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호 역사 대통령 선거의 역사 Ⅷ 3당 합당, 제14대 총선과 김영삼

2022.11.24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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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의 역사 Ⅷ

3당 합당, 제14대 총선과 김영삼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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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투사였던 김영삼 (출처: 시사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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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7월 5일. 연세대에서 열린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시위 도중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SY44)에 뒷머리 피격 당한 후 27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사망한 고 이한열 씨의 

분향소에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분향하고 있다. (출처: 뉴시스)




1988년 13대 총선의 여소야대 여파

1987년 12월 16일 민주정의당(민정당)은 그해 6월 민주항쟁이라는 정치적 위기 속에서 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전격 받아들이면서 노태우를 대통령에 당선시켜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 이듬해인 1988년 4월 26일 제6공화국 노태우 정부 출범 후 첫 평가전인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맞았다. 민정당은 과반수 의석 확보를 위해 27명의 현역 국회의원을 지역구 공천에서 탈락시키는 등 전력투구했다.


하지만 6월 항쟁으로 분출된 ‘5공 청산’과 ‘민주화 열망’이 곧 민정당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져 고전했다. 전국 선거인수 2619만 8205명 중 1985만 815명이 투표해 투표율 75.8%를 기록한 이 선거에서 집권 민정당은 호남 지역에서 전멸했다. 그리고 지역구 87석, 전국구 38석 총 125석을 얻어 전체 의석 299석(지역구 224석, 전국구 75석) 가운데 과반인 150석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참패를 했다.


이에 반해 야당은 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 35석, 한겨레민주당 1석, 무소속 9석으로 모두 174석을 얻어 1여 3야의 4개 정당이 의석을 나눠 가지게 되었으며 헌정사상 처음으로 야당 의석이 더 많은 여소야대 국회가 되었다. 득표율도 야당에 1.1% 뒤졌다. 결국 정국의 주도권은 야당에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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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2월13일 서울 여의도 국회 귀빈식당에서 (오른쪽부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야 3당 총재 회담에 앞서 김대중 총재가 김영삼 총재와 악수하며 손을 잡아당겨 가운데 자리를 권하고 있다.




4개 정당이 의석을 절묘하게 나눠 가진 결과 어떤 정치 세력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집권 여당이 독식하던 국회부의장과 상임위원장을 정당 의석수대로 배분하는 관례가 생겼다. 모든 법률과 예산안의 심사, 국회 통과가 여야 4개 정당의 협상으로 처리되었다. 이 때문에 다수 의석을 가진 집권 여당의 날치기와 이를 막기 위한 야당의원들의 국회 점거 농성과 몸싸움은 사라졌다. 각 정당이 원칙과 주장을 목청 높여 외치면서도 서로 대화하고 타협하면서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민주정치가 오히려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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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 합당에 반대한 노무현(가운데).




3당 합당과 민주자유당의 출범 

민주화의 분위기를 타고 5·18 민주화운동, 언론통폐합, 권력형 비리 등 전두환 정권의 어두운 면을 파헤치는 국회 청문회가 TV 생중계되면서 국민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노태우 정권은 전두환과 선을 그었다. 전두환을 국회 청문회에 세웠다. 전두환 일가와 측근들의 비리에 대해 검찰이 수사하여 측근들이 구속되고 전두환은 백담사로 사실상 귀양을 떠나야 했다. 군사정권 시절 해직된 언론인들이 국민 성금으로 한겨레신문을 창간했으며 KBS와 MBC는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반성하고 비판적인 시사 프로그램들을 잇달아 방영하여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여당인 민정당은 이러한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정치 주도권을 야당에 빼앗겨 불안했다. 1986년부터 추진해 왔던 보수정당 대통합을 다시 추진하기로 했다. 처음에 민정당은 제1야당인 김대중의 평화민주당(평민당)과 손잡으려 했다. 평민당과 합당하면 과반 의석을 확보하고 호남에 지지 기반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평민당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대신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과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에 합당 제의를 하게 되었다.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제13대 총선에서 23.8%의 득표율로 19.3%를 얻은 김대중의 평화민주당보다 많은 표를 얻었다. 그럼에도 의석수에 있어서는 평민당이 70석을 차지한 데 비해 59석으로 평민당에 제1야당을 내어주고 제2야당이 되었다. 차기 대권의 경쟁관계에 있는 김영삼과 김대중 사이에 이 같은 결과가 나오자 김영삼은 위기감을 느꼈다. 김영삼은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할거하는 4당 구도가 대선 때까지 지속될 경우 대통령 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야권에 남아 김대중과 경쟁하는 대신 여권의 대통령 후보가 되는 방법을 고려하게 되었다.


