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호 마루대문 관동대지진 100주년을 앞두고 사진은 진실을 말할 뿐이다

2022.03.30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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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100주년을 앞두고

사진은 진실을 말할 뿐이다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삼천리 방방곡곡에 “대한독립 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태극기를 손에 들고 거리로 뛰쳐나온 사람들을 향해 일제는 총과 칼을 앞세워 무력으로 진압했다. 3·1운동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전 민족이 봉기한 항일독립운동으로 비폭력 저항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된다. 


올해로 3·1운동이 일어난 지 103주년이 됐다. 또한 일제로부터 독립한 지도 어느덧 7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청산해야 할 일제의 식민지 잔재들이 존재하고, 풀어야 할 과제들이 남아있다. 우리 앞에 남겨진 과제들을 해결할 때 우리는 진정한 광복을 맞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첫 번째 과제는 100주년을 1년 앞둔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고 억울하게 죽어간 우리 선조들의 넋을 기리는 일이다.


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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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당시 요시하라 연못의 모습이다.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볼 수 있다



조선인을 희생양 삼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도쿄를 중심으로 관동 지방에 진도 7.9급의 초강력 지진이 발생했다. 설상가상으로 지진으로 인한 대화재까지 일어나면서 도쿄, 요코하마 지역을 비롯한 관동 일대는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로 파괴됐으며, 많은 사상자와 이재민이 발생했다.


경제 불황에 대지진까지 발생하자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고 사회는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워졌다. 폭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일본 정부는 민심과 여론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고, 자국민이 분노를 표출시킬 대상이 필요했다. 지진 발생 다음 날인 9월 2일 출범한 제2차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權兵衛) 내각은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사회주의자와 조선인에 의한 방화가 다수 발생하고 있다.” “조선인이 도쿄시 전멸을 기도하여 폭탄을 투척할 뿐 아니라 우물에 독약을 넣어 살해를 기도하고 있다.”


내각은 근거도 없는 온갖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 일본 언론은 확인도 없이 이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철저하게 날조되고 조작된 소문에 일본인들은 대대적인 조선인 색출을 시작했다. 도쿄 시민들은 자경단(自警團)을 결성해 조선인을 발견하면 죽창이나 쇠갈고리 등으로 무참하게 학살했다. 전국적으로 조직된 자경단만 3689개에 달했으며, 군과 경찰에 의한 조선인 학살도 자행됐다. 또한 별도로 관헌의 재원을 받아 ‘불령단’이라는 폭력단체를 조직해 조선인들을 살해하는 데 노골적으로 가담했다. 군과 자경단, 불령단 등에 의해 학살당한 조선인이 <독립신문>에 따르면 6661명에서 많게는 2만 3000명 이상(독일문헌 등)으로 파악된다.기록이나 연구자 간의 추정치가 달라 정확한 숫자를 가늠하기 어렵지만 실제로 많은 희생자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일본 내무성 경보국에서 조사한 <1923(다이쇼 12)년 9월 1일 이후의 경계조치 일반>에 따르면 조선인 사망자 231명, 중경상자 43명, 중국인 3명, 조선인으로 오해받아 살해당한 일본인 59명, 중경상자 43명으로 잡고 있다. ‘조선인으로 오해받아 살해당한 일본인’이라는 표현에서 대지진 당시 ‘조선인’을 상대로 학살이 자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대지진과 화재, 자경단으로부터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조선인들을 보호·수용하고 있던 경찰조차 조선인들을 자경단에 넘기는 일이 적지 않아 그 피해가 컸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도 일본 경찰과 군은 조선인을 보호했을 뿐 조선인을 살해한 건 자경단이라고 발뺌하고 있다.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1923년 당시 총독이었던 사이코 마고토는 학살당한 조선인은 2명이며, 이것도 오인으로 인한 희생이었다고 발표하는 등 학살 사실을 숨기거나 부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조선인을 살해한 건 경찰이 아닌 자경단이라고 주장하는 것부터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행해져

진상 규명해 넋이라도 위로해야

日, 교과서에 ‘학살’ 사실 빼기도



한편 2011년 당시 요코하마시 시립 중학교 부독본에는 관동대지진 당시 유언비어의 확산과 조선인의 살해에 대해 “자경단 중에 조선인을 살해하는 이로 치닫는 사람들이 있었다”라는 말을 “군대나 경찰, 자경단 등은 조선인을 박해하고 학살했다. 요코하마에서도 각지에서 자경단이 조성되어 조선인이나 중국인이 학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고 수정했다. 


