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호 기획 38선 분단

2021.09.01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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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분단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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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소련 한반도 분할 점령 38선 표지판




가수 남인수의 <가거라 38선>이라는 노래가 있다. 


“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아,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

 다 같은 고향 땅을 가고 오련만

 남북이 가로 막혀 원한 천리길

 꿈마다 너를 찾아 꿈마다 너를 찾아

 삼팔선을 탄한다”


이 노래처럼 ‘38선’이라는 글자에는 우리 민족의 한이 서려 있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국토와 민족의 분단, 가족이산이 시작된 선이며, 6·25전쟁 비극이 터진 선이요, 3년간 처절한 전쟁 후에도 휴전선으로 대체되어 여전히 우리 운명과 평화를 옥죄는 비극의 선으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38선은 어떻게 그어지게 되었을까. 


태평양전쟁의 막바지 일본의 항복

1945년 4월 30일 서방 연합군의 총공세로 막다른 길에 몰린 독일 제3제국의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했다. 카를 되니츠 독일 해군 제독이 히틀러의 통치권을 이어받아 5월 7일 서방 연합군에게 항복의사를 표명했다. 5월 8일 연합군은 독일군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이튿날 동부전선의 소련에 대해서도 항복하여 유럽 전선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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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작전(1945년 4월 1일)




미국은 소련이 동부 독일,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등의 소련 점령지역을 위성국으로 공산화하는 것을 보았다. 미국은 막강한 공업력을 가진 일본을 소련이 장악하여 아시아 태평양 지역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부상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극동에서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신도(神道) 사상으로 똘똘 뭉친 일본군은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을 막거나 지연시키고자 이오지마, 오키나와 등에서 최대한 미군 전력을 소모하게 하면서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미군은 일본 본토를 정복하여 항복을 받아내려면 얼마나 더 희생을 치러야 하며, 시일은 얼마나 더 소요될지 알 수 없었다. 


소련의 참전을 요청했다. 그러나 소련은 응하지 않고 있었다. 트루만 대통령은 미군의 시간과 희생을 줄이기 위해 비밀병기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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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미국 대통령 트루먼(Harry Truman), 마샬 장군, 국무장관 번즈(James F. Byrnes), 

아놀드 장군(Hap Arnold)(1945년 8월 백악관에서)





그때까지 미군의 참전 요청에 못들은 채하고 있던 소련은 자체적으로 항공모함과 항공기를 제작하는 공업국가 일본 분할에 참여하고 싶었다. 스탈린은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1945년 3월부터 은밀히 대일전을 준비하기 시작했었다. 4월부터 8월까지 5개월 동안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하여 소련군 병력, 장비, 물자를 극동지역으로 이동시켰다. 그런데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갑자기 일본의 항복이 눈앞에 다가왔다. 자칫 일본 분할의 희망이 물거품 되게 생겼다. 소련군은 전격적으로 8월 9일 만주의 일본 관동군에 대해 공격을 시작했다. 


미국의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은 8월 11일 “일본 항복 즉시 다렌(大連)항이나 한반도의 일개 항구를 점령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했다. 다렌항은 얄타회담에서 소련에 양보하기로 한 것인데, 소련을 적극 견제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당시 미군은 한반도로부터 960㎞ 떨어진 오키나와에 있었고 소련군은 곧 8월 12일 두만강을 넘어 웅기를, 14일에는 나진과 16일에는 청진을 점령했다. 잘못하면 소련군이 한반도 전체를 접수하고 일본까지 넘보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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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항복으로 조선총독부에서 내려지는 일장기(1945년 9월 9일)





38도선의 설정

트루먼 대통령은 1944년 11월 29일, 전시 작전의 협력과 효율을 높이고자 국무성(State Department)과 전쟁성(War Department), 해군성(Navy Department)에서 중견 엘리트 관료를 차출하여 3성 조정위원회(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를 만들어 그 첫 글자를 따서 SWNCC(swiŋk)라고 불렀다. 일본이 항복한 미국 동부시각 8월 14일 늦은 밤 3성 조정위원회(SWINK)는 소련이 점령하게 생긴 한반도에 경계선을 긋는 논의가 있었다. 조지 마셜(George Catlett Marshall) 장군이 남북 분단선 설정을 건의하도록 실무진에게 지시했다. 미 국방부 작전국 정책과장 찰스 본스틸 대령과 국무성 딘 러스크(David Dean Rusk) 대령이 옆방으로 자리를 옮겨 네셔널 지오그래픽 지도 한 장을 놓고 서울과 인천을 확보하는 북쪽에 편리한 경계선을 찾았다. 그러나 강이나 산맥 등 자연적인 경계가 될 수 있는 선

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러스크 등 실무진은 북위 38도선을 건의하기로 결정했다. 38선은 경기도 연천과 강원도 화천, 철원, 인제, 양양, 고성군이 북한에 속하고, 황해도 옹진반도와 연백군, 경기도 개성이 남한에 속하게 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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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남북 분단선 설정을 건의하도록 실무진에게 지시한 조지 마셜 장군. 38선 획정의 실무진 찰스 에치치 본스틸 3세(Charles H. Bonesteel III) 

후에 주한미군사령관으로 옴. 38선 획정의 실무진이었던 딘 러스크(Dean_Rusk).




국무부, 국방부, 해군 협의회(SWINK)는 실무진 건의를 별다른 이의 없이 받아들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 상황에 대해 자신의 <해리 에스 트루먼 회고록(Memoirs by Harry S. Truman, 1955)>에서 이렇게 밝혔다. 


