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호 칼럼 길상사 이야기Ⅰ

2024.04.20 글마루
0 112


길상사 이야기Ⅰ 


글 이정은


14b9f014abd4d302d5dd8eeb8f32ffe0_1713623443_7732.jpg

서울 성북동 길상사


14b9f014abd4d302d5dd8eeb8f32ffe0_1713623443_8383.jpg

서울 성북동 요리집 대원각



성북동 길상사

길상사는 서울의 북악산 동쪽 자락 성북동(성북구 선잠로 5길 68)에 있는 절이다. 절은 최근이라 할 수 있는 1997년에 세워져 역사는 짧으나, 이 절이 있기까지의 이야기는 한국 현대사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사상 등에 걸쳐 그 곡절이 길고도 깊다.


성북동은 북악산 줄기에 감싸인 수려한 풍광으로 외국 대사관들과 부호들의 저택이 많다. 길상사 역시 아름다운 경관의 집터로, 한때는 부호의 별장이었고 그 후에는 대원각(大苑閣)이라는 서울 3대 최고급 요정이 되었다. 요정은 값비싼 요리와 기생, 음주 가무, 권력과 이권에다 욕정이 이글거리는 곳이다. 그런 탐욕과 환락의 장소가 길상사라는 절이 됨으로써 수양과 깨달음의 도량이 된 것이다. 이것은 요정 대원각을 운영하며 재산을 모은 김영한(金英韓, 1917~1999)이라는 여성이 법정스님(法頂)에게 7000여 평의 대지와 40여 채의 건물을 통째로 시주하여 이루어진 일이다.




14b9f014abd4d302d5dd8eeb8f32ffe0_1713623443_9002.jpg

김영한. 기생명 김진향

(출처: 문학동네)


14b9f014abd4d302d5dd8eeb8f32ffe0_1713623443_9892.jpg

법정스님(오른쪽)이 생전에 머물던 송광사 불일암 툇마루에 맏상좌 덕조스님과 앉아 있다. 암자 모퉁이에 

법정스님이 장작으로 직접 만든 빠삐용 의자가 놓여 있다.(사진: 덕조스님)



법정스님

먼저 김영한이 큰 재산을 선뜻 내 놓은 법정스님은 어떤 사람인가? 전남 해남 출신, 훤칠한 키에 미남인 법정스님(法頂)은 속명이 박재철(朴在喆)로 1970년대 민주화 운동에도 참여한 ‘운동권’ 스님이었다. 그러나 1974년 인혁당 사건을 겪으면서 사회변혁과 불승의 길 사이에서 갈등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정부 시절이었다.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박해를 받을 때마다 증오심이 치솟아 올랐다.


그는 이 증오심이 불승으로서 수행에 발목을 잡는 것을 느꼈다. 민주화 운동을 접었다. 전남 순천의 송광사로 내려갔다. 송광사 뒤편 조계산 자락에 여수·순천 반란사건과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의 도량터가 있었다.


법정스님은 그 터에 기와를 올린 3칸 암자를 지어 ‘불일암(佛日庵)’이라 이름하고 그곳에서 수행에 들어갔다. 세상은 돈과 권력, 기름지고 비만한 삶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이듬해 법정스님은 3칸 암자에서 최소한의 것으로 생활하며 느끼고 생각한 기름기 없는 여윈 삶을 담은 산문집 <무소유(1976)>를 냈다. 돈과 권력이면 다 된다는 세상 조류와 다른 삶의 길을 몸소 보여 주었다. 송광사에 ‘선 수련회’를 만들어 산사의 수행법을 대중들에게 전했다. 그것이 일반인이 절 생활을 체험하는 템플스테이의 원조가 됐다.



14b9f014abd4d302d5dd8eeb8f32ffe0_1713623444_0513.jpg

법정스님




법정스님은 <무소유> 외에도 글과 여러 저서로 유명해졌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불일암 생활 17년째가 되던 1992년 법정스님은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산골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그리고선 법회 때나 산에서 내려왔다. 그가 어디에 사는지는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이후 자신의 오두막 생활을 소개한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1995)>를 냈다. 그는 이 책에서 산골 오두막 삶의 생각을 나누었다.


