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호 인물 박일흥 은율탈춤보존회 이사장 “유네스코 등재된 탈춤 후계자 양성이 중요해”

14일 전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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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흥 은율탈춤보존회 이사장

“유네스코 등재된 탈춤 후계자 양성이 중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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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율탈춤 최괄이



글·사진 이예진 사진제공 은율탈춤보존회



지난해 11월 마지막 날, 머나먼 나라 모로코에서 희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한국의 탈춤’이 등재된 것. 유네스코는 “탈춤이 강조하는 보편적 평등의 가치와 사회적 신분제에 대한 비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는 주제”라며 “각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에도 상징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에 우리나라는 22건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을 가진 나라가 됐다.


이번 유네스코에 등재된 ‘한국의 탈춤’은 국가무형문화재 13종목과 시도무형문화재 5종목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결과다. 그 가운데 은율탈춤 보유자인 박일흥 국가무형문화재 은율탈춤보존회 이사장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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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흥 은율탈춤보존회 이사장



황해도에서 시작된 은율탈춤

국가무형문화재로 등록된 은율탈춤은 황해도 은율지방에서 시작됐다. 유래로는 두가지가 전해져 온다. 약 200~300년 전 어느 반란에 사람들이 섬으로 피했다가 다시 나오면서 얼굴을 가리기 위해 탈을 썼다고 하는 유래가 있으며 또 하나는 풍수적인 유래가 있다. 당시 은율지방의 지리적인 형세가 서남쪽의 묘래산과 서쪽의 무오산으로부터 침입을 당하는 쥐의 모양을 가지고 있어 여러 가지 방책으로 마을 어귀에 인조림을 조성해 그들의 접근을 막고 탈춤으로 병이나 재난을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해 탈춤을 췄다고 하는 것이다.

 

은율탈춤은 전체 6과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양반과 파계승에 대한 풍자와 일부처첩의 삼각관계, 서민생활상 등을 내용으로 한다. 1968년 은율탈춤을 재현하기 시작해 1978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지금까지 발전·계승되어 오고 있다. 특이점은 황해도에서 시작된 이 은율탈춤의 전승지가 인천이라는 점인데 현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는 은율탈춤전수관이 있어 이곳에서 은율탈춤보존회가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 가운데 박일흥 이사장은 1972년 운명적으로 은율탈춤을 만났다. 바로 고(故) 양소운 선생을 만나게 된 것이다. 황해도 재령 출신인 양소운 선생은 중요무형문화재 봉산탈춤 예능보유자였으며 강령탈춤, 은율탈춤을 재현한 인물이다. 그리고 성인인상무, 해주검무, 서도소리 등 다방면으로 두각을 드러낸 국악인이었다. 박 이사장은 이러한 양소운 선생으로부터 직접 은율탈춤을 비롯해 강령탈춤, 서도소리, 배뱅이굿 등을 사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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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연은 박 이사장의 아버지로부터 비롯됐다. 황해도 출신의 박 이사장 부모님은 매우 엄격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1학년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이 동인천에 있는 고전 무용 학원. 아버지는 그저 숫기 없던 남학생인 박 이사장에게 사회생활에서 쓸 수 있는 재주 하나 만들어주려고 그곳에 데려갔던 것이다.


박 이사장은 “왜 왔는지 몰라도 아버지께서 아무 설명 없이 ‘잘 배워라’ 하시고 가셨다. 그곳에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전부 여자였다. 난 그저 창피해서 조용히 장구만 보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선생님이 “저녁에는 남자들도 있으니 그때 와라. 지금은 아무래도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하자 박 이사장은 냉큼 알겠다고 했다. 저녁에 다시 가보니 강령탈춤을 가르치고 있었다고. 그때부터 양소운 선생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장구부터 춤, 소리까지 하나하나 배우기를 1년. 11월 국립극장에서 있는 강령탈춤 공연에 설 준비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께서 그에게 “요즘 잘 배우고 다니냐. 어디까지 배웠냐”고 묻자 “강령탈춤 배우러 다닌다”고 답했더니 그때부터 난리가 났다. 어디 상놈이 하던 것을 배우냐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말씀은 곧 법이었지만 겨우 한 달 남은 공연에서 빠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께 겨우 부탁해 한 달 뒤에 있는 공연까지만 하는 것으로 허락을 받았다. “국립극장에 딱 서서 공연을 했는데 지금도 기억나요. 당시 선생님이 ‘절대 사람을 보지 말고 앞에 있는 조명을 봐라. 관객을 보면 다 잊어버린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진짜 관객은 하나도 안 보고 조명만 보면서 공연했어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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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아래) 양소운 선생(오른쪽)과 함께 공연하고 있는 박일흥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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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흥 은율탈춤보존회 이사장의 스승인 양소운 선생. 양소운 선생은 황해도 재령 출신으로 

중요무형문화재 봉산탈춤 예능보유자였다.




