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호 칼럼 대한민국 기적의 역사(6) 경부고속도로 건설

24일 전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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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기적의 역사(6)

- 경부고속도로 건설 -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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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공된 직후의 경부고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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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고속도로(아우토반)



독일의 아우토반과 경제부흥

독일의 자동차 전용도로인 아우토반(Autobahn)을 전국적으로 연결하고자 한 것은 아돌프 히틀러였다. 그는 1929년 세계를 강타한 경제공황을 극복하는 방편으로 미국의 뉴딜사업과 같은 공공사업으로서 고속도로 건설사업을 시작했다. 1933년 총연장 2만㎞를 목표로 착수하여 1936년 프랑크푸르트암마인-다름슈타트 구간을 처음 개통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전쟁에 인적 물적자원을 쏟아부어야 했던 히틀러는 당초 계획의 20%에 미치지 못하는 3800㎞를 건설하고 1942년에 중단했다.


히틀러가 건설한 아우토반은 전쟁에 별로 기여하지 못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파괴된 도시와 산업시설 복구와 경제 부흥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더불어 독일 자동차 업체들은 세계적인 입지를 구축했으며, 자동차 시장도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는 기반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 방문과 결단

1964년 12월 8일 경제 개발에 필요한 차관을 얻기 위해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수도 본의 총리 공관에서 정상회담을 했을 때 에르하르트 수상은 이렇게 조언했다.


“각하, 제가 이승만 대통령 시절 한국에 두 번 갔었습니다. 산이 많던데 그러면 경제발전이 어렵습니다. 대동맥을 뚫으세요. 독일에도 산이 많았는데 1933년 집권한 히틀러가 아우토반을 전국으로 확장, 건설한 것이 경제부흥의 원동력이 됐습니다. 각하도 고속도로를 만든 다음에 자동차 물동량을 늘리고 제철공장 만드세요. 그리고 일본과 국교를 맺으세요. 지도자는 과거보다 미래를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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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경부고속도로 건설 예정지를 찾아 관계자들과 함께 현장을 살펴보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출처: 국가기록원)




그리고 덧붙였다.


“분단된 국가로서는 경제 번영만이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 길입니다.”


박 대통령은 그다음 날 벤츠 차를 타고 본에서 쾰른까지 20㎞ 구간의 아우토반을 시속 160㎞로 달렸다. 박 대통령은 도중 두 번이나 중간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당시 통역을 맡았던 백영훈 박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박 대통령은 쾰른에서 본으로 가던 중 차를 멈추게 하더니 갑자기 차 문을 열고 도로에 내려서는 거예요. 약 10분간 노면과 중앙분리대, 교차시설 등을 주의 깊게 살펴보시더니 안내역을 맡은 뤼브케 대통령 의전실장에게 고속도로 건설 기간과 건설비 등 이것저것을 자세히 물으셨습니다.”


고속도로 구상과 타당성 검토

서독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박 대통령은 각 나라의 고속도로 건설에 관한 기록을 공부했다. 

귀국 석 달 뒤인 1965년 3월 박 대통령은 통역관으로 따라갔던 백영훈 중앙대 교수를 불러 고속도로 건설의 경제적 타당성 조사를 요청했다. 백영훈 교수는 회고했다.


“두 달 만에 올린 보고서에서 일본의 청구권 자금 등을 이용,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건의한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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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예정지를 찾아 쌍안경을 목에 걸고 지도를 펴놓고 현장을 살펴보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출처: 국가기록원)



박 대통령이 고속도로 건설을 서두른 데에는 경제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철도수송이 과포화되고

있는 것과 울산 정유공장 건설 이후 공급과잉 상태에 놓인 아스팔트 처리도 한 요인이 되었다.


고속도로 건설 발표

1967년 4월 27일 박정희 대통령은 제6대 대통령 선거의 민주공화당 후보로서 마지막 유세를 장충단 공원에서 했다. 수십만이 모인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대국토건설계획의 수립추진’을 발표하며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선거 공약으로 제시했다.


“전국의 도로 상태가 말이 아닌데 지금 국가에서 외국 차관도 얻고 갖은 재원을 총동원해서 경부고속도로에 투입하겠다고 한다. 이것은 언어도단이다!”


상대 당 김대중 후보는 고속도로 계획이 발표되자 맹렬하게 비판하였다.


“좁은 국토에 무슨 넓은 길이냐!”

김영삼(金泳三)도 반대했다.


