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호 마루대문 찬란함, 그 뒤에 가려진 역사 속으로

2021.12.19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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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함, 그 뒤에 가려진 

역사 속으로 


글 이예진   사진 이지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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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도 망주봉 전경



‘찬란하다’는 “일이나 이상(理想) 따위가 매우 훌륭하다”의 의미를 가진다. 흔히 들 문화재를 가리켜 “찬란한 문화유산”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문화유산 중 찬란 하지 않은 것이 있을까 싶지만 그중에서도 화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자연만큼은 우리의 입을 떡 벌어지게 한다. 게다가 역사적인 사실까지 더해지면 우리만의 ‘역사(history)’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탐방팀은 서해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드넓은 바다에 흩뿌리는 태양 의 반짝임을 간직하고 저녁시간 고즈넉하게 넘어가는 석양이 아름다운, 그리고 10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군산 선유도와 부안 변산반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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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도 망주봉



신선이 노닐던 곳, 선유도


군산에서 서남쪽으로 약 50㎞ 해상에 위치한 고 군산군도는 선유도를 비롯해 63개의 섬이 밀집 돼 있으며 그중 16개의 섬에 사람이 살고 있다. 특히 고군산군도에서 중심에 있는 선유도(仙遊 島)는 그 이름에 ‘경치가 무척 아름다워 신선이 노닐던 섬’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신선이 찾아 올 만큼 아름다운 섬! 그렇기에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유명 관광지다. 


하지만 과거의 고군산군도는 수문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지금은 인천, 부산이 주요 교역 도시지 만 중국, 일본과 교역하던 과거에는 군산만큼 중 요한 곳이 없었다. 특히 군산 옆에는 백제의 수도 였던 익산이 자리하기 때문에 군산은 한-중-일을 연결하는 교차점이었다. 삼국시대뿐만이 아 니라 이후 해양 국가였던 고려시대에도 수도 송 악을 가기 위해 군산은 무조건 거쳐야하는 곳이 었으며 조선시대에도 세곡선이 드나들던 곳이었 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때 수많은 공물들이 수탈 되는 장소 중 하나였다.


그만큼 해양과 내륙을 연결하는 길목이었던 이 곳은 일찍이 수군이 주둔하던 곳으로 조선 태조 6(1387)년에는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수군 만호영을 설치했다. <세종실록지리지> 만경현조 에 “군산은 병선을 정박시킨 곳으로, 섬이 둘 있 는데 군산도와 망입도가 있다”고 적혀 있다. 하 지만 고군산군도의 군대 설치는 조선시대가 처 음이 아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기록한 <고려도경>에는 고군산군도의 모습과 사신들을 맞이 하던 ‘군산정’, 역락선 역할을 하던 ‘송방’ 등이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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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도의 노을



이런 가운데 고군산군도는 시대마다 이름이 바 뀌었다. <고려도경>에서는 군산이라고 했으며 <고려 사>에서는 군산도, <조선 왕조실록>에는 고군산으 로 기록돼 있다. 이는 조선 세종 때 수군 진영을 지금의 군산시 영화동 진포로 옮기면서 군산이라는 이름이 내륙으로 옮겨졌고 섬에는 고(古)를 붙여 ‘고군산’이라 불리다가 일제강점기에 ‘선유도’로 정착됐다.



고군산군도, 해양과 내륙의 길목 
시대마다 다양한 이름을 거쳐 
그리운 주인(임)을 향한 ‘망주봉’ 


그리고 선유도에는 커다란 두 개의 바위산이 있 는데 ‘망주봉’이라 불린다. 망주봉에는 하나의 설 화가 이어져오는데 옛날 간신들의 모함으로 귀 양을 왔던 신하가 자신을 잊어버린 임금을 그리워하며 바위산에 매일 올라 한양을 바라봤다고 해 서 ‘망주봉(望主峰)’이라고 전해진다. 


