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호 역사 대통령 선거의 역사 Ⅱ 내각책임제 개헌과 단명한 제2공화국

2022.04.29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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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의 역사 Ⅱ

내각책임제 개헌과 단명한 제2공화국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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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공화국 윤보선 대통령(좌) 장면 국무총리(우) 취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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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이승만 이기붕의 제4대 정부대통령 선거 포스터. 오른쪽) 6.25전란 중 미군과 함께 대한민국 해상 이동봉송선을 타고 있는 장면(중앙).



민주당

1960년 4·19혁명으로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고 집권 자유당은 해체되었다. 대통령이 물러나면 부통령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해야 했지만 부통령 장면은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기 위해 나흘 전인 4월 23일 이미 사퇴해 버렸다. 그다음 순위는 외무부 장관이었기 때문에 외무부 장관 허정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어 과도내각을 구성했다. 


정국의 주도권은 야당이었던 민주당에게로 넘어갔다. 민주당은 해방 직후 김성수, 송진우, 조병옥 등 우익 인사들 중심으로 창당된 한국민주당(약칭 한민당)의 후신이었다. 지금은 ‘민주’라는 당명이 진보정당의 대명사처럼 되었지만 한국민주당은 한국 보수세력의 ‘원조’요 뿌리였다. 한민당은 중경 임시정부를 받들고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공산당에 대한 반대투쟁에 앞장섰었다. 한민당은 그 후 지청천, 신익희 등 대한국민당(1948년)과 합쳐 1949년 2월 10일 민주국민당(약칭 민국당)이 되어 이승만의 자유당에 대항하는 원내 야당으로 활동했다. 


1956년 자유당이 초대 대통령의 3선을 위해 중임제한 철폐를 골자로 하는 사사오입 개헌을 추진하자 민국당과 무소속의원 60명이 1954년 11월 30일 호헌동지회를 구성하여 자유당 반대 세력을 규합했다. 우여곡절 끝에 민국당이 중심이 되어 원내의 장면(張勉)·정일형(鄭一亨) 등 흥사단계, 현석호(玄錫虎)·이태용(李泰鎔) 등 자유당 탈당파, 그리고 무소속 일부를 흡수하여 1955년 9월 18일 민주당을 창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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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장면


 


내각책임제 개헌

4·19로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민주당은 1인 독재의 제왕적 대통령중심제의 폐해를 극복하고 4·19 민주혁명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의원내각제 개헌을 추진했다. 대통령은 의례적(儀禮的)인 국가원수가 되고 실권은 국무총리가 가지며 국회는 민의원(民議院)과 참의원(參議院)의 양원제로 하고 하원격인 민의원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였다. 행정권을 가진 국무원 즉 내각은 민의원 해산권을, 민의원은 국무원 불신임권을 두어 상호견제의 책임정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또한 지방자치제를 시행하여 시·읍·면장(長)을 주민의 직접선거로 선출하게 하였다. 이와 더불어 경찰의 중립화를 제도화하고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강화하여 최대한으로 자유를 신장할 수 있게 하였다. 


내각책임제 헌법 개정안은 6월 15일 국회 표결에 부쳐 찬성 208표, 반대 3표로 가결되었다. 새 내각책임제 헌법에 따라 1960년 7월 29일 총선거를 실시했다. 민주당은 민의원에서 전체 233석 가운데 175석(75.1%)을 얻었으며 상원격인 참의원은 58석 중 31석(53.5%)를 얻었다. 지방 선거에서는 도지사는 10곳 중 6곳, 시장은 26곳 중 12곳을 민주당이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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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상임이사회에 참석하고 있는 장면. 그는 초대 미국 대사로서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UN의 지원을 이끌어 내는 데 공헌했다.




제2공화국 대통령, 국무총리 선거 

새로 구성된 민의원과 참의원의 양원 합동회의에서 내각책임제하의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뽑아야 했다. 집권 민주당에는 기존 민주국민당 계열의 구파와 흥사단계 등 민주당에 연합한 신파의 두 파벌이 있었다. 구파는 대통령에 윤보선, 총리에 김도연을 밀었다. 신파는 내세울 만한 대통령 후보감이 없어 대통령은 구파에 양보하고 총리는 장면을 밀었다. 중도파 의원들은 신파 측 안을 환영했으나 구파는 신파 장면을 완강히 거부했다. 결국 신·구 양파는 단일 대통령 및 총리 후보를 내는 데 실패하고 자유투표에 들어갔다. 


1960년 8월 12일 민의원 의원 220명과 참의원 의원 43명의 양원 합동회의에서 윤보선은 1차 투표에서 208표로 무난히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8월 17일 국무총리 표결에서 윤보선 대통령이 지명한 김도연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이 신파와 무소속 의원들의 반대로 과반에 미달한 48.9% 득표에 그쳐 인준되지 못하였다. 제2공화국 헌법은 총리 인준 부결 후 5일 이내 대통령이 새 총리 후보를 지명하지 않으면 국회의원들의 투표로 총리를 선거하도록 규정했다. 구파에서는 이 조항대로 5일을 기다렸다가 국회에서 신파와 표 대결을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윤보선 대통령은 정국의 불안정을 방치할 수 없다며 8월 18일 신파의 장면을 총리로 지명하였다. 장면 국무총리에 대한 인준 동의안은 신파와 무소속 일부 및 구파 내 온건파의 지지를 받아 51.3% 득표로 통과되어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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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공화국 대통령 윤보선(좌)과 국무총리 장면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에 대항할 때 하나로 뭉쳐있던 민주당이 집권을 하자 권력을 놓고 구파와 신파로 분열하여 심각하게 대립했다. 구파는 장면 국무총리의 내각 구성에 협조를 거부했다. 결국 장면 총리는 8월 23일 신파 위주로 내각을 구성했다. 구파측은 이에 반발하여 별도의 교섭단체인 민주당 구파동지회를 만들었다. 구파와 신파는 전혀 별개의 정당처럼 사사건건 대립했다. 정치는 표류했다. 9개월 동안에 네 차례나 개각이 이루어졌다.