싸리꽃만 하더라도 산골 어디를 가나 지천으로 피어 있어 지나치기 일쑤인데, 걸음을 멈추고 유심히 살펴보면 홍자색을 띠어 좀 쓸쓸하게 보이는 꽃에 가을의 입김이 배어 있다. 싸리비로 마당을 쓸 때 그 가지에 달렸을 꽃을 생각한다면 뜰에 싸리꽃 향기가 번지지 않을까 싶다.(<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p.64)


이런 산골 오두막 수도자의 삶에서 우러난 사유가 청량제처럼 대중에게 울림을 주었다. 그는 승려이자 <월간 샘터>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수필가로서, 또는 번역가로서 이름을 높이게 되었다. 그의 책은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1999년에는 <오두막 편지(1999)>를 냈다.


김영한은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았다. 1987년 김영한이 미국에 체류하고 있었을 때 법정스님이 설법차 LA에 들렀다. 김영한이 법정스님을 만나 “대원각을 시주하겠으니 받아달라”고 했다. 법정스님은 대지 7000여 평에 건물 40여 채, 당시 시가 1000억 원이나 되는 큰 재산을 받으려하지 않았다. 김영한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법정스님은 줄곧 시주를 받을 수 없다고 8년 동안 사양하다가 1995년 마침내 청을 받아들였다. 대원각을 법정스님의 출가 본사인 순천의 조계종 송광사의 말사로 등록했다.



14b9f014abd4d302d5dd8eeb8f32ffe0_1713623444_1156.jpg

순천 조계산 송광사


14b9f014abd4d302d5dd8eeb8f32ffe0_1713623444_1802.jpg

조선권번 예기양성소의 가곡반 졸업생 사진(1938년 10월 16일)



법정스님은 1994년 3월 26일 강원도 원주의 치악산 자락 구룡사에서 사회운동을 시작했었다. 마음을 닦고, 봉사하는 ‘맑고 향기롭게’라는 이름의 대중운동이었다. 1997년 기증받은 대원각을 ‘맑고 향기롭게’ 모임의 근본도량으로 삼고 이름을 길상사(吉祥寺)로 바꾸어 12월 14일 창건 법회를 열었다. 길상사 창건 법회 날 김영한은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하나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2년 뒤인 1999년 11월 14일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82세의 김영한은 목욕재계하고, 절에 와서 참배하고 길상사 안의 길상헌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 김영한의 유골은 49재 후 유언에 따라 눈이 오는 날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 유골이 뿌려진 자리에는 조그만 돌로 소박한 공덕비를 세우고 매년 음력 10월 7일 기재를 지낸다.


김영한과 스승 하규일

대지 7000여 평에 당시 싯가 1000억대 재산을 선뜻 시주한 김영한은 1917년 1월 18일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났다. 어버지를 일찍 여의어 홀어머니와 할머니 손에 자랐다. 미모가 남달랐고, 재능이 있었던 김영한은 17살 때 여창명인(女唱名人) 김수정의 안내로 조선권번 정악전습소 학감인 금하(琴下) 하규일(河圭一, 1867~1937)의 넷째 양녀로 들어갔다.


하규일의 집안은 대대로 조선 전통의 가곡을 잘하여 이름이 높았다. 작은 아버지 하준권(河俊權, 본명 하중곤, 河仲鯤)은 조선말의 박효관(朴孝寬)과 쌍벽을 이루는 가객이었다. 하규일은 철종 14(1863)년(혹은 1867(고종 4년) 음력 6월 1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6세부터 11년간 집에서 한학을 익히면서, 작은아버지 하준권으로부터 가곡을 배웠다. 19살 때부터는 하준권의 제자 최수보(崔守甫)를 스승으로 모시고 본격적인 음악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14b9f014abd4d302d5dd8eeb8f32ffe0_1713623444_2479.jpg 

하규일



가곡 명창이며 <가곡원류>를 지은 박효관에게서도 가곡을 배웠다. 그는 나쁜 성대를 가졌으나 피나는 노력으로 성대를 바로잡고 근세 가곡의 거장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한다. 명창 하순일(河順一)은 그의 사촌이다.


선생 하규일은 1901년 한성소윤(漢城少尹) 겸 한성 재판소 판사로 있었고, 1909년 내장원 문교 정리위원(內藏院 文敎整理委員), 전남 독쇄관(督刷官), 1910년 진안군수(鎭安郡守) 등을 역임한 관료이기도 했다. 1910년 한일병합 조약으로 나라가 망하자 관직을 내던졌다. 그는 국악 전승사업을 위하여 1911년 정악전습소(正樂傳習所:調陽俱樂部)의 학감으로 취임하여 함재운(咸在韻), 명완벽(明完璧), 김인식(金仁湜) 등과 함께 국악의 연주·교육·편찬 등으로 활약하였다. 한편 당시 궁중과 상류층의 음악인 정악(正樂)1)의 명인들로 구성된 수요회(水曜會)를 조직하여 연주회를 열었다.


