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호 칼럼 개혁운동의 상징 세제션관

2023.06.22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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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운동의 상징

세제션관 



글·사진 임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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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제션관의 측면 모습으로 클림트의 장식 문양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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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제션관 전경


오스트리아 빈에 위치한 세제션관은 국립 빈 예술아카데미 원장이었던 오토 바그너의 제자 조셉프 마리아 울브리히가 설계한 건물이다. 당시 세제션운동의 열기를 한껏 증명해 주는 작품이다.


세제션운동은 19세기 말 영국의 예술공예운동이나 프랑스의 아르누보 등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지배 양식이었다. 이는 고전파 건축양식을 대체하고자 했던 개혁운동이었다. 근대 빈 건축을 주도했던 이들을 살펴보면, 아돌프 루스라는 건축가를 필두로 세제션운동에 속한 일련의 건축가들이 대부분이다.


세제션운동의 물결은 빈 시내 중심지에서 조금 벗어난 외곽의 재개발 지역이었던 랑슈트라세에 보수적인 기법으로 설계된 건물이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낡은 구식 공법의 건축물들을 보다 못한 몇몇의 젊은 건축인들이 오랜 답습을 벗어나지 못한 기존의 건축인들에게 대항해 “우리는 너희들과 다르다”라고 과감히 외쳐댔다.


위에 언급한 오토 바그너와 그의 제자들인 죠세프 마리아 울브리히, 조세프 호프만 그리고 화가였던 구스타프 클림트와 콜로만 모세 등이 세제션운동에 참여한 인물들이다. 그중 건축 이론가였던 아돌프루스에 의해 세제션운동은 본격적인 모더니즘으로 전환했다.


“귀머거리들아 들어라”로 시작되는 그의 글모음 <허구에 대한 외침>과 그의 건축 작품들은 크게는 한도시에서부터 작게는 소소한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도시 전체에 만연해 있던 허구적인 문화운동을 비꼬아 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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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제션관 정면 입구



과거 예술가들의 양식과 단절한 채 세제션의 열기는 갈수록 더했다. 결국 1898년 조세프 마리아 울브리히가 설계한 세제션관에서 전시회를 개최하며 분리운동은 정점에 이른다. 이 전시회에 참석한 많은 이들은 침묵하고 있는 입체물 속에서 심오한 상징이 전해져 오는 것을 경험하고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전적 건축양식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지만 3분할의 좌우 대칭은 중앙 부분을 강조한 전통기법과는 다를 바 없다. 승리의 월계관을 소재로 한 금속 돔이 마치 사방으로 빛을 방출하는 듯한 이미지를 전해주며, 그 밑에 네 개의 든든한 기둥이 금속 돔을 떠받치고 있다. 그리고 벽면에는 크림트의 회화에서 유래했다는 식물 모양이 그려져 있다. 3천여 개의 월계수 잎과 7백여 개의 열매로 장식된 화려한 외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딱딱한 건축물 하나에도 완벽한 예술미를 담아내기 위해 노력한 그들의 땀방울이 느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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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시내 중심거리


 

오토 바그너의 우편국과

100년이 넘은 바그너 빌라 주택

1904년에 설계된 오토 바그너(Otto Wagner)의 우편국(Post Kasse)은 빈 시내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다. 빈 시가지의 건물 대부분이 4~5층 정도의 다른 건물들과 연결되어 이 우편물 건물을 찾기란 쉽지가 않았다.


커다란 카메라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길 한복판에 서서 두리번거리는 나를 발견하곤 안타까웠는지, 이내 오스트리아 현지인이 다가와 혹시 우편국을 찾는 게 아니냐고 대뜸 묻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대수롭지 않은 친절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낯선 필자로서는 여간 고맙고 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우체국이든 동사무소이건 공공기관의 외형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지만, 빈의 우편국은 건축학인 미학으로 인해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들르는 곳이다.


