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호 인물 ‘윤봉길 친조카’ 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 “상해의거가 주는 의미 상당해 잘못 알려진 사실 바로 잡아야”

2022.10.16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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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친조카’ 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

“상해의거가 주는 의미 상당해

잘못 알려진 사실 바로 잡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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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김현진 사진제공 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윤봉길 의사의 상해의거(1932년 4월 29일)는 항일 독립운동사에서 큰 획을 그은 대사건이다. 겨우 이름만 유지하던 임시정부(임정)를 소생시킨 것은 물론 중국인들의 마음까지도 사로잡았다. 당시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100만 대군도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큰 감동을 받아 제2차 세계대전 말 전후처리문제를 사전협의하기 위해 열린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창했다. 그 덕분에 해방 후 조선이 바로 독립될 수 있게 됐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윤 의사의 상해의거였다.


윤봉길 의사의 친조카인 윤주(75)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은 갓 20세가 되던 1966년부터 기념사업에 참여해 지금까지 56년간 윤 의사의 선양사업에 일평생을 바쳐왔다. 그는 윤 의사의 친동생인 윤남의(1916~2003) 아들이다. 올해 광복 77주년을 맞은 가운데 윤 부회장은 윤 의사와 관련해 잘못 알려진 것들을 바로 잡기 위해 본지와 인터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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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가 선서문을 목에 걸고 권총, 폭탄을 양손에 들고 태

극기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결연한 표정에서 이미 죽기

를 각오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제공: 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

념사업회 부회장)




세간에는 윤봉길 의사가 김구 선생의 지시대로 움직인 행동대장이나 혹은 암살 하수인으로 알려졌으나

둘은 상해의거를 도모한 동반자관계라는 것. 


윤주 부회장은 “윤 의사가 단독으로 거사에 대한 뜻을 먼저 밝혔고, 김구가 폭탄을 마련해 줌으로써

배후에서 도운 것”이라고 말했다.




김구·윤봉길 의거의 동반자 관계

우선 대표적으로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와의 관계다. 세간에는 윤 의사가 김구의 지시대로 움직인 행동대장이나 혹은 암살 하수인으로 알려졌으나 둘은 상해의거를 도모한 동반자관계라는 것. 윤 부회장은 “윤 의사가 단독으로 거사에 대한 뜻을 먼저 밝혔고 김구가 폭탄을 마련해 줌으로써 배후에서 도운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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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과 윤봉길(오른쪽) 의사 

(제공: 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




윤 의사가 큰 뜻을 품고 고향을 떠나 상해로 왔지만 막상 마주한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의 현실은 암담했다. 크게 실망한 윤 의사가 미국 유학을 준비할 정도로 당시 ‘임정’은 무력했다. 윤 의사가 유학비용을 마련하려고 모자공장(중국종품공사)에 근무할 때 김구가 몇 번 들러 공장에 근무하는 한인 공우들과 시국문제를 토론했는데 임정의 무력함에 실망해있던 윤 의사는 김구와 특별한 교분을 쌓진 않았다. 당시 윤 의사는 한인공우친목회 회장이었다. 김구에 대해서도 윤 의사는 보통의 애국지사 정도로만 여겼는데, 김구를 달리 보게 된 계기는 후배 유진만의 집에 갔다가 이봉창 의사에게 폭탄을 준비해 준 사람이 김구 선생이라는 말을 듣게 되면서다. 이봉창 의사는 1932년 1월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진 인물이다.


1932년 1월 28일 상해사변이 발발하자 윤 의사는 도미유학 계획을 포기하고 혁명을 결심해 많은 애국지사들을 만나 정보를 얻으며 일본군의 동향을 파악했다. 그러다가 4월 24일에 ‘오는 4월 29일 홍커우공원에서 천장절 축하식을 거행한다’는 일본 교민신문기사를 보고 거사의 뜻을 품었다. 그리고 김구를 찾아가 거사의 뜻을 밝히고 폭탄을 준비해 줄 것을 부탁했다. 김구는 전도가 창창한 청년을 사지로 내몰 수는 없는 일이라고 잠시 망설였지만 윤 의사가 간절히 요청하는 데다 논리 정연한 설득과 비장함에 타오르는 눈빛을 보고 그 뜻을 받아들여 폭탄을 마련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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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의거후 현장에서 윤봉길 의사가 연행되는 사진. 왼쪽 사진은 1932년 5월 1일자 도쿄니찌니찌신문 호외에 보도됐던 연행 모습. 

