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호 인물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 선수 “다시 달리고 싶습니다”

16일 전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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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마라토너 이봉주 선수

“다시 달리고 싶습니다” 


글 백은영 사진 박준성 사진제공 이봉주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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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웃음 띤 얼굴을 보여준 이봉주 선수. 그는 불쑥 찾아온 병마도 ‘마라톤 정신’으로 이겨내겠다고 말했다. 




흔히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한다. 순탄하지만은 않은 길, 때로는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 위에서 끝없이 자신과 싸워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지만 포기하지 않고 완주했을 때의 기쁨. 누군가는 말한다. 마라톤에서 메달 색깔보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완주’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인생도 그와 같다.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인생에 있어 승자와 패자, 성공과 실패는 없다. 마라톤에서 맨 마지막에 들어온 선수를 향해 박수를 보내는 것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한 그 집념과 인내를 향한 찬사이다.


‘국민 마라토너’ ‘봉달이’.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사람. 바로 이봉주 전 마라토너다. 지난 2009년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 여러 방송에 출연하면서 ‘예능’ 대세로 떠오른 이봉주 선수. 대한육상연맹 홍보이사로서 대한민국 마라톤 발전을 위한 활동을 비롯해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쳐오던 그가 지난 2020년 원인불명의 통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근육긴장이상증’이라는 난치병 판정을 받은 후 지난해 6월 수술을 받고 재활 중인 그를 용인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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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 위해 고등학교 재입학하기도

늦게 시작한 만큼 노력만이 최선

평발에 짝발, 약점을 성실함으로 이겨내



달리기 위해 학교를 옮기다

이봉주 선수의 고향은 충남 천원군 성거면 소우리다. 지금의 천안 서북구에 위치한 곳으로 그의 말을 빌리면 ‘완전 시골’이었다. 부모님을 도와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도왔던 그는 당시 여느 시골이 그렇듯 대중교통이 여의치 않아 학교까지 걷거나 뛰어가는 일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의 권유로 특별활동 시간에 육상을 접하게 되면서 ‘달리기’에 흥미를 갖게 됐다는 그는 남들보다 다소 늦은 시기인 고등학교 때 정식으로 육상 선수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육상부에 들어가면서 달리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졌어요. 버스비도 아낄 겸 집에서 학교까지 12㎞ 정도 되는 거리를 뛰어갔어요. 처음에는 1시간 30분 정도 걸렸던 거리가 체력도 좋아지고 익숙해지면서 1시간 정도로 단축되기도 했죠.”


천안농업고등학교 재학 중 인천으로 합숙훈련을 갔을 때다. 다른 학교 선배가 전학 오면 특기생으로 받아줄 수 있다는 말에 욕심이 생겼다. 대신 재입학하는 조건이었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충남 예산에 있는 삽교고등학교로 옮겼다. 실력 좋은 선수들과 함께 열심히 훈련에 임했지만 1년이 안 돼 육상부가 해체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육상부가 해체되면서 학교에 남아있거나 육상부가 있는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거나 했어요. 맨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저는 다른 학교로 전학 가기 전까지 참 힘든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요. 공부도, 운동도 제대로 되지 않았던 시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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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청 소속 때 이봉주 선수의 모습



결국 그는 2학년 때 다시 육상부가 있는 광천고등학교로 전학했다. 불현듯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떠올랐다.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의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했다면, 고등학생 이봉주는 ‘달리기’ 위해 학교를 세 군데나 다닐 정도로 ‘육상’에 대한 강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런 그의 노력과 근성이 오늘의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를 만든 밑바탕이 됐을 것이다.


소질보다는 노력으로

평발에 짝발인 그는 자신을 “달리기에 소질이 없던 사람”이라고 말한다. 스피드도 떨어지는 데다 보통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하는 운동을 고등학생이 돼서야 시작한 것도 약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타고난 지구력과 성실함으로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출전한 전국체전 육상 10㎞에서 3위를 차지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1990년 서울시청 육상단에 입단하면서 서울시립대 야간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노력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만큼 훈련량을 늘렸어요.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 한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이왕이면 잘해서 국가대표도 되고 싶었죠.”