조선총독부 하에서 대한제국 황실이 격하된 이왕가(李王家)와 관련한 일체 사무를 담당하던 이왕직(李王職)에 아악부(雅樂部)가 있었다. 아악부의 아악사 김영제(金寧濟)·함화진(咸和鎭)이 조선의 가곡, 가사(歌詞), 시조(時調), 정가(正歌) 등 전통 가악(歌樂)을 보존하여 이어갈 수 있게 하규일을 이왕직 아악부 촉탁으로 임명할 것을 건의했다.


하규일은 그리하여 1926년 4월부터 아악부 젊은 연주직과 아악생(雅樂生)들에게 가곡을 가르치게 되었다. 하규일은 이때로부터 1937년 5월 22일 향년 75세로

서거할 때까지 12년간 매일 아악부에서 하루 두시간씩 열강을 했다. 그의 강의는 엄격하기로 유명하였다. 그리하여 길러낸 남창이 아악부원 양성소 출신만도 거의 60명에 이르고, 여창으로는 정악 전습소 다동 여악분교실로 시작하여 다동조합, 대동권번, 조선권번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여제자를 배출하였다.



정악(正樂)1)

세종 때 박연이 정비한 정악은 중국계 아악을 정비한 음악이었으나, 이 시기 박효관(朴孝寬)의 <가곡원류> 발문(跋文)에서 “무릇 노래를 읊는 풍도는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소리 또한 바르지 못할지니……그 정음(正音)의 인멸을 개탄하여 마지않는다.”라고 한 정악은 우리나라 전통 가곡을 가리킨 것이고, 정악유지회나 조선정악전습소의 그 정악은 민요나 잡가가 아닌 가곡·영산회상·여민락 등 당시 지식층에서 즐기고 배우던 전통음악을 뜻한다.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아악 또는 정악의 개념은 동일한 내용의 음악, 즉 전통적인 향악(鄕樂)을 가리킨다.



14b9f014abd4d302d5dd8eeb8f32ffe0_1713623444_3042.jpg

궁중무 춘앵전을 추고 있는 18세의 김진향(본명 김영한, 별명 김자야, 장발 화백이 그린 1930년대 엽서)



기생은 오늘날 인식과 달리 약방기생(藥房妓生), 상방기생(尙房妓生)이니 하는 궁중의 특수 여성 직종이었다. 이런 여성들이 그런 일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것, 글씨와 그림 그리는 가무서화(歌舞書畵)를 배우고 익혀 궁중에 잔치가 있으면 가무(歌舞)로 봉사하였다. 그런데 고종(高宗) 말기에 여러 옛 제도들이 혁파되면서 기생들이 궁중을 나오게 되었다. 그중 일부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나머지 기녀들은 서울에 남아서 기생 업(妓業)을 차리게 되었다. 이때 하규일은 지아비(남편)가 없는 이른바 무부기(無夫妓)를 모아 서울의 중부(中部) 상다동(上茶洞)에 무부기조합을 만들어 정악전습소 여악 분교실이라 하고 분교실장을 겸하였다. 이것이 기생조합의 시초였다. 기생조합은 얼마 후일 본식 권번(券番)으로 이름이 바뀌어, 처음에는 대정권번(大正券番)이었다가 뒷날 조선권번(朝鮮券番)으로 바뀌었다.


대정권번의 기생 수업은 20여 명 정도 단위로 이루어졌는데 이왕직 아악부의 하규일과 악사 11명이 기생들을 가르쳤다. 학습은 대개 아침 10시부터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학생들 중 노래와 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만이 하규일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기생들은 각자 자기의 특성에 맞추어 가야금, 거문고, 양금 등을 배웠다.


김영한은 그런 하규일의 양녀가 되어 그의 지도하에서 3년 동안 조선권번에서 정가를 비롯하여 여러 장르의 가무를 배워 진향(眞香)이란 이름의 기생이 되었다. 진향은 빼어난 인물과 춤, 춤 중에도 무산향, 검무를 잘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궁중 대잔치 때 화문석 하나만 깔고 기생 한 사람이 그 위에서 주악에 맞춰 지극히 절제된 동작으로 추는 춘앵무는 그녀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잡지 <삼천리>에 수필을 발표하여 문학 기생으로도 이름을 떨쳤다.







Comments

  1. 등록된 코멘트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