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호 문화 多島海 Ⅱ 다도해

2021.09.01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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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島海

다도해 


글·사진 서상진 세계잡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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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島海> 판권란(서상진 소장본)



속간호(續刊號) 1952년 10월 1일 발간 

월간. 임시정가 : 5000원

책 크기 : 19㎝*26.5㎝. 

발행인 : 박종오 

인쇄소 : 한국인쇄공사(광주) 

인쇄인 : 고문석

발행처 : 다도해사(광주). 

면수 : 44면

표지 : 이경모 (사진작가) 컷 ; 천백원(千百元)




이 글은 지난 7월호에 연재했던 ‘핼싱키 기행’의 전문이 실렸던 잡지 <多島海>에 관한 것이다. 어떤 인물이 태어나면 어디 출생인지, 누구의 자손인지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 점에서 잡지 역시 그 근원을 밝히는 게 중요한 일이고, 어찌 보면 순리라고도 하겠다. 


기록의 중요성을 남다르게 무겁게 받아들이는 필자는 아직도 헬싱키올림픽에 대한 기행문을 남긴 김연범 선수가 경이롭다. 놀랍게도 그가 태어나고 자란 함평에서조차 그의 생몰연대조차 모르고 있었다. 아주 조그마한 역사적 기록과 입소문만으로도 현대와 연결시켜 문화적 연결고리를 만들고 활용하고 싶어하는 지방자치단체에게, 지난 호의 글이 어떤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기대를 가져본다.


잡지 <다도해(多島海)>는 한국전쟁(6·25전쟁)이 한창이던 때 전라남도 광주에서 발간되었다. 하지만 과연 언제 창간되었는지, 최종적으로 몇 호까지 나왔는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편집 후기에 “숨이 끊어진 줄 알았던 <다도해>가 불을 켜고 나왔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내일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던 전시(戰時)라는 숨 가빴던 사회상황을 추측해 볼 수 있겠고, <다도해>가 그런 어려움을 이기고 어렵게 다시 속간된 것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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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모(1926~2000년) 사진작가 컷(서상진 소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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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島海> 목차(서상진 소장본)




먼저 표지를 장식한 이경모(1926~2000년)를 주목하자. 그는 전남 광양 출생으로 원래는 그림을 좋아했으나(선전-현 대한민국 미술대전-에 1944년도에 입선함) 집안의 반대로 사진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1946년에 약관 20세로 호남신문사(현 광주일보) 사진부장(노산 이은상 추천)으로 입사하여 여순사건을 단독보도 하였고, 한국전쟁 때에는 종군기자로 활약하여 당시의 사진작가로는 드물게 기록사진을 많이 남겨 대한민국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대단한 이력이다. 카메라 수집가이기도 했던 이경모는 평생 수집한 카메라 1500여 대를 전남 나주에 있는 동신대학교에 기증하였고, 그 덕에 동신대학교에 대한민국 최초의 카메라박물관(문화박물관)이 생겼다. 필자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경모의 족적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목차를 살펴보면 필진은 대부분이 전라남도 출신들이나 전라도와 인연이 닿은 사람들인데, 발행인 박종오가 권두언과 속간의 말에서 개척자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대목에서는 대단한 결기가 느껴진다.


흥미로운 자료로 <전라남도 도세일람(道勢一覽)>

이 있는데, 전라남도의 각종 통계자료가 나와 있다. 예를 들자면 전라남도 시·군의 인구, 경지면적, 면화(목화) 생산량, 뽕나무밭 면적, 가축(소돼지·닭)의 사육두수, 학교와 학생의 수, 문맹자의 수, 의료기관의 숫자, 수산업 종사자의 수와 어획고, 생산 공장 등이 그것이다.



1951년 전라남도 인구는 291만 3776명이며 이 중 무안군의 인구가 24만 7381명으로 전남에서 제일 인구가 많았다(무안군의 2020년 인구는 8만 5245명). 당시 광주시(현 광주광역시)의 인구가 13만 6428명인 것을 보면 그 당시가 농경사회에서 본격적인 산업사회로 가기 전이라 전라남도 지역에 인구가 골고루 분산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통계 기록이다. 70년이 지난 지금 무안군의 인구는 3분의 1로 줄었고 그중 많은 수가 도시로 흡수되었다. 