또 다른 내용으로는 천년 도읍을 이루기 위해 왕이 될 자가 북에서 선유도로 온다는 계시에 선유도 에 살던 젊은 부부가 나란히 서서 기다리다 지쳐 바위산으로 굳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두 개의 설화 모두 주인을 그리워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아마도 날씨가 좋은 날 망주봉에 올라 바라보 면 탁 트여있는 전경 가운데 먼 육지가 보이기 때 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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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도 월영산의 주상절리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또 다른 곳에도 적혀 있으 니 바로 <성경>이다. <성경>에 보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는 제사장들이 나타나고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고 한다. 하나님을 주(主)님이라고 도 하니 망주봉 설화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능 력과 신성을 알 수 있게 했다고 하시는 말씀과도 같다.


최치원의 글소리가 중국에까지 들리더라


고군산군도 중에서도 가장 큰 섬이자 주섬(主島)은 신시도다. 선유도가 아름다워 인기가 가장 많 아 주섬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실질적인 주섬은 신시도다. 신시도는 지난 2005년 새만금 방조제 공사로 인해 비응도·야미도와 함께 육지가 됐다. 신시도는 신라시대 고운 최치원(崔致遠)과 밀접 한 관련이 있는데, 최치원이 섬의 가장 높은 월영 봉에 월영대를 만들어 시와 글을 읽은 소리가 중 국에까지 들렸다는 전설이 있다. 그만큼 최치원 이 중국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는 대 목이다. 


고운 최치원은 유불선(儒佛仙)의 세 종교를 포용 한 사상가이자 현실 정치를 고치고자 했던 개혁 가이다. 그는 18세에 진사시에 급제했으며 881 년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당나라에 이름을 날렸다. 이후 개인문집인 <계원필경>을 지었으며 34세에 태산군 태수로 지냈고 38세에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를 올렸으나 시행되 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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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도 월영봉에서 바라본 새만금 방조제



이런 최치원과 관련된 명칭들이 신시도에는 여 전히 남아있다. 최치원이 깊이 은둔했다는 심리 (深里), 글을 읽으며 새로움을 다졌다는 신치(新 峙)와 마지막으로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는 대각 산(大覺山) 등이 있다. 사실 최치원의 고향은 경 주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출생설화와 관련된 유 적이 군산에 많이 남아 있어 군산에서 태어났다 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최치원이 글을 읽었다고 하는 월영봉에 오르면 특이한 모양새의 주상절리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산의 높이는 199m로 낮은 편에 속하나 주상절 리로 인해 난이도가 조금 높은 편이다. 그래도 월 영봉에 오르면 탁 트인 비경이 우리를 맞이한다. 새만금 방조제와 고군산군도를 모두 한 눈에 볼 수 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새만금 방조제와 하 늘이 만든 고군산군도를 보면 자연과 인류의 풍 요로움을 조화롭게 느낄 수 있다. 



망국으로 잊혀버린 백제의 땅, 변산


고군산군도에서도 보이는 부안은 서해를 향해 툭 튀어나와있는 곳이다. 삼국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이곳은 조선시대에 와서 부령현과 보안 현을 합쳐 지금의 ‘부안’이 됐다. 삼국시대에는 부령현을 개화현, 보안현을 흔량매현이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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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암사에서 올려다 본 울금바위



부안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변산반도국립공원’ 이다. 변산반도국립공원은 1988년 6월에 도립 공원에서 국립공원으로 승격됐으며 내변산 지역 과 외변산 지역으로 크게 나뉘는데 쉽게 말해 산악 지역과 해변지역으로 구 분된다. 변산은 일찍이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명승지로 알려진 곳으로 호남 5대 명산으로도 불렸다. 


그중에서도 ‘능가산’이라고도 불리는 우금산(禹 金山)은 변산반도국립공원 동북부에 있으며 고 찰(古刹) 개암사를 품고 있다. 특히 울금바위와 우금산성도 함께 볼 수 있는 명소인데 높이는 340m로 높지는 않지만 옆으로 넓게 퍼져있어 개암저수지부터 개암마을, 개암사, 울금바위, 우 금산성터, 우덕마을 순으로 산행을 하면 4~5시간 정도 걸린다.