구파는 아예 신당 발족을 선언했는데, 또다시 협상파와 분당파로 분열했다. 분당파는 10월 18일 신민당을 창당하고 협상파는 민주당과 손을 잡았다. 


신파는 95명의 의원을 포섭하여 민주당으로 원내교섭단체를 등록하였다. 그러나 요직 분배를 놓고 민주당은 또다시 소장파와 노장파, 합작파가 대립하였다. 소장파는 1961년 1월 26일 ‘신풍회(新風會)’를 만들어 노장파와 행정부에 큰 타격을 주었다. 장면은 1월 30일 3차 내각을 구성하여 각 파벌을 요직에 안배하였으나 당내 파쟁은 종식되지 않았다. 


합작파는 별도로 ‘정안회(政安會)’를 만들어 독자 행동을 하였고 신풍회는 당직개편을 요구하는 등 혼란은 끝이 없었다. 5월 3일 제4차 내각이 발족되었으나 노장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신풍회는 분당할 태세를 보였다. 노장파 내에서도 비주류는 별도로 중도파라는 당내 파벌을 만들어 신풍회와 제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7·29총선으로 압도적인 다수의석을 차지하고도 민주당은 내부 분란으로 진통에 진통을 거듭하며 정국도, 내각 안정도 이루지 못한 채 표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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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내각의 국무회의 모습



4·19혁명으로 10여 년 동안 억눌려 왔던 요구들을 쏟아내는 데모가 매일같이 끊이지 않았다. 장면 정부 10개월 동안 가두데모는 총 2000여 건, 매일 7~8건의 데모가 발생했다. 국민학생들은 교사의 전근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였고 경찰은 국회의원이 뺨을 때렸다고 시위를 하였으며 육군훈련소의 훈련병들은 장교가 하대를 한다며 시위를 하였다. 심지어 시위를 그만하라는 시위까지 발생하였다. 


제1공화국 붕괴 후 수많은 언론 매체들이 창간되었다. 일간지는 41개에서 60년 12월 말까지 390개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렇게 탄생한 언론들은 억눌렸던 다양한 요구들을 담아내며 정부나 권력기관을 비난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민주화 분위기를 타고 혁신세력들이 정당 또는 사회단체로 다시 등장했다. 자유당 시대에 금기시되었던 통일문제 논의와 통일운동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남북학생회담이 제안되고 통일운동을 대중운동으로 확산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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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공화국 시기의 만연한 각종 시위




제2공화국의 장면 정부가 10개월 동안 세 차례나 개각을 거듭한 것은 계파간 밥그릇 다툼 때문이었다. 각료들의 평균 임기는 2개월이었다. 국무위원들은 업무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기 일쑤였다. 정책이 연속성을 가지고 굴러갈 수가 없었다. 


헌법은 대통령이 정당에 속할 수 없다고 했지만 윤보선 대통령은 민주당 내에 남아있는 구파나 신민당의 이해를 대변하였다. 이 때문에 대통령과 총리가 사사건건 대립했다. 이렇듯 각료 자리를 둘러싸고 제2공화국은 국정운영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국민들의 불안과 불만이 쌓여갔다. 


장면은 6·25전쟁 과정에서 급속히 팽창한 군과 경찰을 감축하려 했다. 장면은 선거 공약으로 군 병력 10만 명 감축안을 내놓고, 집권하자 이를 실행에 옮기려 했으나 미국의 강력한 반대로 3만여 명을 감축하는 데 그쳤다. 또 잦은 군 지도부 개편으로 1년도 안 되는 재임기간동안 국방부장관이 세 번, 육군참모총장이 네 번이나 바뀌는 등 파행을 거듭했다. 


민주당 정권 9개월 동안 경찰업무를 관장하는 내무장관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 그중 네 명은 각각 한 달간씩 재직했다. 경찰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민주당 집권기간 중 범죄가 두 배로 늘었고 범인 검거율은 이승만 정부 시절의 90%에서 65%로 낮아졌다. 경찰력이 허약해진 틈을 타고 깡패와 조직폭력배가 활개를 쳤으나 장면 정부는 공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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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미국대사 월터 피 매카나기(Walter_P._McConaughy)


 

장면이 집권한 지 몇 달 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3.7%만이 장면을 지지할 정도로 민심이 떠났다. 매카나기 주한 미국대사는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정치적 리더십 측면에서 볼 때 장면은 적임자가 아니며 한국 정부는 개인보다는 젊고 유망한 지도자 집단이나 조직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1961년 3월 초에는 주한 미군원조사절단(USOM) 부단장 휴 팔리의 ‘1961년 2월 한국 상황’이란 제목의 <팔리 보고서>가 백악관에 전달되었다. 


<팔리 보고서>는 “장면 정부가 4월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며 이 사태를 방치할 경우 한국에서는 공산혁명이나 그와 비슷한 사태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팔리 부단장은 “한국과 한국 국민은 병들었다. 정부·언론·교육·종교·기업의 구조가 모두 부정부패와 사기로 연결돼 있으며 한국인은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식의 망상 속에 살고 있다”고 비판하고 “무기력한 장면 정부가 위기를 극복할 수 없어 조만간 민중의 불만이 폭발하거나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며 “미국이 특사와 보좌관 2명을 한국에 보내 한국의 ‘주권’과 체면을 살려 주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경제권과 인사권 등을 장악해 장면 총리 뒤에서 한국의 개혁을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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