그러자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요코하마에서도 군대나 경찰이 (조선인을) 학살했다고 오해할 수 있다”며 문제 삼았다. 이 일로 당시 지도과장을 2012년 9월 계고 처분을 내렸으며 당시 지도주사들도 문서훈계 처분을 받았다. 결국 2016년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학살’이라는 내용을 뺀 채 “조선인, 중국인이 살해되었다”라는 내용으로 교과서를 수정하게 된다. 


정성길 위원장이 입수한 일본 문부과학성 검증 2005년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와 일본사B 교과서에 따르면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6000명 이상과 중국인 200명이 자경단과 관헌에 의해 학살됐다”고 명백하게 기술돼 있다. 그러나 5년 뒤에는 ‘조선인 학살’이란 표현 대신 단순히 많은 조선인이 희생됐다는 표현으로 바뀌어 있었으며, 아베 정권이 재차 들어섰던 2013년에는 조선인이 희생됐다는 표현마저도 삭제해버렸다. 학살을 부인하고 역사마저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2013년 6월에는 이승만 정권 시절 작성된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피해자 289명의 명단이 발견된 바 있다. 이듬해인 2014년에는 목격자 및 유족들의 조사가 이뤄졌으며, 2015년 1월 18일 1차 검증 결과 명단에 있던 289명 중 18명이 실제로 학살당했으며 명단에 없던 3명이 새롭게 피해자로 확인되기도 했다. 2015년 12월 최종적으로 명단의 289명 중 28명이 실제로 학살 당한 것이 맞다는 검증 결과를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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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2, 3에 대해


거짓은 반드시 드러난다

역사는 왜곡될 수 있지만 역사의 현장을 기록한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일제가 당시 대지진과 대화재로 피폐해진 자국민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죄 없는 조선인들을 대량 학살(제노사이드)의 희생자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많은 기록 사진들이 증명해주고 있다. 


아무리 발뺌한다고 해도 무고한 조선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일본 정부는 군대와 경찰의 학살은 모두 은폐하고 그 책임을 민간인 자경단에 돌렸지만, 이마저도 형식상 재판에 회부한 것에 불과해 모두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된다. 분명 학살당해 죽은 사람들은 있지만 학살을 자행한 사람들은 없는 형국이다. 참으로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년이면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이 자행된 지 100년이 된다. 그 긴 세월 동안 일본 정부는 인정도,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 우리 정부 또한 이에 대해서는 여전히 뒷짐만 지고 있다. 이는 정권이 바뀌어도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는 것 중 하나다. 민간에서의 움직임은 한계가 있다. 외교 관계를 문제 삼자면 일본 정부의 인정과 사과를 받아내는 일은 더욱 지지부진해질 뿐이다. 이에 관동대지진 당시 자행된 조선인 학살을 ‘제노사이드’ 범죄로 규정하고 일본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관련 자료와 사진을 모아 세상에 알린 이가 있으니 바로 정성길 관동대지진위령탑건립추진위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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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길 관동대지진위령탑건립추진위원장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정성길 위원장이 2013년 공개한 사진으로 당시 일부 일본인들로부터 1920년대 일본에서는 가로쓰기의 경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공개된 사진 위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적혀 있다며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사진 1에 적힌 글자는 ‘大正 十二年 九月一日(다이쇼 12년 9월 1일)’으로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날인 1923년 9월 1일을 의미한다. 


한편 정 위원장은 이 사진을 두고 “개가 죽어도 비석을 세울 정도로 장례를 중시하는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 사람이면 죽은 사람의 시신에서 하의를 벗겼겠냐”면서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 희생자를 찍은 사진”이라고 설명했다. 