입구에 들어서기 전에 정면에서 바라본 전체 건물 사진을 찍었다. 정문을 열고 들어가면 계단과 통하는 커다란 홀이 보인다. 바로 이곳에서 각 가정에 배달되는 수많은 우편 업무가 진행된다. 약 80년 전에 지어진 우편국이지만 여전히 깔끔하고 우아하다. 물론 당시의 과거 내부 구조를 거의 바꾸지 않았다. 세련된 디자인의 의자와 테이블들이 원형 그대로 배치되어 있고, 중앙에는 우편의 역사를 보여주는 각종 자료들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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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오토 바그너의 우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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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오토 바그너의 우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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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국 내부 전시장


나는 먼저 고풍스러운 풍경이 담긴 포스터와 그림엽서를 구입했다. 혹시라도 카메라에 담지 못한 건물이나 풍경이 엽서에 담겨 있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여행할 때 그 지역의 기념엽서나 포스터를 열심히 구입하고 있다. 내부 모습을 촬영하는 나를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공장소이지만 특별히 거슬리는 행동을 하지 않는 한 방문객들이 마음대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왜 함부로 셔터를 누르냐고 혼쭐나기 일쑤였을 텐데, 결국 문화의식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누구나 공유하는 공공시설이므로 건물을 사용하는 것도 각자의 의사에 맡긴다는, 단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된다는 관대한 의식 때문이 아닐까.


봉투에 주소를 적고 우표를 붙이는 일련의 행동은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지만, 오래전에 설계하고 디자인한 공간을 즐겁게 사용하고 있고 또한 전혀 불편해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에 고개가 숙여졌다. 더불어 오토 바그너의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건축 철학에 존경심이 절로 드는 순간이기도 했다. 


오토 바그너는 1894년 53세의 나이로 빈 아카데미 건축과의 교수가 되었다. 당시 그는 인정받는 건축가였으며, 르네상스와 바로크 건축을 모델로 삼아 전형적인 절충주의 방식으로 많은 건물들을 설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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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바그너의 주택. 빌라 바그너 2의 외부 장식문양



같은 해에 설계에 대한 소책자를 출판했는데, 이 책을 본 기존 아카데미 회원들은 자신들의 기대를 저버렸다고 혹평했다. 이 책은 바그너가 건축가로서 얼마나 급진적으로 변모했는지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저서 <현대건축(Modern Archtecture)>에서 “실용적인 것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고 피력했으며 “예술적 창조를 위한 출발점은 현대 생활 안에서만 발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그너의 명쾌한 설득은 계속되었다. 구조와 재료는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며, 이것들은 새로운 형태로 창조되어 인간의 욕구와 조화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다시 말하면 형태, 기능, 기술 사이에 새로운 균형이 얻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오토 바그너의 우편국 실내 구조는 놀라울 만큼 순수한 디자인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건축사가 ‘기디온’은 이 건물의 실내가 의심할 바 없이 20세기 초창기에 세워진 가장 비타협적인 실내건축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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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바그너의 주택. 빌라 바그너 2의 외부 장식문양


이런 순수성이 새로운 재료와 잘 배합되었다는 사실이 바로 오토 바그너 작품의 특징이고, 더 나아가 이 시대 건축가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우선 그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공공기관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 우편국 건물 옆에 화창한 햇빛이 내려쬐는 안뜰을 만들었다. 그러기 위해서 특수한 설계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곧 뜰 위를 유리로 만든 지붕으로 덮는 것이었다.


빈 시내를 아름답게 수놓은 주인공이기도 한 오토 바그너가 살던 주택은 두 곳이다. 이름 하여 빌라 바그너 1, 2 인데 1888년에 지어진 바그너의 ‘주택 1’은 고전적인 스타일로 만들어졌지만 ‘주택 2’는 화려한 벽면에 기하학적 문양들을 보여준다. 너무나 아름다운 형태들은 현대건축을 공부하는 공학도라면 한번쯤은 눈여겨 볼만하다.


또한 빈 시가지 중심에는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오픈 전시되어 있다. 이 귀중한 문화유산들은 도로공사를 하던 중에 발굴되어 시민들이 자유로이 볼 수 있게끔 도로 중앙에 오픈되어 있다. 흔히 문화유산을 발굴하면 국립박물관으로 옮겨지게 되지만 이곳 빈 시민들이 나서 주장한 끝에 바로 이곳에 전시해 놓았다. 이로 인해 문화재가 있는 도로 주변 환경도 깨끗한 효과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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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중앙 광장에는 아돌프 루스의 루스 하우스 건물 앞 문화 유적지를 관람하는 시민들

 

문화와 역사에 대한 가치를 폄훼하지 않고 후손들에게 남겨주려는 이러한 정신을 본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아파트 건설이나 건물 공사를 할 때 문화재들이 나오면 그대로 묻어버리고 그 위에 건물들을 지어 버리는 일들이 많다. 그만큼 문화에 대한 이해나 인식 부족으로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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