흐린 날씨와 필름 전송 과정에서 발생된 문제로 윤 의사 얼굴과 중절모자 수정처리해서 보도됨. 오른쪽 사진은 1932년 5월 1일 오사카 

아사히신문 호외 2면에 보도된 사진. 흰 물체는 일본군의 군도(칼)며, 삼엄한 경계 속에 연행되고 있는데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진

이다. (제공: 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




임정 내부에서는 윤 의사의 의거가 만약 실패하게 되면 한국인은 상해에 거주할 수 없게 되는 등 중국에서의 항일독립운동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반대가 심했다. 그때 김구가 이들을 설득하고자 재치 있게 낸 생각이 ‘의거가 실패하더라도 2개의 폭탄 중 하나는 자결용으로 쓸 것이기에 임정의 배후를 전혀 모를 것’이라고 말했고, 결국 만장일치로 동의를 얻어냈다(1932년 4월 26일). 


윤 의사가 몸에 지닌 폭탄은 물통과 도시락용 두 개였고, 실제는 모두 현장에서 사살에 사용할 의거용이었다. 하지만 의거 성공으로 던져진 폭탄은 물통용이었고, 나머지 도시락 폭탄은 재차 폭탄을 던지려던 중에 일본군에게 제압당해 미처 사용하지 못했다. 물통용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기에 지금까지도 윤봉길 의사하면 도시락폭탄으로 많이 알고 있는 것이다.


윤 의사는 그해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육군형무소에서 25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윤 부회장은 “상해의거는 중국 정부가 거사 동반자인 김구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하면서 임시정부의 활로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준 의거였다. 김구 선생 또한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독립운동의 지도자이자 거목으로 우뚝 서게끔 한 것도 상해의거였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국무위원들 사이에서는 내분이 일어났는데, 김구 혼자만이 모든 이로부터 추앙받는 천하의 영웅으로 등극한 반면 다른 국무위원들은 신상에 위험만 닥쳤기 때문이었다. 논쟁 끝에 김구가 정부의 직책을 사임하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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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의 선서문. 실제 작성은 김구 선생이 미리 작

성해왔고 윤 의사는 서명만 한 것이라는 게 윤주 부회장의 

설명이다. (제공: 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




선서식 날짜 정정, 선서문 실제 작성자는 김구윤 부회장은 윤 의사와 김구가 의거를 앞두고 만나 맹세한 선서식이 4월 26일이 아니라 ‘4월 27일’이라는 점과 선서문은 윤 의사가 직접 쓴 것이 아닌 ‘김구가 썼고, 윤 의사는 서명만 했다’는 점도 바로 잡는다고 밝혔다. 이는 언론을 통해 처음 공개하는 것이다. 워낙 거사일이 얼마 남지 않고 급박하게 돌아가는 촉박한 상황이었기에 김구가 미리 준비한 선서문과 태극기, 폭탄, 권총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는 것. 윤 부회장은 “김구는 1938년 5월 7일 조선혁명당 간부에게 피격당하면서 이후 글씨는 떨림체였다”며 “이는 선서문에서 엿볼 수 있고, 평소 윤 의사 글씨체와는 상이한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해방 직후 윤 의사 유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암장 장소를 알려준 사람은 일본여승 ‘야마모도류도’가 아니라 형무소 간수였던 일본군 ‘시게하라’라는 점도 바로 잡아야 할 점으로 꼽았다.


또한 상해의거에 중국인 ‘왕야치아오’와 조선인 ‘이화림(본명 이춘실)’이 가담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이들은 상해의거와 전혀 관련이 없고 행사장에도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도 꼽았다. 


