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호 문화 다문화 음식열전Ⅵ 만두

2022.03.30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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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음식열전Ⅵ

- 만두 - 


글 김성회 (사)한국다문화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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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음식에서 최고의 간식이 된 만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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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이 지났다. 설이 되면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바로 떡국이다. 그래서 떡국을 먹어야 나이도 한 살 더 먹는다고 했다. 떡국은 가래떡을 동전처럼 썰어 물에 넣고 끓여 먹는 것을 의미했다. 새해가 되어 떡국을 먹으며 돈도 많이 벌고 복도 많이 받고싶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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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떡국에 빠짐없이 들어가는 것이 만두였다. 만두는 생김새로 인해 복을 안겨주는 음식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설날이면 떡만두국을 끓여 먹었다. 그런데 만두는 우리나라 고유의 음식이 아니다.


만두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고려 때였다. 고려가요 중에 유명한 <쌍화점>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쌍화점이 만두 가게인 것이다. 즉 ‘상화 만두’를 파는 가게의 회회아비와의 염문을 다룬 것이 고려가요 <쌍화점>인 것이다.


“쌍화점에 쌍화 사러 갔더니/ 회회아비가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 말이 가게 밖에 들고 나며/ 조그만 광대새끼 네 말이라 하리라”는 내용이다. 내용인즉 “쌍화점에 갔다가 회회아비와 눈이 맞고 밀회를 즐기는데, 이 소문이 밖으로 나면 쌍화점에 드나들던 조그만 광대 녀석이 떠들고 다닌 것으로 여기겠다”며 다짐하는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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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인 설날의 고유음식 ‘떡만두국’



어쨌든 고려가요 속에서 만두 즉 ‘쌍화’는 회회아비가 팔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요즘 중국 화교가 중국집을 운영하고, 베트남 결혼이주여성이 베트남 쌀국수를 만들어 팔고, 아랍 이주민이 아랍의 케밥을 파는 것과 같다.


당시 아랍이나 위구르족 아저씨를 회회아비라고 불렀고 그 이주민이 팔고 있는 음식이 ‘쌍화’였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 때 들어온 만두는 대략 북방 유목민 즉 터키나 위구르 계통의 이주민들에 의해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만두의 기원에 대해 다른 이야기도 전해진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공명이 만두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제갈공명이 남만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풍랑이 이는 노수를 만났는데 노인들이 사람머리 49두를 제물로 던지고 제사를 지내면 풍랑이 가라앉을 것이라고 말을 했다. 이에 제갈량이 ‘전쟁터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또 죽일 수 없다’며 밀가루 반죽에 양고기를 싸서 만두(蠻頭)라고 써서 바치고 제사를 지냈다.”


또 조선시대 이익이 쓴 <성호사설>에서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만두는 세속에서 전하기를 노수에서 제사를 지낼 때 처음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이 역시 겉은 떡이고 속은 고기이다. 다만 ‘뇌환’은 작고 만두는 크며 ‘뇌환’은 밀가루로 뭉쳐서 만들고 만두는 떡으로 만드는 것이 조금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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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몽골의 튀김만두 ‘호쇼르’. 오른쪽) 중국남부와 동남아시아의 다양한 ‘딤섬’ 요리



그래서 만두의 기원을 서술한 글을 보면 “만두는 제갈량이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제갈량이 활동하던 시기는 2000년 전이고, 소설 <삼국지연의>가 엮어진 것은 명나라 때의 일이다. 정사 <삼국지>에는 제갈공명이 남만을 점령하러 노수를 간 적이 없다. 따라서 명나라 시대에 살았던 나관중이 <삼국지연의>를 지으면서 제갈공명의 재치에 만두이야기를 엮어 지어낸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제갈공명 기원설은 나관중이 지어낸 것일 뿐 실제와는 다르다고 여겨진다. 그 이유에 대해 다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로 만두는 밀가루 반죽에 음식을 싸먹는 형태였기에 밀 재배지 중심으로 발달한 음식이라는 것이다. 즉 쌀 재배지인 ‘남만’에서 만두가 기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중앙아시아 유목민들 사이에서 만두와 비슷한 발음의 ‘만트’라는 음식이 내려오고있고 몽골에서 ‘호쇼르’라는 몽골만두가 주요한 음식인 것을 보아도 유목민의 음식에서 기원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쌍화점에서 보는 것처럼 몽골지배 시기에 위구르나 아랍 이주민인 ‘회회아비’가 자신들의 전통음식을 고려에 와서 팔았던 것이다. 이것은 중국에서 북방 유목민족이 대거 남하하는 5호 16국 시대에 만두가 전래되었다는 설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만두는 밀의 재배가 용이했던 수메르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기원한 음식이다. 유목민, 목동들이 양을 치러 들판이나 산야로 나가면서 간식으로 밀가루 반죽에 음식을 싸서 가지고갔던 것이 만두의 기원이다. 밀가루 반죽인 ‘넌’‘또티야’에 음식을 싸서 먹는 ‘케밥’의 형태도 만두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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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터키의 ‘만트’ 요리. 오른쪽) 이탈리아 만두요리의 일종인 ‘깔조네’



