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호 역사 근대 건축가 강윤(1)

2021.06.03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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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건축가 강윤(1)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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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감리교 선교본부




강윤(姜沇)은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柳愚錫, 이명 준석, 관옥)과 공주영명학교 동급생이며 1919년 4월 1일 공주 읍내의 만세시위 때 유우석과 함께 주도자로 참여하여 대통령표창을 받은 독립유공자이다. 


출생과 성장

강윤(姜沇)은 1899년 4월 28일 충남 논산군 양촌면(陽村面) 인천리(仁川里)에서 부친 강창석(姜昌錫)과 모친 김말자(金末子) 사이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강윤은 코가 우뚝하고 눈이 크고 눈썹이 진하며 귓바퀴가 유난히 컸고, 어릴 때부터 영리하고 서당에서 글공부 등 모든 면에서 항상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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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사이공학전수학교시절의강윤

(출처:김정동,강윤과그의건축활동에대한소고)



부친 강창석은 지주였는데, 농사일보다 양반으로서의 벼슬자리에 꿈을 버리지 못했다. 또한 함경도에서 철도사업을 한다며 갖고 있던 땅을 조금씩 처분하여 주로 경성(서울)에서 소일하며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가족 생계는 오롯이 어머니의 어깨 위에 놓이게 됐다. 어머니 김말자는 행상에 나섰다. 어머니는 어느 날 감리교 공주읍 교회에 많은 사람이 모인다는 말을 들었다. 현석철 목사의 대부흥회가 있는 날이었다. 장사 대목을 보려고 강윤을 데리고 갔다.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일찍 떨이를 하고 설교에도 참석했다. 어머니는 설교에 뜨거운 감동을 느껴 그 길로 기독교로 개종했다. 


강윤은 학비 없이 공부할 수 있다는 말에 끌려 1916년 17세에 영명학교에 입학했다. 동급생보다 2살이나 위인지라 모든 면에서 솔선해서 노력했다. 학업도 열심히 하여 윌리엄스 교장과 여러 교사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교장 윌리엄스

김윤에게 깊은 영향을 준 교장 프랭크 윌리엄스(Frank Earl Cranston Williams, 禹利岩, 1883~1962) 선교사는 미국 콜로라도주 츨신으로 1906년 덴버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7월 부인과 함께 감리교 선교사로서 한국에 부임했다. 1907년 공주읍 교회 담임목사가 되어 1940년 1월 일제에 의해 강제추방 될 때까지 33년간 공주에서 선교사로서 봉사하는 한편, 1906년 10월 15일 영명학교(지금의 공주영명고등학교)를 세워 1940년 1월 한국을 떠날 때까지 줄곧 교장을 맡았다. 미국에 돌아간 그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인도 주둔 영국군에서 근무하며 일본군과 싸웠다. 1943년 광복군 인면공작대가 인도에 파견됐을 때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서양 장교를 만났다. 그가 33년간 공주에서 봉사한 윌리엄스 선교사였다. 해방 후 그는 미 군정청 하지 장군의 농업정책 고문으로 내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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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윌리엄스선교사부부



6·25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선교사로 복직하여 일본 나가사키에서 전쟁으로 파괴된 학교의 재건 사업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한국 임무를 끝내고 1954년 미국 캘리포니아에 돌아가 은퇴하였으며 1964년 사망했다. 


윌리엄스는 한국에 와서 첫 아들 조지 윌리엄스(George Zur Williams, 1907~1994)를 낳았다. 그는 아들의 한국 이름을 광복(光復)이라 지었다. 한민족의 염원을 아들의 이름에 새길 만큼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했다. 


인천에서 태어난 조지 윌리엄스는 영명학교를 졸업하고, 조부모가 있는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로 가서 고등학교와 의과대학을 마쳤다. 그는 미 해군 군의관이 되어 해방 후 한국으로 와서 한국말을 아는 사람이 없던 미군정에서 하지 사령관의 보좌관으로 발탁됐다.


