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호 칼럼 안 ANZAC 작군과 안 ANZAC DAY 작데이의 유래
안작군과 안작데이의 유래
ANZAC ANZAC DAY
글 박춘태(중국 북경화지아대학교 기업관리대학 교수)
인류의 역사를 흔히 전쟁의 역사라 부른다. 그 규모가 크든 작든 간에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강대국 간의 충돌이나 전쟁에 있어서 승자는 확고한 자리매김을 했다. 때로는 세계를 호령하기도 했으며, 지배 세력으로 군림하면서 국민들로부터는 뜨거운 추앙을 받았다. 전쟁을 하는 명분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자원을 확보한다거나 영토를 확장 또는 획득하거나 실리 추구, 갈등 해결 등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단순히 정의 자체만을 위해 무모하게 전쟁을 하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전쟁에서는 반드시 이기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 예로부터 상대측에 선전포고라는 요식 행위를 해 왔는데 이를 통해 판단할 수 있는 점은 전쟁을 선포하는 측이 상대측에 비해 막강한 우위 전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을 선포하는 측이 기습 공격을 하는 수밖에 없다. 전쟁에서의 참전국들을 보면 인접국가 외에 직접적으로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은 나라까지도 참전한다. 그래서 참전국들이 마치 거대한 블랙홀처럼 변하기도 한다.
제1차 세계대전도 마찬가지였다. 전쟁터 주변에 있는 나라는 물론, 지리적으로 먼 거리에 위치해 있던 나라들까지 참전해야 된다는 분위기를 만듦으로 인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참전을 결정하였다.
1914년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했다.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전쟁이 시작되기 불과 1달 전, 1914년 6월 28일 유고슬라비아의 사라예보에서 발생한 암살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당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라는 사람이 오스트리아 및 헝가리의 왕위를 승계 받으려 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이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가브릴로 프린치프’라는 극우파 민족주의자가 있었다. 그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워 이를 실행하는 데 성공한다.
이 사건의 발발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동맹국은 사건 발생 한 달 후에 세르비아를 침공했다. 세르비아를 침공한 데 대해 가장 격분한 나라가러시아다. 러시아는 군 동원령을 내려 러시아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로 진격하기에 이른다,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약 4년 동안 진행됐다. 당시뉴질랜드 인구는 100만 명에 불과했는데, 이 전쟁에 1만 4000명을 파견한다. 뉴질랜드군이 치른 가장 치열하고 최악의 전투가 있다. 호주-뉴질랜드 연합군(ANZAC)을 비롯한 영 연방군과 프랑스군을 합쳐 7만 5000명이 오스만군에 맞
서 펼친 터키의 ‘갈리폴리Gallipoli) 전투’다.
터키 방어선을 향해 돌격하는 호주·뉴질랜드 안작군
1915년 뉴질랜드는 호주와 연합하여 호주·뉴질랜드 연합군(ANZAC= 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을 형성한다. 이를 ‘안작군(ANZAC)’이라 불렀다. 그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 영연방 연합군의 일원으로 자신만만하게 전선으로 향했다. 낯선 환경에다가 잘 알지도 못하는 지리적으로 먼 터키의 갈리폴리(현재 ‘겔리
볼루’ 지역)에 가게 되었다.
문제는 참전하는 젊은 뉴질랜드 군인들이 전쟁의 무서움, 전쟁의 잔인함을 한 번도 체험한 적이 없었다는 데 있었다. 전쟁의 무서움을 시나브로 잊어버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집트 카이로에 집결하여 상륙 훈련을 몇 차례 받기는 했지만 전선에 투입된 적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실전 감각이 없었다. 그래서 전쟁에서 필연적인 살육과 파괴마저 추상적으로 그리고 있었다.
