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호 역사 진단학보 대한민국 최고의 역사학회가 만드는 학회지

2022.03.01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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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학보

震檀學報 

대한민국 최고의 역사학회가

만드는 학회지 


글·사진 서상진 세계잡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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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학보> 창간호 표지 (서상진 소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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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학보> 창간호 판권(서상진 소장본)



1934년 11월 28일 창간

발행인 : 이병도李丙燾

발행소 : 진단학회

인쇄소 : 한성도서주식회사

인쇄자 : 김진호

가격 : 금70전. 부정기

책 크기 : 15㎝×22㎝

면수 : 230



<진단학보>는 진단학회에서 발간하는 학회지다. 우리 민족의 역사의식이 일제가 만들어놓은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되는 것을 막고자, 1934년에 결성된 한국사 연구단체가 ‘진단학회’를 만들었고 거기서 <진단학보>를 발간한 것이다. 일본인의 식민사관을 벗어나 한국인의 시각으로 역사를 바로 보고자 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일제의 탄압이 거세어지면서 1941년 6월에 14호를 발간하고 일제에 의해 학회가 해산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4년 뒤가 해방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폭풍전야의 고요처럼, 패망을 앞둔 광기는 제 꼬리를 물고 돈다.


‘진단학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한 인사들의 명단을 보면 이병도, 고유섭, 김두헌, 김상기, 김윤경, 김태준, 김효경, 문일평, 박문규, 백낙준, 손진태, 송석하, 신석호, 우호익, 이병기, 이상백, 이선근, 이윤제, 이은상, 이재욱, 이희승, 조윤제, 최현배, 홍순혁 등이다. 여기서 이병도, 이윤제, 이희승, 손진태, 조윤제 이렇게 5인은 실무위원이었다. 


<진단학보>는 1934년 11월 창간하여 1941년 6월 통권 14호로 학회가 강제 해체되었다가 해방 후 미 군정청 시기인 1947년 5월 28일 통권 15호의 복간을 시작으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어오고 있다. 지령 137호를 발간하여 대한민국 최고의 역사학회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당연히 대한민국 최고의 학술단체인 진단학회 회원들은 해방 후 대한민국 역사학계나 대학교수 등으로 이 땅의 역사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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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학보> 창간호 목차(서상진 소장본)




8·15해방 후 <진단학보>를 복간하면서 발행인이 송석하로 바뀌었는데 그 이유는 이병도의 친일문제로 진단학회가 내부적으로 시끄러워 해방 후에 발행인이 바뀐, 복간사가 없는 복간호를 조용히 내고 말았다. 


<진단학보> 복간호 : 1947년 5월 28일 발행

발행인 : 송석하 

발행소 : 진단학회(국립민속박물관 내)

인쇄소 : 대동인쇄소 

가격 : 금300원. 부정기

발매소(판매소) : 박문서관 

책 크기 : 18.2㎝×24.3㎝

면수 : 154


내용을 살피다 보니 <하멜표류기> 전문을 <진단학보> 1·2·3호에 나누어서 싣고 있다. <하멜표류기>는 서양에 알려진 최초의 한국 관련 서적으로 당시 베스트셀러로 여러 나라 언어로 발행되는 기록을 남겼다.


어느 해인가가 TV 다큐에서 보았던 것도 같아 자세히 읽어보니 그 내용이 자못 흥미롭다(이 <하멜표류기>는 대한민국 최초로 이병도가 번역하여 발표하였다. 하지만 여기 실린 내용은 다른 번역본(영어·불어)도 참조한 듯하다. 하멜이 이 기록을 한 이유가 표류 기간의 임금을 받기 위하여 회사(동인도회사)에 제출할 증빙자료로 사용하기 위해서라고 하니 자본주의 사회인으로 철저한 기록 습관에 새삼 경의를 표하고 싶다).


아래는 1호에 실린 <하멜표류기>의 줄거리의 요약이다.


<蘭船濟州道難破記 네델란드 배 제주도 난파기 - 附 朝鮮國記 부 조선국기 - 핸드릭 하멜 저, 이병도 역주>


1653년 화란을 떠났다. 1653년 5월 10일 밤에 우리 일행 64명은 순풍을 얻어 텍셀(Texel, 네델란드 섬)을 출범(出帆)하여 그 후 누차(屢次)의 폭풍우와 승후(乖候)를 겪고 6월 1일 빠다비아(batavia, 인도네시아수도 자카르타)에서 수일간 원기를 회복하고 다시 항해의 명령을 받아 바다에 나섰다. 일본으로 향하라는 명령을 받고 7월 일진광풍이 일어나며 계속되는 폭풍과 폭풍우를 만나 대만해협에서 고생하다가 배가 난파되어 6월 16일에 육지에 닿았다. 그 사이 28명을 잃어 생존자는 36인뿐이었다. 