공주읍내 만세시위 참여

서울과 각지에서 독립운동 소식이 공주로 들려오자 영명학교 교사 김관회(金寬會, 33)는 3월 24일 밤 9시경 공주 감리교회 현석철 목사, 천안 감리교회 안창호 목사1), 오익표, 교사 이규상, 교사 현언동, 김사현, 학생 안성호와 회합을 열었다. 이들은 4월 1일 영명학교 학생들을 참여시켜 공주읍내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교사 김관회와 조수 김수철이 영명학교 학생 강윤·유준석(우석)·노명우·윤봉균 등이 참여하여 선언서를 만들어 학교 등사판으로 약 1000매를 인쇄하고 태극기도 만들었다.


1919년 4월 1일 공주 만세시위는 치열했고 강윤과 유준석과 여성 참여자 김현경은 일경이 휘두른 칼에 맞아 인력거에 실려 법정에 출두해야 했다. 강윤은 이때 입은 이마와 머리에 난 상처자국을 ‘영광의 상처’로 생각하여 일본에서 건축을 공부할 때 감추지 않았다 한다.



호 죽사(竹史), 1885년 경기도 양주 별내면 출생. 배재고보를 나와 인천 내리교회 영화학교 교사로 있다가 1908년 6월 윌리암스 선교사의 통역 겸 영명학교 교사로 왔다. 그는 공주지방 순회 전도사 겸 공주교회 담임 목사로 봉사하다, 1915년 천안읍에 감리교회를 처음 세워 1919년까지 천안지방 순회 목사 겸 천안교회 담임목사를 하며 감리교를 개척했다. 이후 1926년까지 진남포, 평양 차관리 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하고, 하와이로 가서 1966년 12월 30일 사망할 때까지 하와이에서 목회자로 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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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목사



공주 만세시위로 교사와 학생들이 체포 구속당하자 윌리엄스 교장이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그는 일제 당국과 일인 재판장에게도 탄원도 하며 기도로 간절하게 매달렸다. “결국 사상이 좋지 않다는 영명학교를 폐교한다”는 조건으로 형벌을 줄이게 되었으며, 졸업식 없이 7명의 학생들에게 졸업장을 주었다. 


강윤은 이렇게 하여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으로 실형을 피하여 석방될 수 있었다. 강윤이 집행유예로 풀려나자 윌리엄스 교장은 강윤을 일본에 있었던 보리스 선교사 밑에가서 건축공부를 하게 권유했다. 


스승 보리스 

강윤의 건축학 스승 보리스의 온전한 이름은 윌리엄 메렐 보리스(William Merrel Vories, 1880. 10. 28~1964. 5. 7)이다. 그는 일본으로 귀화한 미국 출신의 교육자, 건축가, 기업인, 기독교 선교사이며, 기독교 선교 사업을 위해 그가 설립한 오미 선교부의 창시자이다. 


보리스는 네덜란드 계통의 미국인으로 1880년 미국 캔사스 주 리번워스(Leavenworth)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는 건축을 공부하고자 마사추세츠공대(MIT)에 지망하여 입학이 결정되었으나, 가정 형편상 1900년 콜로라도 칼리지 이공계 과정에 입학하였으며 대학에서 YMCA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05년 선교 사업을 돕기 위해 일본 시가현립상업학교(지금의 시가 현립 하치만 상업학교)의 영어교사로 왔다. 그는 방과 후에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기독교 신앙과 청교도 윤리를 학생들에게 심어주었다. 


그가 영어교사로 일한 2년간 영어 성경 공부를 통해 개종자가 늘어났다. 많은 학생들이 보리스의 기독교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채 1년도 되지 않아 교사 2명과 학생 35명을 중심으로 1905년 10월 일본 최초의 ‘중등학교 기독교청년회(YMCA)’를 조직하게 되었다. 