김영삼 총재는 비밀리에 민정당과 합당협상을 벌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당내에서 반발이 일어났다. 이기택, 김정길, 장석화, 김상현, 박찬종, 홍사덕, 이철, 노무현 8명은 “독재 정부의 후신인 민정당과 함께할 순 없다”며 끝까지 합당에 반대했다. 이들은 김영삼과 결별하고 민주당(일명 꼬마민주당)을 결성하였다.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은 13대 총선에서 지역구 27석, 전국구 8석 등 35석을 얻어 교섭단체 확보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표밭인 충청도에서 27석 중 15석 밖에 얻지 못했다. 이것은 ‘민주화’가 화두가 된 시대에 국민들에게 ‘보수’의 원조격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민정당과 차이가 거의 없었고 2차례 보궐선거에 전패했으며 옛 민주공화당 출신 인사들은 야당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또한 불만이 높아 당을 꾸려나가기 어려웠다. 김종필은 이대로는 대권 도전 자체가 힘들다고 판단하고 내각제 개헌에 기대를 갖고 민정당, 민주당과의 합당에 나서게 되었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 대통령(민주정의당 총재),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가 모여 3당 합당을 발표하고, 그해 2월 9일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탄생했다. 13대 총선으로 국민이 만들어준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은 약 2년 만에 도로 여대야소(與大野小)가 되었다. 3당의 국회 의석수를 합치면 개헌선인 200석을 넘었다. 이전의 호남 대 PK(부산경남) 대 TK(대구경북) 대 충청도의 4자 지역정치 구도가 한순간에 호남 대 비(非)호남으로 단순화되었다. 민주 진영의 양대 주자였던 김영삼, 김대중의 통합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김대중의 평화민주당만이 유일하게 원내 야당으로 남았다. 고립된 호남은 필사적으로 ‘김대중=민주화’로 등치시키며 전유화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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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을 발표하는 (왼쪽부터)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노태우 대통령(민주정의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




내각제 개헌 합의각서 파문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을 할 때 노태우 대통령, 김영삼(YS)·김종필(JP)은 이면으로 내각제 개헌에 합의하고 각서를 작성했다. 다음 대통령에 강한 의욕을 갖고 있었던 김영삼은 내각제합의를 이행할 뜻이 없었다. 그런 와중인 1990년 5월 6일 민주자유당 제1차 전당대회를 사흘 앞두고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표, 그리고 김종필 최고위원은 모두 최고위원의 자격으로 1년 안에 의원내각제로 개헌한다. 이를 위해서 올해 안에 개헌작업에 착수한다”는 내용의 합의 서명한 각서가 언론에 공개되었다. 각서의 공개는 김영삼의 반대에도 내각제 개헌 논의를 본격화하겠다는 신호였을 것이다.


그 후 6월 16일 노태우 대통령은 김대중 평민당 총재와 내각제 개헌문제를 두고 3시간에 걸친 단독회담을 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날 “내각제 개헌을 한 다음에 총선을 치른다” “개헌을 추진할 경우 평민당과 사전협의하겠다”며 개헌추진을 처음으로 기정사실화 했다. 또한 “임기가 끝난 뒤에는 어떤 형태로든 국정에 간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것은 김영삼 당 대표최고위원이 개헌을 반대하고 나설 경우 개헌은커녕 또다시 당이 내분사태에 빠질 것을 우려하여 김대중을 끌어들여 김영삼을 압박하여 개헌을 밀어붙일 계획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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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2월 9일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 창당 축하연에 모인 

(왼쪽부터)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 (출처: 한겨레신문)




민정계에서는 3당의 밀실합당에 대해 국민여론이 부정적이어서 김대중 총재가 개헌반대 여론을 증폭시켜 개헌 자체를 아예 무산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어찌됐든 김대중 총재를 개헌 대열에 끌어들여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김대중은 3당 합당 때 “합당의 다음 단계는 이원집정부제라 할 수 있는 내각제 개헌이다”라고 하며 ‘내각제 불가’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과의 독대에서 집요하게 따졌다거나 심각하게 대립했다는 흔적은 없었다. 그 전에 그는 “국민 대다수가 내각제를 지지한다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13대국회는 내각제 개헌을 할 자격이 없다”고 했다. 그 말은 “14대 국회는 내각제로 갈 수도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김대중으로서도 호남이라는 확고하긴 하지만 그만큼 한계가 뚜렷한 지역기반을 가진 그가 대통령직선제보다는 내각책임제가 더 유리한 현실적인 면이 있었다. 이런 측면 때문에 민정계는 김대중과 평민당이 내각제에 대해 극렬한 반대를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 있었다.


김영삼은 난감했다. 그렇지 않아도 3당 합당으로 인해 ‘군사정권과 야합’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자신의 기반인 부산경남지역에서조차 입지가 좁아져 있는데 국민의 열망이었던 대통령 직선제 개헌 후 겨우 한 번 대통령 선거를 치르고는 다시 ‘내각제 개헌 야합’을 한 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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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대통령 노태우



1990년 10월 28일 김영삼은 청와대를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합의문서 공개는 처음부터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어 고사시키려는 정치공작이다. 군사정권식 발상인 것이다. 내각제개헌은 국민과 야당이 반대하면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민주계 소장파 의원들은 “민자당에 남든 뛰쳐나가든 장수가 죽기 일보직전인 마당에 우리는 무조건 YS를 따를 것”이라며 지원했다. 서청원, 강삼재, 최기선, 김운환 등 강경파 의원들은 탈당불사론을 들고 나왔다.