정찬식은 <한국연극의 진로>를 썼고, 문예란에는 수필로 허연의 <손님>, 여류화가 천경자의 <어떤 선물>, 황도의 <커피-회상>이 있고, 시(詩)로 박흡의 <노계(老鷄)>, 이동주의 <소묘(素描)>가 있고, 콩트로 박석창의 <잊지 못할 사람들>이 있고, 창작란에 현영갑의 <새길로> <문학근감(文學近感) - 장원삼(莊遠三)> 등이 있다.


이 중 서양화가 천경자의 글에 특별히 눈길이 간다. 


“다도색으로 말라가는 넝쿨에 호박꽃이 주렁주렁 피어 달렸다. 한여름에 핀 것보다는 훨씬 적고 경이적으로 빨리 피고 빨리 시드

러가는 모양이 마치 열매를 못 맺은 과부처럼 쓸쓸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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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천경자의 <어떤 선물> 지면(서상진 소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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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해타임스> 지면(서상진 소장본)



이렇게 평범한 호박넝쿨에게도 감정이입을 하는 천경자는 그즈음 몸이 쇠약해 있었나 보다. 그 시절 여느 남편들처럼 아내에게 관심과 애정을 드러내는 것을 남자답지 못하게 여기던 작가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연상은 작가 자신의 결혼사연으로 이어진다. 


필자가 이 글을 조금이나마 소개하는 이유는 글 중에서 한약 달이는 냄새에 대한 언급이 있어서이다. 지금도 한약을 복용하는 사람은 있지만 우린 어디서고 그 한약 달이는 냄새를 맡을 수 없다. 한약은 먹지만 한약 달이는 냄새를 모르고, 기차는 타지만 기적소리를 모르는 요즘이다.


십년이 지나 강산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고 나면 변해 있는 세상이다. 그러니 지난 시절의 잡지에서 이런 기록들을 건져내는 일이 새삼 소중하게 생각된다. 


잡지 <다도해>는 2면을 <다도해타임스>라는 타이틀로 꾸몄는데, 잡지와는 별개의 신문으로 편집하여 기사를 채웠다. 여기에 발행인: 春波 편집인: 醉朗 인쇄인: 松乎. 구독료: 5000원. 월간 10월호. 기사에 저자는 없고, 김악의 <연가(戀歌)> 시(詩) 1편을 실어 품격을 높였다. 거기에 다방 12개(황제, 2號室, 사라센, 금잔디, 아포로, 新星, 멕시코, 금모래, 田園, 우리집, 새마을, 太平)의 광고가 실려 있어서 더욱 이채롭다. <다도해타임스>의 구독료가 책정된 걸로 볼 때 <多島海>와 <다도해타임스>가 따로 발행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 대목이어서 추후 연구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당시 대한민국은 전쟁 중이라 출판계는 영남지방과 호남지방에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였고, 잡지계도 영남에서 몇 종의 잡지와 호남에서 2, 3종의 잡지로 근근이 호흡을 이어갔다. 형태도 전시판 혹은 특집호 정도였다.


<다도해> 책장을 넘기면서 드는 생각은 잡지 표지를 유명 화가의 그림으로 꾸민 것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 할 수 있게 사진으로 표지를 장식한 것이 특이하다는 것이다. 전시(戰時)라서 물자가 귀해 종이를 아끼기 위해 4단 편집을 감행하였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되도록이면 문장을 줄이고 사진 등으로 편집하는 요즘 잡지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변화무쌍한 전쟁 상황에서 전호(前號)가 언제 나왔고 다음 호가 언제나 또 나올 수 있을지 걱정하며 징검다리를 건너듯 <다도해>를 만들었을 모든 분들에게 존경심을 담아 힘찬 박수를 보낸다. 그들이 있어 전쟁 중에도 문학과 예술을 향했던 그 시절의 열정을 느낄 수 있다. 



<多島海>는 전쟁 중 발행된 잡지로 인쇄상태가 좋지 못해 사진 등의 상태 또한 좋지 않다. _<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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