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호 역사 대통령 선거의 역사 Ⅶ 국민의 직접 선거로 뽑은 제13대 노태우 대통령

2022.10.16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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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의 역사 Ⅶ 

국민의 직접 선거로 뽑은 제13대 노태우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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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노태우 전 대통령이 환호에 답례하는 모습(오른쪽은 영부인 김옥숙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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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5월 3일 인천 민주화 시위 (출처: 경향신문)




4·13호헌 조치, 6·29 민주화 선언과 제9차 헌법개정 

전두환 대통령은 여러 차례 “7년 임기 종료와 함께 정권을 이양하고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혀 왔다. 전두환 집권 시기 국민들의 높은 민주화 열망은 ‘대통령 직선제’로 요약되었다. 1986년 들어 인천지역 노동자들의 격렬한 5·3 인천 가두시위, 10월 28일에는 전국 26개 대학 2000여 명의 대학생들이 건국대학교 5개 건물을 점거하고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 투쟁연합(애학투련)’ 결성식을 하며 경찰과 4일 동안 대치했다. 10월 31일 경찰은 농성 중이었던 학생 1520여 명을 연행하여 그중 1290명을 구속했다. 


학생 노동자 시위로 반정부 움직임이 가속화되자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은 ‘5공 헌법에 의한 대권이양’을 골자로 하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즉 5228명의 대통령 선거인단의 간접선거에 의해 후임 대통령을 선출하여 정권을 인계하겠다는 것이었다. 야권과 재야는 ‘4·13 호헌조치’에 강력히 반발했다. 학계·종교계 등에서 반대 시국선언·농성이 잇달았다. 


그 4개월 전인 1987년 1월 14일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수사실에서 수사를 받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서울대학생 박종철 사망사건이 있었다. 전두환 정부는 2명의 수사관만 구속하는 선에서 수사를 마무리하여 반정부 여론을 가까스로 잠재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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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0월 28일 건국대 점거농성사건 시위 광경



1987년 5월 18일 저녁이었다. 서울 명동성당에서 있은 광주민주항쟁 7주년 기념 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범이 더 있다”며 당국의 사건 축소·은폐 사실을 폭로했다. 국민들은 경악하고 분노했다. 5월 27일 각계를 망라한 ‘민주화추진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고 ‘군사통치 종식’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6·10 민주화 장정대회’ 개최를 발표했다. 1987년 6월 10일 그날 집권 민주정의당은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그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들은 교내에서 다음날의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를 하고 교문 앞으로 진출하여 전투경찰과 대치하며 시위하던 중 연세대 학생 이한열군이 뒷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로이터 통신의 정태원 사진기자가 촬영한 피 흘리는 이한열군을 친구가 부축하고 있는 사진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분노한 시민들과 학생들이 들고일어났다. 당국이 전투경찰을 동원한 원천봉쇄 방침을 밝혔음에도 서울·부산·광주·인천 등 전국 18개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넥타이 부대’라고 한 시민들의 참여도 두드러졌다. 결국 전두환 대통령은 6월 29일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 겸 총재인 노태우를 내세워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시국수습 방안을 발표하여 대통령 간접선거에 의한 7년 단임의 제5공화국 체제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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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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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9일 연세대 앞 시위 때 최루탄에 맞은 

이한열을 이종창이 부축하고 있는 모습



6·29선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겼다.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통한 1988년 2월 평화적 정권 이양 ▲대통령선거법 개정을 통한 공정한 경쟁 보장 ▲김대중의 사면복권과 시국관련 사범들의 석방 ▲그 밖에 인간 존엄성 존중 및 기본인권 신장과 언론 창달, 정당의 건전한 활동 보장이 담겼고 지방자치 및 교육자치 실시와 과감한 사회정화조치의 단행 등의 내용이 포함되었다. 


6·29 민주화 선언은 ‘군부통치 종식’과 ‘대통령 직선제’를 외치는 아스팔트 위 대학생, 시민들의 요구에 집권세력이 결국 굴복한 것이었다. 다시 헌법 개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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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직선개헌을 포함한 ‘시국수습대책 8개항’을 담은 6·29 선언을 하고 있는 

당시 민정당 노태우 대표위원 (출처: 서울신문)




헌법 개정의 초점은 대통령 선출과 임기에 관한 부분으로서 여당은 6년 단임을, 야당은 4년 연임을 주장했다. 결국 대통령 임기를 5년 단임으로 하는 절충안이 채택되었다. 대통령의 비상조치권과 국회해산권은 폐지되었으며 국무위원에 대한 해임의결권을 해임건의권으로 대체되었다. 국회의 권한을 강화하여 국정감사권 부활, 연간 회기일수 제한 삭제, 정기회를 90일에서 100일로 연장 등으로 개헌안이 이루어졌다. 