윤 부회장은 “일부 학자들이 고증 없이 뭔가 새로운 자료를 찾아낸 것처럼 발표하면 이를 다른 사람이 인용해 발표하다보면 잘못된 정보가 세간에 알려지는 게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특히 “중국인들이 윤 의사가 자국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점을 이용해 (아무개를) 상해의거에 관여한 것처럼 말하는 허위 주장들이 난무한다”며 “이를 바로 잡아 정확한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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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3월 6일 40여명의 유해발굴대원이 일본 가나자와시에서 윤봉길 의사 유해발굴작업을 벌이고 있다. 당시 가나자와 의대생 주정

균 학생이 윤봉길 의사의 유골을 수습하고 있는 순간이다. (제공: 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




의거 90년 맞아 의미 정확히 알고 기억해야

윤 의사의 상해의거로 일본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은 현장에서 즉사했고, 일본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다, 주중일본공사 시게미쓰 등은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체포돼 오사카로 이송,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12월 19일 사형 집행으로 순국했다. 


윤 부회장은 상해의거가 테러가 아니고 전투행위이자 광복전쟁이라고 강조했다. 그 근거로는 임정 각료회의 승인을 받았고 임정 산하 특수부대(한인애국단)의 기습특공 작전이라는 것. 또한 일본 역시 홍커우공원에서 일어난 사건을 적국 특공대원의 기습공격으로 보고 즉사한 시라카와 등을 전장 수행 중 사망으로 보고 전사 처리했다는 점과 윤 의사를 군사재판을 통해 군부대 영내서 총살형을 진행했다는 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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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2일 동경만에 있는 미주리호 함상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하기 위해 일본 각료들이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훈시를 듣고 있다. 

맨앞 왼쪽에는 상해의거로 부상을 입은 시게미쓰 일본외상이 지팡이를 짚고 있는 모습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상해의거는 임시정부를 되살려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게 해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27년간 활동하도록 했고 이는 헌법에 계승하도록 했다. 만약 상해의거가 없었다면 임정은 끝났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특히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조선이 광복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게 한 것도 상해의거였다. 류큐왕국(오키나와)은 독립하지 못한 반면 조선은 카이로회담에서 장개석 총통의 주창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


특히 1945년 9월 2일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제가 항복선언문에 조인하는 현장에 한국대표단은 연합국으로 참전하지 못해 그 자리에 없었지만 윤봉길 의사의 혼은 갑판 위를 지키고 있었다. 당시 윤 의사 의거 때 중상을 입었던 시게미쓰 외상(일본대표로 참석)이 지팡이를 짚고 절름발이로 나타났다. 현장에 있던 사회자는 그 모습을 보고 “몇 년 전 상해에서 한국인 애국자(윤봉길)의 공격으로 부상을 당해 의족을 달고 나왔다”고 말해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윤 의사의 상해의거를 상기시키게 했던 것이다.


윤 부회장은 “이처럼 일본의 항복현장에 윤봉길의 혼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는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저항하고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던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한중 관계, 윤 의사 정신으로 관계증진 

1936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발행한 <구국시보(救國時報)>에서는 윤 의사를 상해보위전(上海保衛戰) 순국열사로 등재해 중국인민의 영웅으로 칭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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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가나자와 내 윤봉길 의사가 사형집행 전 마지막으로 구금됐던 구금소의 모습. 2016년 윤주 부회장이 그 현장을 방문

한 모습이다. (제공: 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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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부회장이 효창공원 내 윤봉길 의사 묘소에서 참배하고 있다.



또한 1989년 10월 상해시위당사자료정집위원회가 발행한 <상해인민혁명사화책>에는 윤 의사를 혁명가로 등재했다.


중국의 19로군 고향인 광동에서는 매년 1월 28일 19로군의 송호항전을 기념할 때마다 윤 의사 의거를 잊지 않고 함께 기념한다. 또한 매년 의거현장인 홍커우공원에서는 ‘한중 합동의거기념식’을 거행한다.


윤 부회장은 이 의거 기념식을 격상시키면 한중관계 증진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중 합동의거기념식 초반에는 중국에서 고위 관계자가 참석했지만 우리 측 인사가 무게감이 적다 보니 이후 중국 측 고위관계자도 나오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기념식에는 국회의장 또는 국무총리가 참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특히 “앞으로 있을 합동추모식에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게 된다면 중국에서도 이에 걸맞는 고위 관계자가 나올 수 있어 자연스럽게 한중관계를 좋게 끌어갈 수 있고, 나아가 이는 한반도 평화통일에도 이바지할 수 있는 자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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