 여자를 포함하여 160명을 학살한 것이다. 


또한 샌티 수족이라는 인디언들에게 2400만 에이커 토지에 대한 보상을 하고 인수하기로 했지만, 연방정부는 대금을 지불하지 않았다. 그 사이 백인들이 들어와 거주하였다. 이에 샌티 수족 인디언들이 연방정부에 토지 대금을 달라고 했지만 거부하였다. 이에 인디언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하지만 링컨 정부는 이를 잔인하게 진압하고 300여명에 달하는 인디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링컨 대통령은 최종적인 39명을 처형하는 문건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링컨은 재임 중에 흑인들이 거주하는 식민지 개척을 추진했다. 링컨은 “흑인은 백인과 동등한 지역에서 동등한 직업을 갖고, 결혼하며 살 수는 없다”는 신념이 확고했으며, 그에 따라서 흑인들만 살아갈 수 있는 외딴 섬을 식민지로 개척하려던 것이다. 그 대상지역으로 중남미 아이티 같은 국가를 대상지역으로 물색했다. 또 링컨은 재임 기간 동안 1만 3000명에 달하는 정치범들이 투옥되고 탄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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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의 한 장면,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 뿐이다”는 백인

기병대장의 말로, 그들이 인디언들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가 드러난다.



이렇듯 위대한 미국의 초석을 닦은 링컨에 대해 노예해방선언을 한 인권주의자, 성자로 여기는 주류적 입장과 달리, “링컨은 연방권력을 강화하려는 연방주의자였으며, 노예해방선언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략적 선언이었다”는 평가가 지적되고 있다. 즉 “링컨은 인디언을 학살하고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언행을 했던 인종주의자였으며, 연방권력을 강화하려던 독재자에 불과하다”는 혹평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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