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호 역사 일본의 만주침략 90주년

2021.10.03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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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만주침략 9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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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를 침공하는 일본군


 


만주침략 90주년

2021년 9월 18일은 일본의 만주침략 90주년의 날이다. ‘만주사변’이라 불리는 이 사건의 바른 이름은 일본의 ‘만주침략전쟁’이다. 중국에서는 ‘9·18사변’이라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은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한 1939년 9월 1일을 발발일로 하고 있지만,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만주를 침공한 이날 시작되었다. 일본은 이후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으로 이어진 이 침략전쟁들을 묶어서 ‘15년 전쟁’이라 한다. 만주침략은 그 서막이었다.


제국들의 각축장이 된 만주와 주변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1895년 4월 17일 청국과의 사이에서 체결된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에 의해 타이완과 랴오둥반도 전체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러시아, 프랑스, 독일 3국이 나서 랴오둥반도를 청국에 반환하도록 일본에 압력을 가했다. 일본은 유럽 강국인 3국을 상대로 싸울만한 국력이 안 되었기 때문에 청국으로부터 4500만 원의 보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랴오둥 반도를 반환했다. 독일은 내친김에 1898년 3월 칭다오(靑島)가 있는 자오저우만(膠州灣)을 조차하였으며 러시아는 만주에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일본이 차지하려던 랴오둥반도를 조차하였다. 청일전쟁 승리로 한껏 고양됐던 일본에게 엄청난 굴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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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철도노선(1945년)



그러나 1905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했다. 일본은 러시아가 가져갔던 랴오둥반도의 일부인 뤼순(旅順, 여순), 다렌(大連, 대련) 일대와 남만주철도를 다시 빼앗아 ‘관동주(關東州)’라고 이름했다. 안중근 의사의 재판, 수감과 순국 장소가 뤼순이었던 것은 그곳이 일본 조차지 관동주였기 때문이다. 만주 남부지역은 이렇게 하여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경제적 식민지가 되었다. 일본은 관동주와 남만주철도를 수비할 관동도독부 육군부(關東都督府陸軍部)를 편성했다. 이것이 관동군의 시초이다. 하얼빈을 중심으로 만주 북부지역은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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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철도 폭파 현장(1931년 9월 18일)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영일동맹에 기반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일본은 3국 간섭을 했던 적국 독일이 조차한 칭다오(靑島)가 있는 자오저우만(膠州灣)과 남태평양의 독일 식민지들을 빼앗았다. 또한 중국에 대한 서구 열강의 관심이 소홀해진 틈을 타서 중국의 위안스카이(袁世凱) 총통에게 산둥성·남만주·동부 몽골에 대한 일본의 특수권익 승인, 한야평공사(漢冶萍公司: 중국의 철도-철광-탄광 통합경영회사)의 중·일 합작화, 중국 연안의 불할양(不割讓), 중국정부 각 기관·군대에 일인 고문 고용 등 중국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화하는 21개조의 요구를 강요하였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 반일감정이 폭발하여 1919년 우리 3·1운동에 자극을 받아 5·4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중국의 정세는 중국 공산당의 대두(1921), 쑨원의 사망(1925), 군벌들의 할거,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 장악과 군벌을 치는 북벌 등 혼란스럽게 돌아갔다. 일본은 만주의 봉천파 군벌 장쭤린(張作林)을 뒤에서 보호하면서 친일화했다.