그 후 동남아시아 등지로 퍼져가면서 이름도 만두에서 ‘딤섬’ 등으로 변화하였다. 즉 ‘딤섬’은 우리말로 하면 ‘점심(點心)’이라는 뜻인데, 들에 나가며 간식으로 싸들고 나간 뒤 요기를 하는 음식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점심을 대체하는 이름인‘딤섬(점심)’이 된 것이다.


따라서 만두는 목동들이 들판에 나가 가축을 돌보기 위해 ‘간식’으로 음식을 싸서 나갔던 것이 만두로 발전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처음엔 이름이 ‘만트’였는데, 중국에 전해지면서 ‘만두’가 되고 우리나라에선 ‘상화(霜花, 만두를 찔 때 김이 서리고 만두의 매듭이 꽃잎 같아서 붙여진 이름)’로 불린 것이다.


물론 만두가 고려시대 이전에 전해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한반도에 유목민족이 이주한 것은 훨씬 이전이기 때문이다. 그 근거로 거란의 요나라 벽화에 만두를 찌는 그림을든다. 즉 원나라의 지배 이후 유목민족의 음식인만두가 유행했지만 그 이전에도 만두라는 음식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만두는 고려시대에 원나라의 지배 이후 급속히 확산되었다. 고려시대 만두가 얼마나 인기 있었던 음식이었는가에 대해선, 충혜왕시대 등장한 ‘만두도둑’의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충혜왕 시절, 궁궐 주방에 들어와 만두를 훔쳐 먹던 도둑이 있었고 이에 왕이 ‘그 도둑을 죽이라’고 명령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등장한다.

밀가루 재배가 용이하지 않았던 우리나라에서 만두는 귀한 음식으로 취급되었다. 이색은 <목은집>에서 만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칭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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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가 스님을 먹이는 것이 원래 정상인데/

산승이 속인을 먹이다니 놀라서 자빠질 일/

흰 눈처럼 쌓은 만두 푹 쪄낸 그 빛깔 하며 /

기름 엉긴 두부 지져서 익힌 그 향기라니.”


심지어 <세종실록>에는 태종의 ‘수륙제’를 앞두고 “(행사 참석인원들의 밥상에) 만두, 면, 병 등의 사치한 음식은 일체 금지하소서”라는 상소가 등장한다.


다시 말해 만두 훔쳐 먹다가 죽는 도둑도 등장하고, 스님에게 만두를 얻어먹고 감사한 마음으로 쓴 이색의 글, 왕실제사임에도 사치스러운 음식으로 거론된 만두를 생각하면 만두는 최상의 고급 음식으로 취급되었던 셈이다.


이렇듯 중앙아시아에서 전해진 만두는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다만 밀 재배가 용이하지 않았던 만큼, 밀가루보다는 메밀가루 등을 사용했고 중국 남부에서는 쌀가루를 사용했다.


종류를 보면 ‘만두’ ‘포자’ ‘교자’에, ‘군만두’ ‘튀김만두’에, 빵 종류로 ‘꽃빵’ ‘찐빵’ 그리고 전과 함께 ‘병(甁: 떡병)’의 한자를 써서 ‘메밀전병’ 등 각종 ‘전병’으로 발전해 왔다. 또 쌀 재배 지역에서는 ‘딤섬’ 등의 형태로 발전했다. 그리고 서양으로 건너가 이탈리아의 ‘라비올라’ ‘깔조네’ 등이 되고, 남미대륙으로 건너가서는 ‘또르띠야’ 등으로, 몽골에서는 ‘보츠’ ‘호쇼르’로 변화되었다.


이렇게 만두는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서 간식 형태로 생겨난 음식이 중국과 동양으로 퍼지고 이탈리아와 남미 등 서양으로 퍼지면서 다양한 형태의 음식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최고급 사치 음식으로 취급되어 설날에 떡국과 함께 넣어 먹고, 간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음식이 된 것이다. 특히 북방 유목민족과 가깝고 산악지방에서 재배하기 좋은 메밀 등의 재료로 만들었기 때문에 추운 지방에서 발달하게 되어 북방의 대표음식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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