사실상 그가 마라톤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서울시청에 입단하면서부터다. 고교 시절엔 육상대회에서 가장 긴 거리가 10㎞였기 때문이다. 서울시청에 입단하던 해 10월 제71회 전국체전에서 처음으로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한 그는 2시간 19분 15초를 기록해 2위로 데뷔, 이듬해인 1991년 제72회 전국체전에서는 1위에 오르는 성과를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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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회 보스턴마라톤대회(2001년 4월 16일)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봉주 선수.




이후 1993년 호놀룰루마라톤 우승, 1995년 동아마라톤대회 우승,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은메달과 같은 해 열린 제50회 후쿠오카마라톤에서 우승,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 2001년 제105회 보스턴마라톤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그야말로 세계적인 마라토너로서 입지를 굳히게 된다. 2000년 일본에서 열린 도쿄마라톤에

서는 2시간 7분 20초의 한국신기록을 세우며 준우승해 ‘국민 마라토너’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여러 대회에서 우승한 그이지만 무엇보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뒤 태극기를 흔들며 트랙을 도는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금메달과 불과 3초 차이였어요. 당시에는 은메달을 딴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하고 기뻤어요. 시간이 지난 후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솔직히 당시에는 10등 안에만 들어도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가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땄을 때가 스물일곱. 최선을 다해 뛰자고만 생각했던 경기에서 은메달을 딴 그는 군대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메달권 진입은 단지 운이 좋았던 것이 아닌, 최선을 다했기에 나온 당연한 결과였다. 


지구를 네 바퀴 돌다

이봉주 선수가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마라톤에서 은메달을 따면서 한국 사회에 불어온 변화가 있다. 바로 메달의 색은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의 변화다. 물론 전 세계 많은 국가대표 선수들이 올림픽을 비롯한 각종 대회에서 우승을 목표로 훈련하고 있지만, 유독 우리나라 선수들에게 메달의 색은 중요하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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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번째 풀코스를 뛰고 있는 이봉주 선수(출처: 뉴시스)




선수들도 금메달을 놓치면 크게 아쉬워했고 마치 국민 앞에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많았다. 언론이 끼친 영향도 없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금메달이 아닌 은메달, 동메달을 따면 “은메달에 그쳤다”와 같은 표현 위주였으나, 이봉주 선수가 은메달을 따고 기뻐하는 모습에 언론도 메달의 색깔을 두고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빈도가 줄었으며, 선수들의 활약상을 지켜본 국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싸운 선수들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분위기로 바뀌기 시작했다. ‘스포츠 정신’ ‘올림픽 정신’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준 이봉주 선수의 역할이 빛났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마라토너 이봉주는 말한다. “제가 그때(애틀랜타올림픽) 은메달을 땄기에 선수 생활을 오래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마라토너로서 이룰 목표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계속 뛸 수 있었던 거죠.”


한편 지난 2009년 3월 이봉주 선수는 제80회 서울국제마라톤 겸 제80회 동아마라톤 대회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40번째 마라톤 풀코스 경기였다. 이후 같은 해 10월 열린 제90회 전국체육대회 마라톤 남자일반부에서 1위로 완주하면서 이봉주는 통상 41번의 마라톤 풀코스를 뛴 마라토너로 기록됐다. 이봉주 선수가 20년 마라톤 인생 동안 뛴 거리를 환산하면 16만㎞ 정도다. 이는 지구를 네 바퀴 돈 것과 맞먹는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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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9년 10월 열린 제90회 전국체육대회에서 대회 이틀째인 21일 육상 마라톤 풀코스에 출전한 

이봉주 선수가 1위로 완주한 후 한밭종합운동장에서 어머니와 포옹을 하고 있다. (출처: 뉴시스)




방송 활동 중 찾아온 병마

“은퇴한 뒤 머리도 식힐 겸 쉬고 있는데 방송국에서 섭외가 들어왔어요. 예능에 소질이 없어 몇 개월을 피해 다녔죠. 그런데 지인들을 통해서도 요청이 들어오는 데다 마침 당시 대구에서 세계육상선수권대회도 개최될 때였어요. 육상대회 홍보도 할 겸 방송에 출연하게 됐죠.”