그러나 5·4운동 발발 이후 대중의 자각과 일본 배척 분위기가 높아지면서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하기가 어려워졌다. 일본에서도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라 하는 민주화 시대가 열려 군부 영향력이 축소되고, 군비 또한 감축되려 하자 영관급 장교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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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의 도화선이 된 철도폭파 현장 조사 장면





정부 통제 밖의 군대 관동군

중국 국민들의 반일분위기가 고조되자 만주 군벌 장쭤린(張作林)이 국민 여론에 따르겠다며 반일로 돌아서려 했다. 관동군의 고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 대좌는 장쭤린이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고 1928년 6월 4일 부하를 시켜 베이징에서 펑톈으로 돌아오는 장쭤린의 남만주 철도 기차를 폭파하여 암살했다. 일단의 관동군 장교들은 장쭤린을 제거하고 혼란이 일어나면 이를 빌미로 만주를 장악하려 하였다. 그러나 장쭤린의아들 장쉐량(張學良)은 일본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장제스 중심의 국민당과 손을 잡고 일본 수중으로 넘어오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1929년 말 세계 대공황이 일어났다. 일본경제는 큰 타격을 받고휘청거리기 시작했다. 1930년에 들어서자 불황이 더 깊어졌다. 주가가 폭락하고, 수출은 정체되었으며, 거리에는 300만의 실업자가 넘쳤다. 노동쟁의가 빈발했다. 물가는 상승했고, 쌀값은 폭락하여 농민생활이 비참해지자 소작쟁의가 확산되었다. 극우 정치권에서는 위기탈출을 위한 군부의 행동을 기대하고 요구했다.


이후 관동군 사령관이 혼조 시게루(本庄 繁)로, 참모장이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 征四郎)로 교체되었으며 관동군 작전참모에 “만주와 몽골을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미국과 일본이 결국 한 판 붙게 될 것”이라고 거리낌 없이 떠들던 ‘일본 육군의 이단아’ 이시와라 간지(石原 莞爾)가 부임했다. 관동군은 점차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사건을 일으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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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성 성문(펑톈성, 1913년경)




만주사변의 발발, 류탸오후사건

1931년 9월 18일 오후 10시 20분, 펑톈(奉天) 북쪽 7.5㎞ 떨어진 류탸오후(柳条湖)에서 철도가 폭발했다. 폭파 규모가 매우 작아 30분 후 특별열차가 시속 80㎞로 지나가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관동군 독립수비대 2대대 3중대는 자신들이 한 폭파를 중국 동북군 소행이라고 거짓보고했다. 참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좌는 혼조 시게루 사령관를 사칭하여 즉각 독립수비대 2대대와 5대대에게 중국 동북군 7여단을, 2사단 29연대에게는 펑톈성(奉天城) 공격을 명했다. 다음날인 9월 19일 새벽 1시 7분 관동군은 도쿄에 “중국 동북 군벌 장쉐량이 공격을 해 왔다”고 거짓보고 전문을 보냈다. 오후 6시 동경의 가나야 한조(金谷範三) 참모총장은 “쓸데없는 공격을 하지 말라”며 확대불가 방침을 내려 보냈다. 그러나 이시와라 간지 작전참모는 장쉐량의 군대 25만 명이며, 펑톈에만 2만 명이 넘는 병력이 있다며 조선에 주둔 중인 조선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조선군 사령관 하야시 센쥬로(林 銑十郞)는 천황의 재가도 참모본부의 승인도 받지 않고 9월 21일 오후 조선 주둔 혼성 제39여단 소속 1만여 명의 병력과 2개 비행중대를 압록강 너머로 급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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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 선양(펑톈)의 역사박물관 입구의 상징 조형물(九·一八歴史博物館)




관동군 2사단은 요녕성의 수도 펑톈(奉天, 후에 선양(瀋陽))을 포위했다. 동북군은 완강히 저항했지만 일본군의 공격이 의외의 기습인 데다 화력이 압도하여 곧 무너지고 말았다. 관동군은 비슷한 시간에 길림성 수도 창춘(長春)과 지린(吉林)도 손에 넣어 남만주 전체를 장악하고 사령부를 뤼순에서 펑톈으로 옮겼다.


한편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 군부가 정부의 통제 밖에서 행동하기 시작하자 1932년 2월 새로 성립된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내각은 군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 했다. 이에 청년 장교들이 반발하여 3개월 뒤인 5월 15일 이누카이 수상 관저에 난입하여 수상을 암살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의 민주적 정당 정치는 쇠퇴하고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사회주의 운동과 민주화 운동은 치안유지법에 의해 탄압을 받아 모습을 감췄고, 군부가 천왕을 옹위하며 군국주의적 전체주의로 급속히 나아가게 되었다.


