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호 역사 대통령 선거의 역사Ⅰ

2022.03.30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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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의 역사Ⅰ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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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청에서 찍은 것으로 정부 수립식을 보기 위해 모인 군중들. 군중들은 이승만 대통령과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 장군, 

주한미군사령부 하지 사령관의 연설을 들었다. 중앙청에서 벌어지는 기념식과 행진을 보기 위한 군중들의 행렬은 뒤쪽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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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들이 지난 2월 11일 전북 전주시 전주한옥마을 경기전 옆 공터에서 

제20대 대통령선거 투표 독려를 위한 포토존을 설치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출처: 뉴시스)



제20대 대통령 선거

2022년 3월 9일 제20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에 국가 최고지도자를 선거로 선출한다. 이것은 혈통에 의해왕위가 계승되는 조선시대나 대한제국 시대에는 꿈꿀 수 없는 일이었다.


대통령 선거일이 3월 9일 수요일로 정해진 것은 공직선거법 규정에 따른 것이다. 공직선거법 제34조 1항에는 “전임 대통령 임기가 만료되는 날 전 70일부터 첫 번째로 돌아오는 수요일에 선거를 한다”고 되어 있다. 2017년 5월 10일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는 2022년 5월 9일까지이며 임기 70일 전은3월 1일 화요일이다. 그 다음 수요일은 3월 2일이나 공직선거법 제34조 2항“선거일이 국민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민속절 또는 공휴일인 때와 선거일 전날이나 그 다음 날이 공휴일인 때에는 그 다음 주의 수요일로 한다”는 규정에 따라 3월 2일 수요일이 3·1절 공휴일 다음 날이기 때문에 그다음 수요일인 3월 9일이 제20대 대통령 선거일로 되었다.


대통령 선거를 할 수 있는 선거권은 만 18세 이상이며 대통령 후보로 나설 수있는 피선거권은 선거일 현재 5년 이상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만 40세 이상의국민에게 부여된다. 단 법률상 금치산자 등 제한을 받는 경우에는 선거권이나피선거권이 제한된다.


후보자의 기호는 후보자 등록 마감일 현재 국회에 의석을 보유한 순서대로,의석이 없는 정당은 명칭의 가나다 순으로, 무소속은 무소속 후보끼리의 무작위 추첨으로 정하여 숫자로 기호를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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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헌법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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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국회에서 선출한 초대 대통령

대한민국 최초의 대통령 선거는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이루어졌다.사흘 전인 7월 17일 제헌헌법이 공포되었다. 당초 다수의 제헌국회 의원들은 내각제를 선호하여 헌법 초안은 내각책임제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서40년간 독립운동을 해왔던 이승만 제헌국회 의장이 미국식 대통령제를 주장하여 결국 대통령제 헌법이 채택되었다. 그렇지만 미국과 같은 순수한 대통령제가 아니었다. 행정부 수반이자 국가원수를 대통령으로 하여 대통령제를 채택하였지만 국회에서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하게 함으로써 의원내각제의 총리 선출과 같은 형식을 취했다. 대통령의 임기는 4년에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었다.


국회에서 뽑는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이승만과 한국독립당 김구가 대결했다. 투표 결과 이승만이 91.8%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6.6%의 지지를 받은 김구를 따돌리고 당선되었다. 부통령은 이시영이 67.5%를 얻어 김구(31.5%)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대통령 직선제 헌법 개정과 제2대 대통령 선거

임기 2년의 제헌국회가 헌법 제정과 대한민국 정부를 비롯한 입법부, 사법부의 통치기구 출범의 임무를 완수하고 임기가 끝나면서 1950년 5월 30일 총선거를 통해 임기 4년의 정식 국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한 달도 못남은 6·25전쟁이라는 어머어마한 국난을 앞둔 시점이었다. 선거 결과 전체 210석의 의석가운데, 이승만 지지자들의 당선이 크게 줄어들고 무소속이 전체 의석의 60%인 126석을 차지하여 이승만 정부를 위협하게 되었다. 대통령 이승만으로서는 국회에서 뽑는 간접선거로 재선될 가능성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곧 한 달도 못되어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 발발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점령되었다. 부산으로 피난한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11월 30일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1952년 1월 18일 국회표결에서 부결되었다. 정부와 국회가 대립했다. 전쟁 수행에 강력한 권한이필요했던 이승만 정부는 ‘국회해산’으로 국회의원들을 위협하고 5월 25일에국회해산을 강행하기 위해 부산과 경상남도, 전라남도, 전라북도의 23개 시·군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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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 총선거가 실시되는 투표소 입구. 유권자의 신분을 확인하고 있다.(1948년 5월 10일)



5월 26일 대통령 직선제를 강행하는 한편 내각제를 주장하는 야당 의원 50여명을 헌병대를 동원하여 연행하고 정헌주(鄭憲柱), 이석기, 서범석, 임흥순, 곽상훈, 권중돈 등 12명을 국제 공산당 관련 혐의로 구속하는 정치파동을 일으켰다. 그전 1951년 5월 16일 이시영 부통령의 사퇴로 궐위가 되어 피난지 부산에서 부통령 보궐선거를 국회에서 실시하여 선출된 민주국민당 출신 부통령 김성수는 5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을 규탄하고 사표를 제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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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개회사를 하는 이승만 박사



정국이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자 국회의원 장택상과 신라회(新羅會)가 주축이 되어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안과 내각책임제를 골자로 하는 국회안을 발췌하고 혼합하여 <발췌개헌안(拔萃改憲案)>을 마련했다. 7월 4일군경(軍警)들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국회의원들은 기립하는 방식으로 투표하여 출석 의원 166명 중 찬성 163표, 반대 0표, 기권 3표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대통령을 국민의 직접 투표로써 선출하게 되었다.


