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호 칼럼 크라이스트처치 ‘리틀턴 터널’의 비화

2022.06.29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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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이스트처치

‘리틀턴 터널’의 비화祕話 

Lyttelton Tunnel                 


박춘태(중국 북경화지아대학교 기업관리대학 교수)


크라이스트처치 중심가에서 20분 남짓 자동차로 가면 작은 항구가 나타난다. 바로 ‘리틀턴 항구(Lyttelton Harbour)’다. 얼핏 들으면 ‘리틀(lyttel)’이라는 발음이 ‘리틀(little)’과 비슷하기에 뜻 자체를 ‘작은’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 ‘작은 항구’라고 연상할 수 있다. 이 항구는 뉴질랜드 이민 초기 때 영국인들이 개척한 항구로 영국·

영국인의 정신과 역사가 깃들어 있다. 


1850년 12월 당시 영국은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쌩쌩’부는 강풍이 지속됐다. 영국 사람들이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생활고 및 지독한 추위와의 싸움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자연적으로 너무 춥지도 않고 너무 덥지도 않은 따뜻한 날씨를 가진 나라를 동경하게 되었다. 그 즈음 영국 캔터베리 협회(Canterbury Association)에서는 처음으로 뉴질랜드로 오는 영국인 이민자를 모집했다. 이민 희망자들은 영국 각지에서 모여들었는데 그들이 이민선에 실은 것은 먹을 양식, 옷가지, 각종 도구 등 무거운 짐은 물론 기르던 말과 소, 양까지도 같이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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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턴 항구



영국을 떠나 뉴질랜드로 오는 여정은 쉽지 않았다. 특히 한 겨울 내내 바다에서 넘실거리는 큰 폭의 파도 및 칼바람으로 무장한 맹추위와 싸우는 일은 상상을 초월했다. 밤에 부는 강풍에 이민자들은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으며 난방이라곤 전혀 돼 있지 않아서 서로가 부둥켜안고 밤을 지새우는 일도 많았다. 긴 여정 끝에 도착한 곳은 뉴질랜드 남섬 크라이스트처치 근교에 위치한 ‘리틀턴’이라는 마을이었다. 


즐비하게 늘어선 높고 낮은 언덕들, 바다를 배경으로 언덕을 둥글게 감싸고 있는 모습, 평지라고는 거의 볼 수 없는 풍광, 겨울임에도 여름처럼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씨, 연한 파랑색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바다색깔 등은 영국인 이민자들에게 설렘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들은 곧 ‘개척’이라는 크나큰 과제 해결에 직면하게 된다. 우선 정착하기 위해 싣고 온 짐들을 크라이스트처치 일대로 이동하는 데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길이 없는 곳이 많았다. 그러한 곳에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했고, 아울러 가축과 함께 가파른 언덕과 험준한 고개를 넘어서는 일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더욱이 겨울에 내린 서리에다가 험준한 고개를 넘을 수 없는 무거운 짐들을 나르는 경우는 더욱 큰 난관이었다. 고개 중간에서 짐을 운반하던 가축도 사람도 멈추기를 반복하며 쉬어야만 했다. 게다가 연이어 들이닥친 이민자들의 증가로 짐의 양은 늘어만 갔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통로를 여러 군데 건설해야만 했다. 하지만 여전히 가파른 고개를 넘어야 했기에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또 건설된 통로라 하더라도 겨울 서리 때문에 이용할 수 없는 경우도 있어서 다른 통로를 이용해야 했다. 새로운 대안이 필요했다. 주위에 나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가지고 간 도구·공구를 사용하여 작은 배를 만들기로 한다. 


하루 종일 배 만들기에 몰두한 결과 드디어 일주일 만에 작은 배 한척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배는 완성했는데 이번에는 또 다른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작은 배에 실린 무거운 짐들이 해변과 해변 사이의 좁은 해로를 통과해야 하는데 그것이 문제였다. 이 해로는 폭이 좁고 수심이 얕아서 불안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밀물이 들어오고 썰물이 빠져나가는 시간 등을 고려해야 했다. 이와 같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히스코트(Heathcote)’라는 강 하구까지 무거운 짐들을 운반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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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턴 항구 



거기서부터 그들이 정착할 크라이스트처치 일대 평원까지는 비교적 쉽게 운반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구와 평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수시로 변화가 심했다. 때로는 더운 바람이었다가 어느 새 찬바람과 마주쳐야 했다. 이렇듯 변덕이 심한 날씨 때문에 사람이든 가축이든 쉽게 감기에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아울러 배로 짐을 나르는 것에도 이미 지친 상태였다.


1851년 이민자들 중 몇몇 대표가 이러한 점에 착안해 리틀턴에서 내륙 평원까지 접근성 문제 해결을 주제로 치열한 토론을 한다. 다시 말하면 리틀턴 항구에서 크라이스트처치 시내까지 가장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여러 방안 중에서 터널 건설을 가장 타당한 방안으로 채택한다. 영국에서 이미 터널을 경험한 적이 있는 그들은 터널 건설이 지름길을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터널의 일반적인 환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터널 안은 시원하지만 터널 밖은 다를 수가 있다. 터널 안에서 느끼는 서늘함은 그 안에서 이동하는 데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터널 밖으로 나오자마자 더운 바람 또는 찬바람과 맞닥뜨릴 수 있다는 점이다. 


운송 수단이 주로 말 또는 소가 끄는 수레이기에 이러한 온도 변화에서는 말 또는 소가 감기에 쉽게 걸릴 수 있다는 점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결국 터널 건설을 중단하게 된다. 그 당시 상황으로 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후 말이나 소를 대신한 물류 수송에 대한 논의를 지속적으로 하게 된다.  1861년 6월까지 10여 년에 걸쳐 이뤄 낸 결과가 ‘기차 터널 건설’이다. 이민자 중에 기차 터널 관련 전문가가 없었기에 1861년 7월 영국에서 기술자들이 도착한다.

 

드디어 1867년 11월, 물류 수송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바로 ‘무어하우스(Moorhouse) 터널’이라는 기차 터널의 등장이다. 2.7㎞에 달하는 리틀턴과 크라이스트처치 시내를 잇는 철도 노선이다. 이후 자동차의 도입으로 1920년에 ‘Christchurch-Lyttelton Tunnel Road League’가 결성돼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터널 건설이 논의된다.

 

1851년에 중단된 리틀턴 터널은 100년 후인 1961년에 뉴질랜드 회사인 ‘플레처 건설(Fletcher Construction)’과 미국 회사인 ‘카이저 건설(Kaiser Engineers and Constructors)’에 공동 낙찰된다. 그리하여 그해 9월부터 공사가 시작돼 1964년 2월 27일 개통식이 열린다. 개통 당시 20센트의 통행료가 징수되었는데 1979년 4월 1일부로 통행료가 폐지되었다. 개통 15년 만의 일이다. 리틀턴 터널의 길이가 무려 1970m로 현재 뉴질랜드에서 2번째 긴 터널이다. 터널을 이용하는 자동차 수도 늘어나 하루 1만여 대에 이르고 있으며 제한속도는 시속 5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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