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호 역사 대통령 선거의 역사 Ⅲ 5·16 군사정변과 제3공화국 대통령 선거

2022.05.12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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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의 역사 Ⅲ

5·16 군사정변과 제3공화국 대통령 선거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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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대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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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군관학교 시절의 박정희(가운데)



“각하, 군사정변이 났습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반쯤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의 긴급 전화가 반도호텔 숙소의 국무총리 장면을 깨웠다.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군부 일부 세력이 정부청사인 중앙청과 남산 KBS 방송국을 비롯한 주요 시설을 점거하고 ‘군사혁명’을 선언했다. 


“피신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장면 총리는 다시 걸려온 장도영 참모총장 전화를 받은 후 종적을 감추고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 밝혀진 바는 부인과 딸을 데리고 혜화동 칼멜 수녀원으로 피신했다.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던 매그루더(Carter Bowie Magruder, 1900~1988) 유엔군 사령관은 그린 주한 미국 대리대사와 함께 오전 11시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가 “승인만 해주시면 쿠데타군을 진압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군인들간의 무력 충돌로 유혈사태가 벌어지는 것은 안 된다”고 반대했다. 매그루더 사령관은 윤보선의 입장에 충격을 받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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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 비 매그루더(Carter B.Magruder) 주한 유엔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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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 16일 계엄사무소가 설치된 서울시청 앞에 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겸 계엄사령관 중장 

장도영(왼쪽)과 부의장 소장 박정희. (출처: 중앙포토)




박정희 소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포고 제4호로써 민의원, 참의원 및 지방의원 등 대의원 헌법기관을 해산시켰다. 혁명은 반격을 받지 않고 안착해 갔다. 


수녀원에 피신한 장면 총리는 사태를 되돌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3일째인 5월 18일 오전 11시 칼멜 수녀원에서 나와 곧바로 낮 12시 중앙청에서 제69차 임시국무회의를 열고 “군부 쿠데타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내각은 총사퇴한다”고 발표했다. 


박정희 소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꾸고, 입법·행정·사법의 3권을 장악한 국가통치기구로 만들었다. 강원룡 목사는 후에 이렇게 회고했다. 


“상당수 지식인들이 지지했어요. 민주당 정부는 도무지 나라를 끌어갈 수 없는 정부였어요. 한마디로 완전히 카오스였습니다. 수습할 수 없는 상태였어요. 오죽하면 ‘독재는 나쁘지만 무질서보다는 낫다’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정당 및 사회단체는 해산되고 정치활동은 완전히 금지되었다. 8개월 후인 1962년 3월 22일 대통령 윤보선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대통령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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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1주년 기념우표와 혁명공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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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대통령 선거 벽보를 보고 있는 시민들(1963년)



1962년 11월 5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개헌안을 발의했다. 반공주의와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한 새 헌법은 임기 4년의 대통령을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뽑고 1회에 한해 중임할 수 있게 했다. 그해 12월 5일 계엄을 해제하고 12월 17일 새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는 78.8%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확정된 헌법은 1962년 12월 26일에 공포되고 약 1년 뒤인 1963년 12월 17일부터 시행되었는데 부칙에 헌법 시행 전에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를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제5대 대통령 선거

군사 쿠데타 세력은 민정 참여를 위해 1963년 2월 26일 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야권은 신민당의 후신으로 윤보선 전 대통령이 이끄는 민정당과 민주당(박순천), 신정당(허정), 민우당(이범석), 자유당(장택상)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대선 승리를 위해서는 야권 단일화가 필수적이었다. 이에 야권의 대부분은 윤보선을, 신정당계와 민우당, 소수의 민정당계는 허정을 내세웠다. 


1963년 10월 15일의 대통령 선거 결과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470만 2640표(46.6%)로 민정당 윤보선 후보 454만 6614표(45%)에 약 15만표의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표심은 추풍령을 기준으로 북쪽은 윤보선, 남쪽 영남과 호남은 박정희를 지지하는 ‘남북 현상’을 보여주었다. 


박정희 정부는 처음에는 ‘자립경제’를 목표로 수입품을 대체하는 공업화 정책을 취하고자 했다. 그러나 남북분단으로 섬이 된 상태, 자원도 기술도 자본도 없는 한국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대외 개방적인 수출주도적 공업화 노선으로 전환했다. 당시 미국 등 선진국들은 산업구조가 고도화함에 따라 노동집약적 공업제품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하고 있었고 이웃 일본이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면서 노동집약적 경공업을 해외로 이전하고자 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수출진흥확대회의’를 만들어 정부와 민간 사이의 유기적이고 효율적인 협력체제를 운영하여 속도감 있게 공업화를 추진했다. 이 덕분에 일자리가 늘어났고 경제발전을 체감하게 되었다.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정책은 농촌과 가난한 계층에서 큰 지지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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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방문하여 백악관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회담하는 박정희 대통령(1961년 11월 14일)




경제개발을 위해 박정희 정부는 두 가지 어려운 도전을 하고자 했다. 하나는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였다. 이것은 동북아시아의 소련·중국 등 대공산권 전략 차원에서 한-미-일의 결속을 위한 미국의 강력한 요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미국의 승인을 얻을 필요성, 경제개발에 필요한 재원과 기술 도입 및 시장의 확보를 위해 추진된 것이었다. 


