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호 칼럼 도로 위의 무대, 비표시 경찰차와 원형 교차로의 이야기
도로 위의 무대,
비표시 경찰차와 원형 교차로의 이야기
글 박춘태 박사
뉴질랜드에서 운전을 하면 단순히 목적지를 향하는 이동을 넘어 이 나라의 독특한 도로 문화를 느끼게 된다. 도로는 그저 빠르게 가는 곳이 아니라, 숨은 파수꾼들이 함께하며 질서를 유지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도로 위의 작은 배려와 침착함은 단순히 안전을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여행의 풍경과 리듬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뉴질랜드의 도로는 여유로움과 규율이 공존하는 곳임을 알 수 있다.
도심의 도로 제한속도는 시속 50~60㎞로 설정되어 있어 운전자가 비교적 여유로운 속도로 이동할 수 있다. 하지만 고속도로로 들어서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시속 100㎞까지 허용되는 고속도로에서는 순간적으로 가속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그 속도 변화를 숙지하고 조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유로운 도시의 속도와는 달리, 시골 도로나 국도를 달릴때면 색다른 경험이 기다리고 있다. 고요한 자연 속을 달리다 보면, 도로를 가로지르는 양떼, 소떼, 때로는 야생 새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때는 속도를 줄이고 주변을 살피며 조금 더 여유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순간에는 마치 도로가 하나의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도로에서는 특별한 순간을 지켜보는 숨은 감시자가 있다. 눈에 띄지 않는 경찰차다. 일반적인 파란색과 노란색 도색을 한 경찰차가 아니라, 평범한 차처럼 보이는 비표시 경찰차(unmarked police car)다. 이 차량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지만 내부에는 사이렌과 속도 측정 장비가 숨겨져 있어 언제든지 단속이 가능하다. 비표시 경찰차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안전 운전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이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던 항상 안전 운전을 실천하는 것이 결국 우리의 안전을 지키는 길이다.
또 흥미로운 점은 뉴질랜드 도로 위에서는 자동차 경적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빵빵거리는 소리나 재촉 대신 침착하고 배려 깊은 도로 문화를 보여준다. 그러나 긴급 상황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앰뷸런스, 소방차,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나타날 때 모든 차량이 도로의 한쪽으로 재빨리 비켜주는 모습은 마치 하나의 약속처럼 자연스럽다.
이러한 행동은 긴급 차량이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돕는 뉴질랜드 교통 문화의 중요한 특징이다.
뉴질랜드의 라운드어바웃(Roundabout, 원형교차로)은 차량 흐름의 효율성을 높이고 자전거와 보행자까지 배려한 교통 체계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하지만 이 질서 정연한 원형 교차로도 초보 운전자나 규칙에 지나치게 얽매인 이들에겐 종종 예상치 못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
라운드어바웃에 진입하기 전, 가장 중요한 원칙은 오른쪽에서 오는 차량에 무조건 양보해야 한다는 점이다. 라운드어바웃 안에 있는 차량이 항상 우선권을 가지며 이를 존중하지 않으면 사고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따라서 진입 전에는 반드시 속도를 줄이고 주위를 살피며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 기본이다. 방향지시등 사용 또한 라운드어바웃 운전의 핵심이다. 좌회전(첫 번째 출구) 시에는 진입 전에 왼쪽 방향지시등을 켠다. 직진(두 번째 출구)의 경우, 진입 시방향지시등을 사용하지 않다가 출구 직전 왼쪽 방향지시등을 켜서 신호를 준다. 우회전(세 번째 출구 이상)일 때는 진입 전 오른쪽 방향지시등을 켠 뒤, 출구에 가까워지면 왼쪽 방향지시등으로 변경해 출구를 알린다. 또 다른 중요한 점은 라운드어바웃 안에서의 주행은 부드럽고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필요 이상으로 느리게 주행하거나 갑작스럽
게 멈추는 것은 사고를 유발할 수 있으므로 주변 흐름에 맞추어 안전하게 주행해야 한다.
라운드어바웃은 차량 흐름의 효율성을 높이는 교차로일뿐 아니라, 자전거와 보행자와의 조화를 고려한 교통시스템의 대표적 예다.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건널 때에는 반드시 양보해야 한다는 규칙은 안전과 배려를 우선시하는 뉴질랜드 교통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어느 날, 한 운전자가 라운드어바웃에 진입하려다 사건이벌어졌다. 그는 뉴질랜드 교통의 첫 번째 규칙, 오른쪽 차량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규칙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모든 차량이 완전히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뉴질랜드의 라운드어바웃의 기본은 흐름에 있다. 차량들이 모두 멈추는 일은 거의 없고 계속해서 원활하게 움직인다. 그는 끝내 진입 타이밍을 잡지 못한 채 한참을 머뭇거렸다.
뒤따르던 차량의 운전자들은 이 답답한 상황을 지켜보다 못해 창문을 열고 “그냥 나가세요!”라고 외쳤고 결국 그제야 그는 마치 잃어버린 자신감을 되찾은 듯 라운드어바웃을 빠져나갔다고 한다.
라운드어바웃에서 중요한 것은 규칙을 지키는 동시에 흐름을 이해하고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이다. 지나치게 멈칫거리거나 머뭇거리면 오히려 주변 차량에 혼란을 줄 수 있다. 라운드어바웃은 질서와 여유가 만나 조화롭게 작동하는 교통의 무대다. 양보는 필수지만 자신만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결단력과 유연성 또한 필요하다. 규칙에 얽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변 상황을 읽는 센스와 약간의 용기가 더 나은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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