헌법 개정안은 1987년 9월 18일 발의하여 공고(9월 21일)와 국회 의결(10월 12일)을 거쳐 10월 29일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제9차 개정헌법은 1987년 10월 29일 총 유권자의 78.2%인 2003만 8672명이 국민투표에 참여하고 이 중 93.1%가 찬성하여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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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배후조종 혐의로 ‘내란음모’ 주동자로 몰려 사형이 확정됐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목숨을 건지는 데 교황이 크게 기여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문서가 공개됐다. 당시 교황인 

고(故) 요한 바오로 2세는 사형을 선고받은 김 전 대통령의 감형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1980년 12월 11일자로 한국에 보냈고(왼쪽), 전두환 전 대통령이 

다음해인 1981년 1월 5일자로 답장을 보냈다. (출처: 광주일보)




김대중의 대통령 불출마 선언 

1987년 12월 16일 새롭게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민의 직접선거로 대통령을 뽑게 되었다. 1971년 유신헌법 시행 전 직선제 대통령 선거를 한 이후 16년 만이었다. 김대중은 1980년 ‘내란음모’죄로 사형판결을 받은 후 미국, 교황청 등의 구제 노력으로 사형을 면하고 ‘신병치료’를 이유로 미국으로 가서 1985년 2월 8일에야 귀국했던 까닭에 국내 활동에 공백이 있었다. 그가 귀국한 이듬해인 1986년 5·3 인천 노동자 시위, 10·28 건국대 점거 농성 사태 등이 일어나면서 1980년 서울의 봄 때 학생시위를 빌미로 5·17 계엄 전국 확대조치가 취해졌던 악몽이 되살아났다. 


집권세력의 친위 쿠데타 소문이 돌았다. 재구속의 위험을 느낀 김대중은 1986년 11월 5일 ‘대통령 중심 직선제 개헌을 위한 전두환 정권의 결단’을 요구하며 “나는 대통령 중심제 개헌을 전두환 정권이 수락한다면 비록 사면·복권되더라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나의 결심을 선언한다”고 하며 조건부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였다. 


6·29 선언 10일 후인 1987년 7월 9일 전두환 정부는 김대중을 사면복권 시켰다. 김대중을 사면 복권시킨 것은 김대중이 복권되어 정치활동을 다시 하게 하면 필연적으로 김영삼과 분열될 것을 내다보고 한 조치라는 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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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김대중·김영삼이 신당 창당에 나서자 전두환 정권은 4월 10일부터 무기한 김대중의 동교동 가택연금으로 발을 묶었다. 

김대중이 연금 상태에서 동교동 자택 담장 너머로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모습이다. (출처: 김대중평화센터)




야권의 단일화 실패와 정권교체 열망 무산

김대중은 사면 다음날인 7월 10일 동교동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나는 대통령이 되는 데 관심 없다. 현재로서 불출마 선언은 변함이 없다”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날인 7월 11일 그는 대통령 불출마선언을 뒤집었다.“작년의 불출마 선언은 전두환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대통령직선제를 하면 불출마한다고 한 것이지, 이번처럼 국민의 압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전두환 대통령은 4·13 호헌 선언으로 이미 내 제의를 거부한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약속에 내가 묶여 있어야 하나?”


통일민주당은 김대중의 입당을 요청하였다. 김대중계는 입당 여부를 놓고 조기 입당파와 입당 반대파로 갈라졌다. 이중재 등 입당파는 “대통령 후보 단일화는 국민적 바람이다. 김 의장의 입당 지연은 야권의 분열과 대결의 전조가 아닌가 하여 불안요소가 되고 있다”며 김대중의 조기 입당을 주장했다. 반면 한화갑 등 비서진과 원외인사들은 “칼자루를 쥔 김영삼 총재가 끝까지 후보를 고집할 경우 당내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게 된다”며 조기입당을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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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대통령 후보 선거 포스터(시계방향)

기호 1번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

기호 2번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

기호 3번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

기호 4번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후보



김대중은 8월 6일 김영삼과 만나 입당에 합의하고 8월 8일 입당식을 하고 통일민주당 고문에 취임했다. 그러나 8월 11일 김영삼과 회동에서 대통령 후보 단일화 문제를 협의했으나 합의에 실패했다. 그 후에도 36개 미창당 지구당 결성 문제, 후보 단일화 문제 등 김영삼과는 사사건건 부딪혔다. 