1988년 승격된 변산반도국립공원
일찍이 호남 5대 명산으로 꼽혀
백제의 왕터였던 고찰 ‘개암사’ 


우금산이 품고 있는 개암 사(開巖寺)는 예부터 변 산 8경 중 하나로 꼽혔다. 18세기 변산기행에 나섰 던 강세황이 적은 <유우금암기>에는 “길을 꺾어 몇 리를 가니 흐트러진 소나무 사이로 기단 갖춘 전각이 날 듯이 서 있 으니 바로 개암사”라고 소개했다. 특히 개암사에 서 올려봤을 때 보이는 울금바위가 웅장하면서도 묵직하게 다가온다. 먼저 개암사는 원래 왕터 로 먼저 자리를 잡았던 곳이다. 아주 오래전 백제 가 세워지기도 전인 변한의 군주가 진한과 마한 의 난을 피해 이곳에 도성을 쌓았다. 당시 우(禹) 와 진(陳)이라는 두 장군이 감독했는데 30년 동 안 도성을 지키면서 바위 좌우에 큰 사찰을 짓고 묘암과 개암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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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산 울금바위


울금바위에 대한 기록도 전해지는데 영조 46년 에 편찬된 <증보문헌비고 여지고>에는 “우금성은 우진고성이라고 불렸는데 우진암 양쪽 기슭 을 둘러싸고 내려와 골짜기에서 합쳐진다. 둘레 가 10리이다. 세간에 전하기를 삼한 때에 우·김 두 장수가 성을 쌓고 군사를 주둔했던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모두 허물어졌는데 묘암사가 그 골 짜기 가운데에 있다”라고 적혀있다. 


그렇다면 왕성이었던 이곳이 어떻게 절로 변했 던 것일까. <부안군개암사연혁기>에 의하면 개 암사의 처음은 삼국시대 백제시절이다. 백제 무왕 35(634)년 왕사 묘련(妙蓮)이 태자 풍장이 일 본에서 돌아오자 이곳에 전각을 짓고 ‘묘암개암’ 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앞서 두 장수가 만들었다 는 사찰도 묘암과 개암이었던 것으로 보아 실제 로 묘암과 개암이라고 하는 절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676년 원효(元曉)대사와 의상(義湘)대사가 한 굴에 머물면서 암자를 중수했는데 이 굴을 ‘원 효방’이라고 부른다. 이는 이규보의 <동국이상국 집>에도 나오는 명칭이다. 그리고 현재의 개암사 형태로 만든 것은 고려 말 원감국사에 의해서다. 


원감국사는 송광사에서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 황금전, 청련각, 백옥교, 청허루 등을 건립했으며 <능가경>을 강의해 오늘날 이 산의 이름을 ‘능가 산’이라고도 부른다.


이처럼 개암사는 오랜 시간을 자리하면서 굳건 하게 서 있다. 개암사를 뒤로하고 산에 오르면 백 제 부흥운동과 관련한 우금산성을 만날 수 있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20호인 우금산성은 백제가 멸망한 후 복신장군이 일본에 가 있던 왕자 풍을 앞세우고 백제 유민들을 모아 신라에게 항전을 했던 곳이다. 하지만 김유신 장군에게 지면서 백제는 역사 속으로 잊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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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신이 백제 부흥운동을 준비했던 복신굴. 원효굴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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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금바위에서 바라본 경관



하지만 ‘백제’라는 이름은 없어졌어도 끝까지 항 전했던 터는 남아있다. 우금산성에는 커다란 굴 이 있는데 ‘원효방’ 또는 ‘복신굴’이라고 불린다. 앞서 설명했듯 원효가 개암사를 중수하기 위해 머물렀던 굴이기 때문에 ‘원효방’이라고 불렸으 며 복신굴은 복신장군이 투쟁을 하던 곳이기 때 문이다.