김영삼은 10월 31일 대표최고위원 당무를 거부하고 경남 마산으로 내려갔다. 이것이 ‘내각제 각서 파동’이다. 여론도 내각제 이면합의를 비난했다. ‘여당 2인자’인 김영삼의 당무거부와 마산 잠적에 노태우 대통령과 민정계는 당황했다. 이들은 김영삼을 가까스로 달래 다시 서울로 불러들였다. 당무에 복귀한 김영삼은 ‘차기 대권 조기 가시화’를 주장하며 노태우 대통령과 민정계를 압박했다.


민정계 일부도 親(친)YS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민정계가 차기 주자 한 명을 내세우지 못하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당내 주도권을 김영삼이 장악하고 민정계는 김영삼에게 예속돼 버렸다. 김영삼은 이렇게 특유의 승부사 기질을 발휘하여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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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 총수 정주영이 창당한 통일국민당

국회의원 후보로 나선 코미디언 이주일(본명정주일) 선거포스터



제14대 총선과 민주자유당의 한계

1992년 제14대 총선과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를 맞았다. 3당 합당 2년 만에 치러지는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노태우 정부의 마지막 평가전이자 14대 대선을 8개월을 앞둔 전초전이었다.


1992년 3월 24일 299명의 국회의원을 뽑는 제14대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각 지역구에서 1구 1인의 국회의원을 뽑는 소선거구제를 통한 직접선거로 총 유권자수 2900만 3828명에 2084만 3482명이 투표하여 투표율 71.9%를 기록하였다.


2년 전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으로 219석의 거대 여당이었던 민주자유당은 3당 합당으로 인해 경상도와 충청도의 지지를 얻게되어 민자당 압승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3당 합당에 대한 비판, 내각제이면 합의를 둘러싼 민정계와 민주계의 파쟁이 계속되었던 데다가 선거 막판에 현대그룹 총수 정주영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여 돌풍을 일으켰다. 통일국민당은 여야의 낙천자들을 영입하여 보수층 일부를 끌어갔다. 그리하여 민자당은 선거 전 193석이었는데, 선거 결과 792만 3718표를 얻어 149석으로 44석이 줄었다. 과반 의석에도 미치지 못하는 참패였다.


김대중의 통일민주당은 3당 합당으로 인해 민주계가 야권에서 떨어져 나가고 유일한 야당으로 내몰렸다. 김대중은 평민당을 신민주연합당으로 개편하고 3당 합당에 반발하여 뛰쳐나간 꼬마민주당을 끌어들여 새로운 신민주연합당을 만들었다. 또한 기존의 운동권 세력들도 끌어들이는 등 외연을 확대했다. 신민주연합당은 600만 4578표를 얻어 선거전 64석에서 23석을 더 얻어 97석으로 선전했다.


정주영의 신생 통일국민당은 선거전 8석으로 출발하였는데, 선거 결과 357만 4419표를 얻어 31석으로 원내 교섭단체 구성을 너끈히 달성했다.


총선 참패의 책임이 당 대표최고위원 김영삼에게 돌아올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김영삼은 오히려 “자신을 차기 대통령 후보로 밀지 않으면 탈당하겠다”는 배수진을 치며 노태우 대통령을 압박했다. 김영삼은 군출신 노태우 정권과 손을 잡았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재야 진영에서 ‘배신자’ 소리를 들으며 정치적으로 꽤 큰 출혈을 입은 상태였다. 탈당을 해도 재야 민주화 세력에게서 호응을 얻기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탈당해서 평화민주당으로 들어가 김대중을 지지하겠다고 하면 양김 연합으로 군부세력 대 민주세력 구도가 되고 김대중에게 ‘영호남 통합 후보’라는 상징성까지 부여하면 본인도 2인자로서 다음 대권을 바라볼 수 있을 테니 김영삼으로서도 해볼 만했다. 이는 민자당의 참패 속에서 이전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의 기반이었던 부산·경남 지역은 거의 석권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마침 국군 보안사에서 ‘청명계획’을 세워서 야권 인사들을 사찰, 체포하는 작전을 세웠다는 폭로가 터졌다. 김영삼도 사찰 대상이었다는 점이 알려졌다. 김영삼은 “여당 대표최고위원도 사찰하는 정권”이라며 노태우 정부를 강하게 압박하였다.


김영삼의 이런 행보에 박철언 등 민정계는 강력히 반발했다. 일부 민정계 강경파는 차라리 분당을 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지율이 10~20%대로 낮았고 마땅한 대권 후보도 없었다. 김영삼이 다시 김대중과 합당이라도 해서 정권 교체가 되면 양김에게 정치 보복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민정계 측은 결국 김영삼에게 당권을 내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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