앞서 영국은 당시 세계 최강의 전투함이라 불리는 퀸 엘리자베스호를 보유하고 있었다. 윈스턴처칠(Winston Churchill)이 영국 해군성 장관으로 해군 최고의 작전 지휘권자였다. 그의 목표는항공모함 HMS 아크로열, 전함 HMS 퀸 엘리자베스, 영국 전함 HMS 이리지스터블과 HMS 인플렉서블 및 순양함 수십 척 그리고 대규모 수송선으로 오스만군의 외곽 요새인 갈리폴리 반도를 점령함에 있었다. 갈리폴리 점령에 큰 의의를두는 것은 흑해에서 지중해로 빠져나오는 전략적 요충지라는 점과 터키 전체를 점령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난제를 해결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갈리폴리 전투는 이런 관점에서 시작됐다. 그를비롯한 지휘부는 함대를 편성하여 공격 시기, 다르다넬스 해협 돌파 작전, 이스탄불을 거쳐 터키를 점령하는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처칠의 작전 계획은 오스만군의 요새를 우습게 본 단순하고 비현실적이며 무모한 계획이었다. 현장 지휘관들이 처칠의 무모한 계획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했지만 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갈리폴리 해안 절벽에 설치된 ANZAC 소속의 뉴질랜드군 야전 캠프
처칠은 갈리폴리 반도 점령 작전에 처음부터 육군의 참여를 무시하였다. 영국 해군의 화력만으로도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만용을 부렸다. 때문에 처음부터 난항을 겪었다. 제1차 공격 개시후 1주일 동안 영국 전함 3척이 격침되었으며 많은 순양함이 요새포에 맞아 만신창이가 되다시피 했다. 제2차 공격에서는 함정 16척 중 5척을잃는 패배를 당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무모한전술을 펼친 처칠이 패전 책임을 지고 작전 지휘권자에서 물러났다. 애초 점령하기로 한 목표 지역은 고지대인데다가 가파른 절벽, 기상 악화, 오스만군이 몰래 설치해놓은 기뢰 등 난제가 있어군인들이 대규모로 상륙하기에는 최악의 조건이라 할 수 있었다. 가파른 고지를 기어 올라가 점령하여야 했으며, 이러한 돌격 부대를 지원할 기갑 장비나 항공 전력은 전무하였다.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1915년 3월 19일 새벽, 동틀 무렵이었다. 온 사방이 고요했다. 이 시각이 공격의 최적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기다렸다는 듯 영국과 프랑스가 이끄는 연합함대가 갈리폴리의 요새를 맹공격했다. 하지만 오스만군은 이미 참호를 구축하고 주변을 철조망으로 봉쇄했으며 기관총, 대포 등으로 요새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다. 방어망은 견고했다. 오스만군의 사령관인 잔더스 장군과 실질적 지휘관인 무스타파 케말 대령이 이끄는 오스만군은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맞서 격렬히 저항했다.
오스만군은 고지대 참호에서 저지대를 향해 공격하는 반면, 연합군은 저지대에서 고지대를 향해 전투를 하였다. 오스만군은 지형적으로도 유리한 지점에서 전투를 하는데다가 그들의 대포와 기관총 세례는 가히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얼마나 막강했던지 연합군 병사들이 무참하게 죽어나가면서 무려 8개월 동안 상륙지점에만 고립하도록 만들었다. 거의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다.
매년 4월 25일 뉴질랜드에서 호주와 뉴질랜드연합군을 추모하는 안작 데이를 기념해 퍼레이드가 펼쳐지고 있는 모습.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은 끊임없이 병력을 지원했다. 밤낮없이 전개되는 치열한 참호전이 매일 이어졌다. 그러나 참호를 점령하기는 커녕 절벽을 점령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여전히 연합군은 해안 상륙지점에 발이 묶여야 했으며,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1마일도 전진할 수 없었다.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식수도 구할 수 없어 이집트에서 배편으로 공급해야 할 정도였다.
오스만 제19사단을 지휘하던 무스파타 케말(Mustafa Kemal)
걷잡을 수 없는 위기 상황이 전개되자 영국은 뉴질랜드와 호주에 연합국에 가담해 주기를 요청한다. 드디어 1915년 4월 25일 06시. 호주·뉴질랜드 연합군(ANZAC) 1만 6000여 명이 갈리폴리 반도에 도착한다. 도착과 동시에 오스만군에맞서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그들은 어떠한 전투경험도 없었다. 이 상륙 전투가 그들 인생의 첫번째 전투였다. 여전히 지휘부는 종전 작전 그대로 적용하고 있었다. 수많은 병사들은 한마디의외마디도 지르지 못하고 하염없이 쓰러져 갔다.
뉴질랜드군의 사상자는 7500명에 달했다. 그중 2700여 명이 전사하고 48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1916년 1월에 갈리폴리 전투는 막을 내렸다.‘갈리폴리 전투’는 최악의 전투였으며 오욕의 전투였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선지휘관들의 비체계적인 전략전술, 무모한 계획에다가 안이하게 대처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대가는 엄청났다. 약 8개월에 걸친 전투에서 호주· 뉴질랜드군을 포함, 연합군의 사상자는 25만200명에 달했다.
매년 4월 25일이 되면 뉴질랜드인들은 가슴에 붉은 꽃을 달고 다닌다. 꽃의 이름을 ‘안작 붉은양귀비 꽃(Anzac Red Poppy)’이라고 하는데,제1차 세계대전 후에 전장에서 피어난 첫 번째꽃이라고 한다. 4월 25일을 뉴질랜드에서 안작데이(ANZAC DAY)라 부르는데, 1915년에 제1차 세계대전 중 터키의 갈리폴리 전투에 참전해
큰 피해를 입었던 호주와 뉴질랜드연합군을 추모하는 날로 시작되었다.
새벽 동틀 때쯤 추모행사를 하는데, 새벽에 가장 많은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빨간 양귀비 꽃잎을 가슴에 패용하는 까닭은 양귀비 꽃의 붉은 빛깔이 피와 생명을 상징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양귀비 꽃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 전쟁터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야생화이다. 현재 안작데이는 1,2차 세계대전과 한국 및 베트남 전쟁을 포함해 최근까지 뉴질랜드가 참전했던 군인들과 전사자들을 기리는 날로 바뀌었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보여 주듯 위정자의 무모한판단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시사해 준다. 뉴질랜드는 국가정체성 측면에서 안작 데이를 패배, 추모로만 국한하지 않고 뉴질랜드 군인들의 용기와 헌신 등을 부각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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