국내에서는 “한일 굴욕외교 반대”를 외치는 야당과 학생들의 반대가 격렬하게 일어났으나 결국 일본이 한국에 무상 3억 달러, 정부차관 2억 달러, 상업차관 1억 달러를 제공한다는 조건으로 1965년 6월 <국교정상화조약>에 조인하고 동년 12월 발효되었다.


다른 하나는 베트남전쟁 참전이었다. 베트남 참전은 1961년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가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먼저 제안한 것이다. 케네디 정부는 베트남전쟁에 미군을 직접 투입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박정희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케네디 암살 후 대통령이 된 린든 B. 존슨은 1964년 대한민국에 의료 부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한국은 130명 규모의 이동 외과 병원과 10명의 태권도교관단을 파병했다. 그 후 월남전이 확대되면서 미국이 후방 지원부대의 파병을 요청했다. 한국은 비둘기부대를 창설하여 1965년 3월 10일 인천항에서 출발하였다.


1965년 베트남 주둔 미군의 사상자가 속출하자 미국은 전투부대 파병을 요청했다. 대신 한국군 현대화를 지원하고 북한의 침공시 미국이 즉각 출병하도록 <한미방위조약>을 개정했다. 또한 월남에서 사용하는 군수품, 수송, 건설 등의 월남 시장진출의 길을 열었다. 그리하여 채명신 소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주월한국군사령부가 창설되고 청룡부대가 1965년 10월 9일 깜라인에 상륙하였으며 11월 1일에는 맹호부대가 꾸이년에 상륙하였다.


베트남전쟁기간 동안 한국군 파병 누계는 32만 명, 최고조에 달했던 1968년 베트남 주둔 한국군 수는 5만여 명에 달했다. 전사자는 5000여 명이었고 1만 10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미국은 한국군 병사에게 2억 3600만 달러를 지불하였고 한국은 파병의 대가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대한민국의 GNP는 파병을 전후로 하여 5배가량 성장하였다.


제6대 대통령 선거

1967년 5월 3일 제6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이 선거는 지난 4년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한 박정희에 대한 평가와 그에 대하여 대통령 권한 축소 개헌을 공약하는 등 박정희 정권의 독재성을 지적하며 강력히 도전해 온 신민당 윤보선과의 재대결이었다. 


제6대 대통령 선거 결과는 윤보선 후보가 40.9% 득표한 데 대하여 박정희 후보가 51.4% 득표하여 10% 이상 차이로 승리했다. 여야 두 정당 후보 득표율이 전체 유효표의 92.4%를 차지하여 양당제 확립으로 나타났다. 제5대 대통령 선거가 추풍령을 기준으로 북쪽은 윤보선, 남쪽은 박정희를 지지하는 ‘남북 현상’을 보여줬다면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태백산맥을 기준으로 서쪽은 윤보선, 동쪽은 박정희를 지지하는 표의 ‘동서 현상’이 나타났다. 부산 등 영남에서만 박정희 후보는 136만 7796표차로 윤보선을 누르며 재선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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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광경(1967년)



3선 개헌 

제6대 대통령 선거 후 공화당 내에서는 ‘조국 근대화 과업의 완수’를 위해 박정희의 3선 개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현행 헌법으로는 2번 집권 후에는 물러나야 했다. 집권 공화당 내 김종필과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이에 반대했다. 박정희는 1968년 5월 ‘국민복지회 사건’과 1969년 4월 ‘4·8항명파동’을 정리하면서 공화당 내 박정희 집권 연장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개헌 여론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1969년 7월 25일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괌에서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을 발표했다. “아시아에 주둔하는 미군을 철수하겠다. 그러니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은 외부의 공격이나 위협에 대해 스스로 방어하라. 대신 국방력 강화에 도움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한국 안보의 한국화(Koreanization of Korea Security)’는 당장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비상 상황이 되었다. 이것이 집권 세력에게 3선 개헌을 통해 국방과 경제를 위한 강력한 구심력 확보라는 명분을 삼게 했다. 


야당인 신민당은 극렬하게 반대했다. 유진오 총재는 ‘대통령삼선개헌저지투쟁’을 선언하고 정계 및 종교계, 학계, 학생층 및 지식인들을 규합하여 개헌반대 집회를 열기 시작했다. 개헌반대 데모가 확산되자 전국의 대학들이 휴교 또는 조기방학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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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선개헌 반대 데모(1969년)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7월 25일 대통령 특별담화를 통해 개헌안 국민투표에 신임을 걸었다. 통과되면 신임, 부결되면 불신임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이었다. 


1969년 9월 8일 <헌법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다. 여·야총무회담에서 여야는 제안설명과 질의 및 토론을 거쳐 9월 13일 표결하기로 합의했다. 9월 13일 제72회 정기국회 제5차 본회의가 열려 개헌안에 대한 표결 선포가 있자 야당 의원들이 개헌 저지를 위해 본회의장 단상을 점거하였다. 14일 새벽 2시 33분 민주공화당·정우회 의원들은 국회 제3별관 회의실에 모여 제6차 본회의를 열고 참석한 122명 전원 찬성으로 <헌법개정안>을 가결시켰다. 이렇게 통과된 개헌안은 10월 17일 국민투표에서 총 유권자 77.1%의 참여와 65.1%의 찬성을 얻어 확정되었다. 정국은 회오리쳤고 박정희는 1971년 세 번째 임기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되었다. 상대 후보는 김대중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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