1952년 8월 5일 대통령 직선제 헌법에 따라 제2대 대통령 선거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이승만 후보가 74.6%를 얻어 무소속의 조봉암(11.4%), 이시영(10.9%) 후보를 따돌리고 재선에 성공했다. 부통령은 다시 민주국민당 김성수(51.3%)가 무소속 이갑성(48.0%)에 승리하였다.


초대 대통령 중임제한 철폐 개헌과 제3대 대통령 선거

헌법대로라면 이승만 대통령은 2번 대통령을 하고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1954년 5월 20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 자유당이 원내 다수를 차지하자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가능하도록 헌법 개정 작업에 나섰다. 1954년 9월 6일“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앤다”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한 헌법개정안을 자유당 소속 의원 136명 중 서명을 거부한 김두한 의원을 제외한 135명과 무소속 윤재욱 의원 등 총 136명의 서명을 받아 발의했다. 헌법개정안이 통과되려면 재적 의원의 2/3 찬성이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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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31일 국회 개회식


그해 11월 27일 헌법개정안에 대한 국회 표결이 있었다. 재적 의원 203명 중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가 나왔다. 재적 의원 203명의 2/3은 135명이었다. 가결정족수는 이 숫자보다 많은 136명인데 한 명이 모자랐다. 이에따라 국회부의장 최순주(자유당 소속)는 부결을 선포했다. 이틀 후 자유당은사사오입의 원리를 내세워 이를 번복하여 가결을 선포했다. 그리하여 이 개헌을 <사사오입 개헌>이라 하게 되었다.


이 <사사오입 개헌>에 따라 1956년 5월 15일 제3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3선에 도전한 이승만 대통령은 이 선거에서 70.0%를 득표하여 무소속의 조봉암(30.0%)을 따돌리고 당선되어 장기집권의 밑자락을 깔았다.


부통령 선거에서는 무소속 함태영(41.3%)이 자유당 이범석(25.5%), 민주국민당 조병옥(8.1%), 자유당 이갑성(7.0%), 조선민주당 이윤영(6.4%)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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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대통령 선거 포스터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중임 제한 철폐로 4선에 도전하는 자유당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민주당의 조병옥 후보가 대항마로 나섰다. 그러나 조병옥 후보는 선거유세 중 신병으로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선거를 불과 한 달 앞두고 입원 2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적수가 없어진 이승만 대통령은 당선에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부통령 선출에 있었다.


당시 자유당은 국민의 지지를 잃고 있었다. 미국의 무상원조에 의존하던 경제는 휴전 후 미국의 무상원조가 줄자 국민의 삶이 매우 어려워졌다.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게다가 두 차례나 무리한 개헌을 하여 자유당은 민주주의와 헌법을 파괴하는 당으로 낙인찍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당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전국의 공무원과 경찰 등 공권력은 물론 정치 깡패, 완장 부대까지 동원해 야당의 선거 운동을 방해하고, 야당 참관인들을 투표장에서 끌어내어 선거 감시를 못하게 하였다. 또한 투표 당일에는 투표자들을 3인 1조로 투표하게 하고, 투표지를 투표함에 넣기 전에 자유당 측 참관인에게 보여주도록 하는 공개투표를 하게 했다. 선거 전날인 3월 14일 자유당은 모든 선거함에 이승만과 이기붕이 찍혀 있는 위조 투표지를 무더기로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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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3·15 선거 무효를 외치는 시위군중. 아래) 3·15 의거에 참여한 마산 시민들



상황이 심각해지자 민주당은 오후 4시 30분에 “3·15 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국민주권에 대한 포악한 강도 행위”로 규정하고 불법, 무효임을 선언했다. 그날 오후 늦게 마산을 비롯한 각지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개표를 하는데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득표율이 100%에 육박하는 결과가 나오자 자유당은 당황하여 이기붕의 표는 79%로 하향 조정하였다. 국회는 3월18일 이승만과 이기붕을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 당선자로 발표하였으나 부정선거에 대한 야당과 국민들의 반발이 더욱 거세졌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경찰은 강경 진압하였다. 4월 11일에는 마산에서 3·15 부정선거 항의 시위에 참여했던 마산상고 입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얼굴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부정선거와 이승만 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증폭되어 4월 19일 서울에서는 학생 시민 시위대가 경무대(오늘날 청와대) 앞까지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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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때 중앙청 앞의 시위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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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때 경찰의 진압 장면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대에 발포하는 등 강력하게 대처했다. 그러나 시위는 그치지 않았다. 결국 4월 24일에는 이승만이 자유당 총재직을 사임하고, 이기붕은 부통령 당선을 사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가 그치지 않았다. 4월 25일에는 대학교수까지 시위에 나섰다.


4월 26일 이승만은 대통령에서 물러날 뜻을 밝히고 다음 날인 27일에는 대통령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하였다. 국회는 개헌과 총선거를 통하여 시국을 수습하기로 결의하고, 5월 2일 허정을 수반으로 한 과도정부를 수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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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때 경무대 앞에서 대치하고 있는 시위대와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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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대에서 물러나오는 이승만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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