“내가 듣기로는 번즈 국무장관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 멀리 한반도의 북쪽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도록 선을 그으라고 국방부 작전국 정책과에 건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육군은 한반도에서 먼 거리와 병력 부족이라는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에 직면하고 있었다.


따라서 (먼저 한반도에 진입하는 쪽에서 한반도의 일본군 항복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소련이 이의를 제기할 경우, 우리가 실제로 병력을 파견하기

에는 38도선도 사실은 너무 멀리 잡은 것이었다. 소련이 이의를 제기해서 우리가 실제로 병력을 제 때에 보낼 수 있는 거리에다 선을 그어야 했다면, 그 선은 38도선보다도 훨씬 남쪽에 그어졌을 것이다. 북위 38도선을 따라 군부가 선을 그었기 때문에 우리는 조선의 옛 수도 서울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놀랍게도 소련이 38도선 분할을 이의 없이 받아들였다. 미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이 38도선을 넘어 진출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소련군은 38도선을 넘지 않았고, 38도선 이남으로 내려왔던 일부 부대도 합의에 따라 38도선 이북으로 철수했다. 소련이 이의 없이 38선을 받아들은 것은 러일전쟁으로 빼앗긴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 만주 철도 이권, 외몽골의 확보와, 일본 본토 분할을 원하여 미국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동서냉전의 시작

1945년 9월 12일부터 런던에서 미국, 영국, 중국, 소련, 프랑스의 전승국 외상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이 충돌했다. 미국은 소련이 동유럽국가들을 위성국가로 만든 것은 얄타회담 합의를 위반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소련은 미국이 이탈리아와 일본을 독점하려고 한다고 항의했다. 소련은 일본 점령 및 통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겠다고 했다.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이 회담을 결정적인 계기로 스탈린은 미국과의 협조관계에서 경쟁관계로 나아갈 결심을 하여 동서냉전이 시작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 대해서는 신탁통치를 거쳐 독립시킨다는 합의가 있었으므로 북위 38도선이 분단선으로 의도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조기항복으로 긴박하게 미군과 소련군 사이에 점령지역에 대한 합의가 필요했기 때문에 설정된 군사관할 경계선에 불과했다. 그러나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단순한 경계선에 불과했던 38도선은 처음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반영구적인 분단선으로 그 성격이 바뀌어 갔다. 


편의상 그은 선이 영구분단선으로 

미군도 한국 진주 직후 38선을 어떻게 관리할지 뚜렷한 지침을 갖지 못했다. 하지 사령관은 1945년 9월 18일 다음과 같은 담화문을 발표했다. 


“북위 38도를 중심으로 북은 소련이, 남은 미군이 각각 진주해 있는데 이 사실이 언제까지 계속될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다. 이 문제는 군문에 있는 나보다는 미국 워싱턴 외무성에 직접 관계되고 있으므로 태평양 방면에서 역전을 한 사람은 이를 알 수 없다.”


- <매일신보> 1945년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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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밭을 가로지르는 38선 (국가기록원 사진)




38선으로 남북이 갈라지니 당장 우편과 통신의 문제, 남북 간의 물자 교환, 자유로운 왕래 등이 문제가 되었다. 남북 간 우편물 교환은 대략 2주에 1회씩 1947년 1월 11일까지 20차례나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1946년 5월 초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어 무기정회에 들어가자 미군정은 38선을 차단하여 사람과 물자의 통행을 막았다. 남북의 평야지대가 이어져 있어 인구가 조밀한 황해도-경기도의 앞바다에서는 밀수가 성행했다. 만주에서 귀국길에 오른 일본인들도 절박했다. 꼭 38선을 넘어야 할 사람들은 큰돈을 내고 배를 탔다. 이리하여 황해도와 강원도 연안 38선 접경지대에는 매일 수많은 선박이 감시의 눈을 피하여 사람과 화물을 실어 날랐다. 


미군은 1947년 4월 들어 38선을 넘어오는 사람들을 모두 체포하여 38선 접경에 설치한 수용소에 수용하였다가 방역과 신분 조사가 끝나야만 내놓았다. 


점차 38선은 국경선처럼 되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공산정권을 피하여 북쪽에서 남쪽으로 넘어오는 사람이 하루 수천 명으로 늘어갔다. 월남하려는 북한 주민들은 북한 내 적당한 장소로 이동 신청을 하여 해주 근방에 와서 머물러 있다가 기회를 보아 38선을 넘었다. 


도중에 경비대원이나 보안서원에게 붙들리면 이것저것 팔아서 가져온 전 재산을 다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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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과 휴전선의 비교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북한에서는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설립되었다. 김일성은 즉시 토지개혁에 착수하여 3월말

까지 완료하고, 8월까지 전 산업의 90% 이상을 국유화했다. 


한편 미국은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소련과의 합의를 통해 통일정권을 세우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였다. 유엔은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소련과 북한이 이를 거부하였다. 하는 수 없이 1948년 5월 10일 유엔 감시 하에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먼저 건국 작업을 시작하여 완성해 놓고 있던 북한은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남과 북에 각각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한 잠정적 경계선이었던 38도선은 더욱 반영구적인 분단선이 되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38선 일대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이 1953년 7월에 끝난 후 남북 상호 깊은 불신과 적대감을 남긴 채 휴전선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한민족을 가르는 분단선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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