우금산성을 돌아가면 개암사에서 볼 수 있었던 울금바위에 오를 수 있다. 다만 바위로 되어 있어 오르는 데 주의가 필요하다. 힘써 바위 위로 올라 가면 아래에 있는 개암사는 물론 뒤편으로 호남 평야와 서해 바다가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웅장함이 다른 신이 만든 자연


변산반도의 내변산 지역으로 우금산에 올랐다면 외변산 지역으로는 채석강과 적벽강을 꼽을 수 있다. 전라북도기념물 제29호인 적벽강은 절벽 과 암반으로 2㎞ 정도 펼쳐진 곳을 말한다. 중국 의 적벽강만큼 경치가 뛰어나다는 의미로 이름 이 붙여졌다. 이름만 보면 강(江)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해변을 의미한다.


적벽강 인근에는 후박나무 군락이 있는데 이 또 한 천연기념물 제123호로 지정됐다. 후박나무 군락부터 펼쳐진 해안은 전라북도기념물 제28호 채석강까지 이어지는데 암반과 절벽의 암석, 자 갈돌들이 적갈색을 띠고 있다. 특히 해가 질 때 석양에 비춰 장관을 이뤄 석양 명승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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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석강


적벽강은 화강암과 편마암을 기반으로 하며 약 8000만 년~6000만 년 전 사이의 중생대의 백악 기에 쌓인 층들을 이루고 있다. 


채석강 역시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술을 마시며 놀 았다는 중국의 채석강과 비슷하다고 해 이름이 붙 여졌다. 옛 수군의 근거지 이며 조선시대에는 전라우수영 관하의 격포진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단 층과 습곡이 발달된 기암절벽이 장관을 이루며 곳곳에 해식동굴을 이루고 있다. 격포해수욕장 부터 둘러볼 수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 며 지형·지질 현장 학습을 할 수 있는 곳으로 활용되고 있다. 



신이 만들어낸 화려한 기암절벽
중국에서 이름 딴 적벽강·채석강

군산·부안, 아픈 역사 지녔지만
자연의 화려함 간직하고 있어 


군산과 부안은 아름다운 자연으로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 들어다보면 수탈 과 패망의 역사를 갖고 있 는 곳이기도 하다. 군산은 일제강점기에 호남평야에서 거둬들인 쌀을 수탈해가는 현장이었다. 그 흔 적은 지금도 남아 있어 우리의 아픔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부안 역시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백제의 멸망을 품고 있는 곳이다. 백제 는 고구려, 신라보다 먼저 한강을 차지하고 불교 문화의 꽃을 피워 인근 국가에 영향력을 끼치기 도 했다. 그랬던 백제가 허물어져가면서 결국 잊 힌 것과 다름이 없다. 결국 졌기 때문에 기억 속 에서 잊혀진 것이다.


하지만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생각하면 외세의 침략으로 멸망을 했다 하지만 결국 내부에서의 고름이 먼저 생기면서 시작된다. 


백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백제부흥운동은 4년 동 안이나 이어진 그들의 염원이었다. 그러나 주도 세력이었던 복신과 도침의 불화로 복신이 도침 을, 풍왕이 복신을 죽이면서 나당연합군에게 결국 패망하게 됐다. 


이런 것을 보면 오늘날 우리의 역사도 과거와 맞 닿아있음을 알 수 있다. 1945년 일제로부터 빛 을 찾은 광복의 염원이 이뤄졌다 하지만 과연 우 리에게 온전한 광복이 왔는가 하는 생각을 해야 한다. 하나의 민족이었던 한반도는 현재 둘로 갈 라져 동포에게 총부리를 여전히 겨누고 있으며 남한에서조차 보수와 진보로 갈려 입의 칼로 서 로를 찌르는 현장을 바라보고 있다. 


언제까지 이러한 다툼을 바라봐야 하는가. 지금 은 대우주 갑자년인 1984년을 지나 새로운 시대 가 열리는 때이다. 이전까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역사를 바라봤다면 이제는 눈이 뜨여 모 든 것이 드러나는 시대에 맞춰 과거의 역사를 바 라보고 살아가는 현재와 다가오는 미래를 대비 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온전한 회복이 되는, 빛의 역사 광복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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