장쉐량의 대응

중앙정부의 지배력이 미치지 않는 가운데 만주의 실질적 지배자인 군벌 장쉐량은 30만 명의 정규군과 18만 명의 비정규군, 중국 군벌 중에 최대 규모의 함대와 300대에 달하는 전투기를 갖춘 공군, 펑톈에 2만 5000명의 근로자들이 대포, 포탄, 기관총, 소총, 탄환을 생산하는 병기창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장쉐량은 일본에게 전면전의 빌미를 줄까봐 두려워했다. 만약 일본이 전면 공격을 감행해온다면 자신의 기반을 모조리 날리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장쉐량의 군대는 베이핑(北平, 현 베이징) 근처에 있었으며, 군대를 북상시키지 않은 채 “일본이 만주를 통째로 점령할 야욕은 없으며 단지 만주 철도를 보호하기 위한 출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장쉐량은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1. 관동군의 도발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동북군은 무력으로 대항하지 말고 모든 무기를 병기고에 보관한 채 스스로 물러날 것이며 일본군에게 최대한 협조하라.


2. 난징 정부에 알려 국제연맹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도록 건의하라.


3. 뤼순으로 대표를 파견해 일본의 요구가 무엇인지 파악하라.




장쉐량의 무저항 지시에 휘하의 많은 동북군 부대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관동군에 투항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장쉐량에 반대하는 만주 구파는 관동군의 회유에 일본과 손을 잡았다.


관동군의 북만주 공략

10월 15일, 투항한 동북군들을 앞세운 관동군이 치치하얼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1월 9일에 치치하얼이 함락되었고 관동군의 도가 지나친 공격을 지켜본 장쉐량은 그제야 맞서 싸우는 것 외의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베이핑에 주둔한 병력을 만주로 보내기 시작했고, 만주의 패잔병들을 수습하여 5만 명의 병력으로 화북과 동북을 연결하는 전략상 요충인 진저우(錦州)를 방어했다. 장쉐량은 만주 전역의 동북군에게 저항을 호소했다. 그러나 너무 늦은 호소였다.


장쉐량이 진저우를 지키기 위해 베이핑의 병력을 파견하자 옌시산(閻錫山)을 비롯한 화북 군벌들은 장쉐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장쉐량의 군대는 혼란 속에 와해되어 반란이 일어났고, 진저우는 1932년 1월 3일 조선군에서 지원나간 제20사단에게 함락되었다. 마지막으로 하얼빈도 1932년 2월 5일 일본군 2사단에게 항복하여 만주 전체가 일본군 수중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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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의 12대 마지막 황제 푸이

(선통제)가 소련군에 붙잡힌 모습

(1945년 8월 16일)




만주국 수립

관동군은 내친김에 만주를 중국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해 낼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청조의 12대 마지막 황제로 자금성에서 쫓겨나 톈진의 일본 조계지에서 거주하던 선통제(宣統帝, 愛新覺羅溥儀)를 내세워 집정으로 삼고 1932년 3월 1일 만주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세계의 이목이 만주를 차지하는 일본에 쏠리자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상하이를 침공하여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다.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는 일본의 만주침략 야욕과 그 승리의 축제판에 철퇴를 가하는 사건이었다.
 

국제연맹이 리턴 조사단을 보내 일본의 만주침략을 조사했고 “만주국이 괴뢰국이며 만주는 중국 고유 영토라고 만주국 해체”를 요구했다.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1만 5000명의 관동군은 1932년 9만 4000명으로, 1935년에는 16만 4000명으로 증강되었다. 1934년 만주국은 제국을 선포하고 푸이를 황제에 앉혔다. 실제는 관동군이 뒤에서 모든 것을 조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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