2013년 공개 당시 일본 우익지인 산케이신문과 일부 일본인들은 하의가 벗겨진 점만 보고 조선인 희생자의 사진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며 당시 일본 여성 중에는 하의를 착용하지 않은 여성들이 꽤 있었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이 사진을 두고 1911(메이지 44)년 당시 환락가였던 도쿄 요시하라에서 발생한 대화재에 희생된 여성들의 사진이라는 주장을 제기하면서 사진 속 바위에 ‘신요시하라공원의 참상’이라고 적힌 똑같은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공개된 사진은 동북예술공학 동북문화연구센터 아카이브에 게재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요시하라 화재 사망자는 8명이었다는 점에서 근거 없는 주장임이 밝혀졌다.

 

일본에서도 이 사진은 요시하라 화재 때 사진이 아닌 관동대지진 때 사진이라는 의견이 다수를 이루지만 학살당한 조선인 희생자가 아니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하지만 누워 있는 모든 시신의 하의가 벗겨져 있다는 점과 쇠꼬챙이 같은 막대기를 들고 있다는 점 등에서 많은 의문을 제기하는 사진이다. 조선인을 무참하게 학살하고 그 시신마저 모욕했음을 추정할 수 있는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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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 역시 ‘大正 十二年 九月一日’이라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쓰기가 되어 있다. 당시 가로쓰기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바뀌었

다고 하더라도 습관적으로 혼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관동사령부에서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습관적으로 사용했으며, 관동대지진 

1년 후에 나온 사진과 1923년도 발행된 엽서에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 일이 허다했다. 

사진에는 광동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 희생자들로 추정되는 시신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장면이 담겨 있다. 아무렇게나 방치해 

부패한 시신들의 모습에서 당시의 참혹함을 읽을 수 있다. 




정 위원장은 관동대지진 당시 자행된 조선인 대학살은 ‘조선인 폭동설’ 등 조작된 유언비어를 일본 정부가 조직적으로 유포시켜 선동한 대학살이므로 ‘제노사이드(genocide)’로 인정해야 한다고 오랜 세월 외쳐왔다. 


그는 “내년이면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선조들이 공포 속에서 잔인하게 학살을 당했는데도 아직 정확한 사망자 수도 모르고 있다”며 “정부가 이들의 억울한 넋을 풀어주지 못한다면 의식이 깨어 있는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정성길 위원장은 2018년 ‘조선인 대학살’을 규명할 수 있는 증거 사진들을 모아 <95년 전 한국 동포 대학살 화보 ‘관동대지진의 실체’>를 출판할 정도로 그 진상을 규명하는 일에 사활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2013년 정 위원장은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증거로 사진 몇 장을 세상에 공개한 바 있다. 사진이 공개되자마자 정 위원장은 ‘조작된’ 사진이라는 소리와 함께 많은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공개한 사진은 일본인 사진작가 오카다 고요(岡田紅陽, 1895. 8. 31 ~ 1972. 11. 22)가 도쿄부의 요청으로 1923년 일어난 관동대지진에 관한 사전 조사 및 답사를 위해 촬영한 사진의 일부로 알려졌다. 즉 관동대지진의 기록 사진으로 <다이쇼 대지진 대화재 참상 사진집(大正大震災大火災惨状写真集)>에 실린 사진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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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당시인 1923년에도 상당수의 일본인과 행정기관 등에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쓰기를 통용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관동

계엄사령부(關東戒嚴司令部) 정문을 찍은 사진에도 위쪽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쓰기를 한 ‘各方面の大活動(각 방면의 대활동)’이

란 글씨를 볼 수 있다.



조작된 사진이라고 주장하며 공격했던 이들은 당시 사진에 적힌 일본어 쓰기 방식을 문제로 삼았다. 1920년 전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일본어 가로쓰기를 했다면 1920년 이후부터는 일본어 가로쓰기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사용하게 됐다는 점이다. 이를 토대로 공개된 사진 속 일본어 가로쓰기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돼 있으니 이는 관동대지진 당시의 사진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가로쓰기 방향의 혼용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오랜 세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사용해왔던 문화가 몇 년 사이에 일제히 바뀌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실제로 일본에서 출판된 당시 사진집에도 가로쓰기 혼용이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한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억지 주장과 공격을 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당시 공개됐던 사진과 함께 같은 장소를 찍은 다른 사진들을 각각 공개해 당시의 참상을 다시금 세상에 알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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