그렇게 공연을 마무리한 박 이사장은 아버지의 반대에 탈춤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더 큰 풍파가 닥쳐왔다. 그만둔 다음 해에 아버지께서 췌장암 투병을 하시게 됐고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이후 공고 3학년이 된 그는 담임선생님께 부탁해 실습을 일찍 나가면서 생계에 뛰어들었다. 어머니는 그에게 “그렇게 축 쳐져 있지 말고 활발하게 했던 탈춤을 다시 해봐라”라고 다시 권했다. 어머니의 권유로 그는 1년 만에 공연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영원한 스승 ‘양소운’

앞서 말했듯 박 이사장은 양소운 선생에게 많은 것을 사사 받았다. 국악계 종합 예술인 탈춤은 물론이고 서도소리, 배뱅이굿 등을 선생에게 배웠다. 양소운 선생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삶이 팍팍했던 그를 다시금 조용히 받아줬다.


“그만두고 1년 뒤에 다시 찾아가니 ‘그래, 잘왔다’ 하시는 거예요. 그때부터 다시 배우기 시작했는데 가만히 보니까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매달 흰 봉투를 주더라고요. 알고 보니 월사금이었죠. 당시 저는 고3 실습 나가서 받은 돈으로 동생 학비 내주기도 벅차던 때라 선생님께 ‘저는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못 드립니다. 그만두겠습니다’라고 했죠. 그랬더니 선생님이 ‘야, 너는 그냥 나와. 그냥 가르쳐줄게’ 그러시더라고요.”


그렇게 양소운 선생 밑에서 계속 배웠지만 회사를 다니면서 탈춤을 배우기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어떤 때는 한 달에 한 번 겨우 연습하러 가던 때도 있었다. 그래도 1년에 한 번씩 선생이 진행했던 공연은 섰다. 그는 “공연을 마치니까 선생님께서 모두에게 봉투를 주셨다. 출연료였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께 드리던 것도 없어서 못 받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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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무형문화재 제7호 황해도 배뱅이굿 공연 중인 박일흥 은율탈춤보존회 이사장



그렇게 회사와 공연 병행하기를 몇 년이 흘렀다. “월수금 수업이었는데 회사 잔업이다, 회식이다 하면서 많이 참석을 못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비가 억수같이 오는 연습 날이었는데 ‘에이, 이런 날은 안 나오셨겠지. 그냥 편하게 가보자’ 하면서 연습실에 갔는데 구석에 선생님 혼자 연필로 쓴 소리 책을 보시면서 계시는 거예요. 그 모습을 보는데 순간 뒤통수에서 한 대 크게 때리는 느낌을 받았죠.”


스승의 쓸쓸했던 뒷모습을 보고 ‘못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연습에 나가자’라는 마음이 든 그는 그때부터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은율탈춤에 몰입하기 시작한 것은 군대를 다녀온 후였다. 당시 은율탈춤은 1978년 국가무형문화재에 지정된후 1982년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인천을 전승지로 지정받아 1984년 은율탈춤전수관이 개관될 시기였다.


인천이 은율탈춤 전승지로 지정받은 것에는 故 장용수 선생의 덕이 컸다. 황해도 은율 출신인 그는 한국전쟁으로 인천에 내려와 故 장교헌·양소운 선생과 함께 은율탈춤을 재현하기 시작했다. 이에 은율탈춤은 1968년 재현됐으며 그때부터 인천에서 황해도의 은율탈춤을 볼 수 있게 됐다. 덕분에 은율탈춤은 복원이잘 된 탈춤 중 하나로 꼽힌다.