그의 영어반 학생의 1/3이 근처 사원의 불교도였다. 승려들이 집단반발을 했다. 보리스의 기독교 운동이 활기를 띠어 갈수록 지역 주민들의 반대가 심해졌다. 기독교 학생들에 대항하기 위해 불교청년회가 조직되고, 폭력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새로 부임한 교장은 지역주민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1907년 3월 보리스를 교사직에서 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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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엄메렐보리스(WilliamMerrellVories,1905년경)



그것이 전화위복이 됐다. 보리스는 1907년 오미하치만(近江八幡) YMCA 사무실 건축 감리를 요청받았다. 건축가로서 첫 사업이었다. 그의 사업가적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되기 시작하였다. 1908년 그는 건축설계 사무소를 열었다. 이듬해 건축사 레스터 차핀(Lester Chapin), 영어반 학생이었던 에소조 요시다와 함께 교토에 보리스사(Vories & Co.)를 설립했다. 그 후 사업이 발전함에 따라 처음 영어를 가르쳤던 비와호(琵琶湖)를 낀 오미하치만(近江八幡)으로 거점을 옮겼다. 그는 일본 YMCA 활동을 통하여 많은 미국인과 일본인을 알게 되었고, 건축사를 비롯한 30여 명의 전문 인력을 고용하여 태평양전쟁 발발 전까지 일본과 한국 등지에서 1,600채 이상의 주택, 상업건물, 교회 및 YMCA 건물을 설계했다. 1918년 보리스는 기독교 선교와 교육 사업에 집중하기 위해 오미(近江) 선교부를 설립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던 그해 보리스는 수에노리 히토쓰야나기(Suenori Hitotsuyanagi) 자작의 딸 히토쓰야나기 마키코(一柳満喜子, Hitotsuyanagi Makiko, 1884~1969)와 결혼했다. 이듬해인 1920년 그는 선교사업 자금을 위해 멘소래담(Mentholatum)이라는 연고를 판매하는 오미상사(近江商社, Omi Sales Company)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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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기념관. 그가 살던 옛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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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선교사가 지은 일본 Osaka의 그리스도 연합교회

(the United Church of Christin Japan)



멘소래담은 보리스 선교사와 같은 칸사스주의 위치카 출신 앨버트 알렉산더 하이드(Albert Alexander Hyde)가 1889년 설립한 유카社(The Yucca Company) 제품이었다. 유카사는 부동산업으로 출발했는데, 부동산 경기가 침체하자 이를 접고 감기약 시럽, 세탁비누, 화장비누와 면도용 크림을 생산하는 제조업을 전환했다. 


이 회사는 1894년 맨소레담 연고를 개발했다. 이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자 회사 이름을 멘소레담(Mentholatum)으로 바꿨다. 일본에는 미국 선교사를 따라 멘소레담이 들어왔다. 보리스 선교사는 1920년 멘소레담의 일본 내 판매권을 취득하여 오미상사를 통해 일본에서 판매를 시작했다. 


태평양전쟁 개전을 앞두고 미일갈등이 첨예화되고 일본과 한국 등지의 미국인을 본국으로 추방하던 때 그는 일본에 뼈를 묻고자 귀화 신청을 하여 1941년 일본 국적을 얻었다. 그의 일본이름은 히토쓰야나기 메레루(一柳 米来留)이다. 메렐의 음을 딴 그의 이름은 “미국에서 와서 머물러 살고 있다”는 의미도 가진다. 


보리스는 1905년부터 1964년까지 약 59년간 일본에서 활동하는 동안 1908년부터 1939년까지 총 17회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의 한국방문은 주로 한국 내 건축사업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한국의 많은 근대 건축물을 설계하였다. 1945년 패전 후 더글라스 맥아더와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사이를 중재하여, 일본 천황제가 존속하도록 맥아더 장군의 이해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했다. 논픽션 작가 가미사카 후유코(上坂冬子, 1930. 6. 10~2009. 4. 14)는 그를 “천황을 지킨 아메리카인”이라 평했다. 천황도 1947년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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