이 표류기는 육지에 닿은 다음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그 육지는 다름 아닌 제주도였다. 사방이 조용한 낯선 땅, 어디선가 그들을 살펴보는 한 사람이 보였다. 그 사람을 향하여 손짓했으나 그 사람은 곧 사라져버리고 다시 세 사람이 나타났으나 의사소통이 안 되어 그들은 다시 도망갔다. 그들은 백여 명이나 되는 조선국 병사들이었다. 그 병사들은 하멜 일행이 타고 온 부서진 배를 수습하는 중에 탄환이 재어진 대포에 불을 붙여 폭발하여 혼비백산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지면서 일행을 육지로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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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학보> 창간호에실린 하멜표류기 지면(서상진 소장본)



그렇게 끌려온 하멜 일행은 위리안치하던 집에 감금되었다. 일행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곤 쌀밥과 밀가루와 소금뿐이었다. 10월 29일에 한성에서 한 사람이 도착하는데 그는 1627년 표류하다 정착한 화란인(네델란드)이었다. 그의 통역으로 한양으로 옮겨간 그 일행은 여전히 어려움을 겪었다. 호기심 많은 조선인 중 특히 양반의 하인들이 그들이 있는 곳을 자주 찾아와 조롱하기 일쑤였다. 조선인들에게 일행은 괴물 같은 존재였고 구경거리에 다름없었다. 그중에서도 일행은 자신들의 용모가 훨씬 낫다는 의견을 적어놓았다. 


구경하는 조선인들이 그들의 살빛이 희다며 칭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드는 조선인들 때문에 힘들었고 이를 알게 된 관리가 금지시켜 비로소 잠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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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학보> 8호 표지(서상진 소장본)



그해 8월에 만주 청나라 사신이 조공을 받으러 오는 일이 있었다. 그러자 나라에서는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시켜 감금시켰다. 혹시나 청의 사신이 알게 되면 그들과 무슨 내통을 하지 않았나, 아니면 북벌을 계획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살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9월 청의 사신이 떠날 때까지 그들은 꼼짝없이 남한산성에 머물러야 했다. 산성에 있는 동안 그들이 추위에 고통당하는 것을 알게 된 대장은 일행이 파선박에서 건져놓은 짐승 가죽을 팔아 쓰게 했다. 그들은 그것으로 초옥을 두 개 사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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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학보> 복간호 표지(서상진 소장본)



1655년 3월에 다시 청의 사신이 오자 일행은 다시 외출을 금지당했다.그러나 일행은 청의 사신이 돌아가기 전 나무하러 간다는 핑계로 그들 앞에 뛰어들었다. 겉에 입은 조선인 복색을 열어젖히고 그 안에 입은 화란식 의상을 보여주면서 자신들의 처지를 알리고자 했다. 다음 날 사신들이 사방으로 통역자를 알아내어 그를 만나기로 하자 조정은 사신에게 예물을 바치며 일행의 존재를 무마시켜 버렸다. 이때 청의 사신을 만났던 두 사람은 한양으로 불려가 옥에 갇혀 죽고 말았다. 


이후 남은 일행은 불려가 심문을 받지만 모두 모른다하여 단지 50대의 태형만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를 알게 된 왕이 면해주어 살아나게 되었다. 당시 태형의 도구는 사람 키 만한 길이에 손목 만한 두께였다.


6월에 제주도에 좌초된 배가 있어 나라에서는 일행 중 세 사람이 통역을 맡게 되었다. 처음 통역자가 너무 늙었기 때문이었다. 연말에 또 청의 사신이 오게 된 바 조정에서는 일행을 죽이고자 했다. 그때 그들은 집 앞을 지나가는 왕의 아우 인평대군을 붙잡고 읍소하였다. 그러나 이들을 측은히 여긴 왕제가 노력하였지만 결과는 전라도로 유배당하게 되었다. 일행의 대접은 관리마다 달라서 만나는 관리에 따라 그 처지가 달라졌다. 왕이 승하하고 만나는 수령에 따라 일행의 처지가 바뀔 때 일행은 수도승들을 찾아 돌아다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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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학보> 복간호 목차(서상진 소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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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학보> 복간호 판권(서상진 소장본)
 


“그들은 매우 인자하고 유쾌하여 우리가 전일의 체험담을 들려주거나 다른 나라의 풍습을 이야기해주면 대단히 즐겁게 여기었다. 우리의 이야기 듣기를 어떻게 좋아하던지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고 주야를 허비하였다” 라고 쓰고 있었다.(여기까지가 1권에 실린 요약내용이다. 참고로 이 기록을 작성한 하멜은 15년 치의 임금을 받았으나 다른 생존자들은 2년 치의 임금을 받았다고 한다. 하멜은 자신의 기록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고 있었을까? 한 역사의 문을 열어젖히는 소리를 예감이나 했을까?)


현재는 <하멜표류기>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17세기 조선에서 일어난 사건이 20세기가 되어서야 처음 접하게 된 지면이 역사학자 이병도의 번역으로 <진단학보(3회 연재)>에 실린 것이 최초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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