1987년 9월 9일 김대중은 광주와 목포를 방문하여 기대 이상의 열기를 확인하고 고무되었다. 국민들의 민주화 열기를 군부정권 종식으로 연결하고자 하는 재야인사들은 야권의 ‘적전분열’을 우려했다. 10월 10일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이 대통령 선거 출마를 발표했다. 당내 경선에서 김영삼에 절대적으로 불리했던 김대중은 10월 18일 통일민주당을 탈당하고, 11월 12일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표 겸 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우려하던 야권분열이었다. 


집권 민주정의당 후보는 노태우, 김종필은 신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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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2월 25일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진행된 제13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선서를 하고 있다. (출처: 조선일보)




그 외 백기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이 재야 민중후보로, 신정일이 한주의통일한국당 후보로 나섰다. 백기완 후보는 대선 이틀 전인 12월 14일 야권단일화를 촉구하며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대통령 선거는 집권당 후보이자 대구·경북(TK)의 노태우 후보, 부산·경남(PK)의 김영삼, 전라도의 김대중, 충청도의 김종필이 경쟁하면서 치열한 지역대결의 장이 되어갔다. 


야권 분열의 우려를 딛고 모험을 감행한 김대중의 독자 출마는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인구가 많은 영남은 노태우 후보와 김영삼 후보로 나뉘고 김종필 후보는 당선권에서 멀며 충청권은 인구도 적다. 호남에 절대적인 기반을 갖고, 인구의 절반이 사는 서울·경기의 수도권에서 우세하여 약세 충청권까지 흡수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평민당과 김대중의 ‘4자 필승론’이었다.


선거를 약 2주 앞둔 1987년 11월 29일 오후 2시 바그다드 국제공항을 이륙한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기가 인도양 상공에서 방콕과 최후 교신을 한 뒤 실종되었다. 곧 비행기는 미얀마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폭발하여 추락했고 탑승객 115명 전원이 사망하였다는 발표가 이어졌다. 탑승자 대부분 중동 근로자들이었다. 폭파범은 북한 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로 밝혀졌고 그중 김승일은 12월 1일 바레인에서 조사를 받던 중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자살에 실패한 김현희는 대한민국으로 압송되었다. 이 사건은 불과 몇 개월 앞으로 다가온 1988년 서울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한 북한 김정일의 공작임이 밝혀졌다. 국민들은 경악했다. 북한의 안보위협이 현실화되자 반공주의가 다시 대두되고 김대중이나 김영삼 후보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다. 보수층은 군 출신인 노태우로 결집했다.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 결과는 총유권자 수 2587만 3624명 가운데 89.2%인 2306만 6419명이 투표에 참가하여 노태우 후보가 36.6%인 828만 2738표로 1위를 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김영삼 후보는 633만 7581표(득표율 28%)로 2위, 김대중 후보는 611만 3375표(득표율 27%)로 3위, 김종필 후보가 182만 3067표(득표율 8%)로 4위를 했다. 김영삼 김대중 두 후보 합친 표는 1245만표로 노태우 후보보다 417만표 가량 더 많았다. 


선거결과를 볼 때 김대중 측의 4자 필승론에 오류가 있었다. 4자 구도의 실제 선거 판세는 김종필이 한참 처지는 3강 1약의 구도로 치러졌다. 김종필은 충청의 맹주로 자처했지만 충남에서만 승리했고 충북에서는 노태우, 김영삼에게 큰 격차로 패해 3위에 그쳤다. 반면 노태우는 지역 색이 옅은 인천, 경기, 제주에서 40%대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하고 불리할 것으로 예상했던 충북과 보수 성향이 우세하던 강원도에서도 1위를 하였으며 유권자수가 많은 서울, 부산, 경남, 충남 등에서도 고르게 2위를 하며 2위와 격차를 벌렸다.


선거 결과 두 김씨 분열로 국민들의 군부정권 종식, 정권교체 열망은 허무하게 무산되었다. 지역 대결 구도가 더욱 고착되었고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는 1위로 당선되었지만 야권에 열세임이 드러나 야권의 일부를 흡수하는 3당 합당을 통해 정국 주도권을 확보하고자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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