이봉주의 방송 입문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그램 MBC <댄싱 위드 더 스타(2011년 6월 10일~2011년 8월 26일)>다. 당시 그는 “스포츠댄스도 하나의 스포츠이기 때문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나와는 거리가 멀지만 노력 해서 나만의 스타일로 보여주고 싶었다”며 출연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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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예능프로그램 <뭉쳐야 찬다>에 출연했을 때의 이봉주 선수(방송화면 캡처)




이후 채널A <불멸의 국가대표(2013)>, MBC <무한도전(2016)>, SBS <자기야 백년손님(2016)>, JTBC <뭉쳐야 찬다(2019)> 등에 출연하면서 숨겨져 있던 예능감을 보여주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10년 가까이 방송을 통해 즐거움을 선사하던 그에게 2020년 갑자기 원인불명의 병마가 찾아왔다. 검사 끝에 ‘근육긴장이상증’이라는 난치병 판정을 받은 그는 복근에 계속되는 통증과 경련으로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한 채 투병생활을 해오고 있다. 작년 6월 서울성모병원에서 6시간 30분에 걸쳐 척수지주막낭종 제거 수술을 받아 호전되는 듯했지만 여전히 계속되는 통증으로 하루하루를 병마와 싸우는 중이다. 



타고난 예능감으로 방송 출연

2020년 찾아온 원인불명의 병마

“마라톤 정신으로 이겨내겠다”



“병마와의 힘든 싸움에 많은 분들의 응원이 큰 힘이 되고 있어요. 이 힘든 과정을 함께 이겨내주고 있는 가족들에게 제일 미안하고 또 제일 감사하죠.” 


수술 후 계속되는 재활 치료 및 운동 등으로 힘겨울 법도 하지만 인터뷰 내내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 웃음과 긍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한 대화에서 이봉주 선수의 강인한 의지가 엿보였다. 마라톤 풀코스를 41번 완주한 그 정신력과 인내로 이 병마 또한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본다.


직접 코스 설계한 마라톤 대회 희귀병으로 투병 중인 그이지만 지난 2021년 11월 28일 자신을 응원하는 팬들과 함께 다시 트랙 위를 달려 잔잔한 감동을 전하기도 했다. 이날 경기도 부천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이봉주 쾌유 기원 마라톤’에서 그는 많은 응원을 받으며 마지막 1.2㎞를 달렸다. 400m 트랙을 세 바퀴 돌고 결승선을 통과한 그는 “오늘은 이봉주가 다시 태어난 날”이라는 소감과 함께 “빨리 회복해서 여러분과 즐겁게 달릴 수 있는 그런 날이 올 수 있게 꼭 만들어보겠다”는 다짐을 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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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에 직접 설계한 마라톤 코스

올 가을 ‘천안 이봉주 마라톤 대회’ 개최 예정

“웃음·긍정은 내가 가진 최고의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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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주는 또한 선수 시절 경험을 살려 올 봄부터 천안시 전역을 돌아보며 직접 마라톤 코스를 설계하기도 했다. 천안시는 이봉주 선수와 함께 지역 내 국제 규모의 마라톤 대회 개최를 위한 42.195㎞ 풀코스와 하프, 10㎞, 5㎞ 코스 개발을 추진 중이다. 


국내에 유명 마라토너의 이름을 딴 대회는 많지만 선수가 직접 마라톤 코스 설계에 참여한 사례는 처음이다. 이봉주 선수가 직접 설계한 마라톤 코스를 달리는 ‘천안 이봉주 마라톤 대회’가 올 가을 그의 고향 천안에서 열릴 예정이다. 


“환경이 좋고 안전하면서도 마라토너들이 지루하지 않을 코스를 개발하고 싶었어요. 무엇보다 천안시는 입지 조건이 좋은 만큼 시민들의 협조와 관심으로 세계적 마라톤 대회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봉주 선수는 병마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지만 ‘마라톤 정신’으로 이겨내겠다며, 기회가 된다면 아프기 전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아이들에게 희망을 전했던 활동도 이어가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 단지 그가 실력만 있는 선수였다면 결코 불릴 수 없는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 실력과 노력, 인성이 겸비된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생각은 인터뷰를 하면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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