박일흥 이사장에게 큰 가르침을 줬던 양소운 선생은 지난 2008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받았던 이들이 모여 ‘양소운 전통예술 보존회’를 구성했다. 양소운 선생으로부터 마지막으로 서도소리를 사사 받은 박일흥 이사장이 초대 이사장 자리에 올랐다. 덕분에 생전 양소운 선생과 함께 만들던 서도소리 가사집을 완성했다. “저한테 제일 마지막으로 전수해준 것이 서도소리예요. 그때는 가사집이 없어서 선생님 소리 녹음한 것을 듣고 워드 작업하고, 그걸 선생님께 보여드리면 오타 잡아주시고. 그렇게 만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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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율탈춤 길놀이




어느덧 60 중반에 접어든 박일흥 이사장도 여러 제자를 키워냈다. 지금도 제자들을 키우고 있는 그는 가르치면서 더 양소운 선생이 기억난다. “맨날 선생님이 그랬어요. ‘야, 빨리 내 것 좀 가져가.’” 그 한마디를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이제는 이해한다. “예전에 선생님이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연습실을 오셨는데 이제 제가 그렇게 하고 있어요. 제가 그랬듯이 바람 맞는 날도 있고 한두 명 나오는 날도 있고. 이제야 선생님 마음을 알아요.”


유네스코 등재된 탈춤, 진흥법 마련돼야

탈춤이 유네스코에 등재되고 지난달 안동에서 국내 18개 탈춤단체장들이 모이는 행사가 있었다. <천의얼굴, 인류를 위한 몸짓>이라는 주제로 열린 행사는 탈춤의 발전과 세계화를 위한 논의를 위한 자리였다. 거기서 주된 내용은 ‘탈춤진흥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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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흥 이사장의

은율탈춤 보유자 인증서



박 이사장은 “우선 유네스코에 등재된 것 자체가 참 좋다. 다른 사람들도 하는 말이 ‘우리만한 예술이 없다’라고 한다. 특히 탈춤은 서민들의 애환이 담겨 있는 것”이라면서 “이번에 우리가18개 종목이 모여서 등재가 됐는데 이렇게 많은 단체가 모인 것은 처음이라고 하더라. 그것도 좋은 일”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지금 국가무형문화재가 13종목이고 시도문화재가 5종목인데 시도문화재인 곳은 아직 형편이 어렵다. 이번에 진흥법이 잘 제정돼 모두가 좋은 환경에서 우리 것을 지켜나갔으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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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004년 10월 은율탈춤전수회에서 진행하는 어린이

공연단 ‘탈사랑’팀이 체코에서 공연을 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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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흥 은율탈춤보존회 이사장

 
그는 “전통문화가 좋다고 하지만 사실 하향길에 접어든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후계자 양성”이라고 현실을 콕 집었다. 이어 “여기 전수관에서 유치원생, 초등학생 가르치면 그걸로 끝난다. 근데 진짜 이 탈춤이나 국악 같은 우리 전통을 이어가려면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는 교과에 들어가야 한다”며 “그리고 대학교에서는 탈춤과 등을 신설해서 지속적으로 후계 양성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문화재청을 향한 쓴 소리도 있었다. 각 단체마다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문화재청에서 관리를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공연 지원뿐 아니라 예술인들이 먹고 살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공연을 위한 지원비만 있어서는 예술인들이 살아가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현재 지원되는 금액으로는 공연장 대여비, 옷값, 탈 제작비로도 빠듯한 실정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박 이사장은 “탈춤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소리다. 물론 단체마다 잘하는 소리꾼이 있지만 부족한 곳이 있다면 이를 관리하는 문화재청에서 누군가를 초빙시켜줘서라도 그 단체에서 소리꾼이 나오도록 ‘문화적 지원’이 필요하다”며 “그래야 그곳의 소리가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그는 전통문화인 ‘탈춤’의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는 제도적 지원과 경제적 지원이 함께 있어야한다고 밝혔다.

또 보유자 관리도 철저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명맥을 제대로 잇기 위해서는 세대교체가 원활하게 이뤄져야 한다. 그러려면 밑에서 올라오는 전수자들이 잘 클 수 있도록 위에서는 자리를 잘 비워주는 것도 중요하다”면서 “이러한 보유자 관리를 문화재청에서 제대로 해야 한다. 법륜스님이 말씀했다. 겨울에 마른 이파리가 나무에 매달려 있으면 안 된다. 그말은 새 봄에 새싹이 나올 구멍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의미”라고 덧붙였다.

50년 가까이 우리 전통에 그는 진심이었다. 우스갯소리로 “나는 이제 그만둬야지”라면서도 우리의 것이 끊이지 않도록 그는 끊임없이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번 유네스코 등재로 탈춤에 다시 관심이 가져지게 될 것이라 기대가 됩니다. 그 기대에 부응해 관련 법이 제정되고 우리 것이 잘 유지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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