“국내 보유 자동차 수가 4만 대에 불과한데 무슨 고속도로냐, 부자들을 위한 도로가 될 것이다.” 지식인들도 비판했다. 1967년 자동차 등록 대수는 5만 8000여 대에 불과하였으며 1인당 국민 총생산(GNP) 142달러, 수출 3억 2000만 달러로, 국민소득이 북한의 절반 수준일 정도로 경제 기반이 열악했다. 고속도로보다는 국도와 지방도의 보수나 벼농사 기술개발이 시급하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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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 왜관 공구 공사 광경



공사비 산출

박 대통령은 가능하면 예산을 줄일 목적으로 서울-부산 간 438㎞로 추정한 고속도로 건설비용 산출을 4개 기관과 고속도로 건설 경험이 있는 현대건설에 지시했다. 결과는 건설부 650억 원, 서울시 180억 원, 재무부 280억 원, 육본 공병감실 490억 원, 현대건설 289억 원 등 추정액이 제각각인 데다 격차가 많이 났다.

박 대통령은 육군 공병감 박병순 장군에게 부탁했다.

“예산을 직접 재검토하는 데 도와줄 우수한 공병 대령 한 사람과 중령 한 사람을 보내 주시오.”

공병감실은 육군본부 조달감실 검사과장 윤영호(尹永浩) 대령과 박찬표 중령을 추천해서 보냈다. 건설부에서도 박종생(朴鐘生) 기좌가 파견되었다. 이후 방동식(方東植) 소령이 추가되면서이 4명은 ‘청와대 파견단’이라 불렸다.

윤영호 대령의 청와대 파견단은 적정 공사금액을 360억 원으로 보고했다. 정부는 처음 IBRD(국제부흥개발은행)에 차관을 요청했다. IBRD는 조사단을 파견해 서울과 부산의 중간지점에서 1주일간 머무르며 자동차가 몇 대나 지나가는지를 조사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경부고속도로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중요할지 모르나 경제적으로는 그 중요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하는 수 없이 정부는 대일청구권 자금과 석유류세 인상, 통행료 수입, 도로공채를 발행하는 등으로 건설비 331억 원의 자금을 자체 조달했다.

“육군 공병대를 투입하면 어떨까? 그렇게 된다면 공사비가 많이 절감될 것이고 공사 진척도 빨라질 것 같은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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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의 불도저




박 대통령이 윤 대령에게 말했다. 박 대통령은 공사비 절감과 함께 공사감독자와 시공업체가 짜고 부정을 저질러 부실 공사가 될 것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노선의 결정

1967년 11월 23일 윤영호 대령이 청와대에 들어가자 대통령이 말했다.

“육군본부에 가서 서울-수원 간 지도를 100만분의 1에서부터 1200분의 1까지 각각 1부씩 구해오시오.”

윤영호 대령이 지프에 단 트레일러에 지도를 가득 싣고 청와대로 돌아오자 지도에 산지와 평야, 시가지, 지상 구조물 등을 군사지도처럼 색깔로 표시해 달라고 지시했다. 며칠 후 박 대통령은 100만 분의 1 지도를 내밀며 말했다.

“이 지도에 그려져 있는 것을 참고로 해서 채색된 지도에 그려 넣어주게.”

윤영호 대령은 회고했다.

“펼쳐진 지도를 보니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 예정 노선이 연필로 그려져 있었는데, 얼마나 그리고 지우고를 반복했는지 지도상에 인쇄된 글자들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였다. 지도의 귀퉁이는 아예 닳아 없어진 상태였다. 선 한 줄 긋는 데 얼마나 고심했는지 그 흔적이 지도 곳곳에 역력했다.”

청와대 파견단이 활동하던 당시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은 전쟁을 지휘하는 ‘전쟁상황실’과 같았다. 김용환 전 재무부 장관은 이렇게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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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의 고속도로 구상 스케치



“나는 대통령 집무실에 들를 때마다 대통령이 1/25만 지도를 펼쳐놓고 삼각자를 대고 색연필로 노선을 직접 그리면서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강한 집념을 불태우는 현장을 여러 번 목격하였다. (김용환, <임자, 자네가 사령관 아닌가>, 서울: 매일경제신문사, 2002, 280쪽)”


고속도로 추정공사비가 결정된 어느 날 아침 박정희 대통령이 윤영호 대령을 집무실로 호출히여 말했다.

“지난 일요일에 혼자 말죽거리까지 다녀왔는데, 사람들이 알아보고 몰려들어서 더이상 가지 못했어. 윤 대령이 나 대신 수원까지 노선 정찰을 다녀와서 어디로 길을 내면 좋을지 보고해 주었으면 해.”

윤영호 대령은 박찬표 중령과 건설부 박종생 기좌를 지프에 태우고 박정희 대통령이 그린 노선을 따라 정찰에 나섰다. 출발하기 전 박 대통령은 신신당부하며 “노선이 노출되면 주변 땅값이 오르니 정찰 중에는 아무도 만나지 말라”면서 “좀 늦더라도 오늘 중으로 보고를 해달라”고 했다. 한남동 부근 한강변에 제3한강교가 놓이기 전이라 일행은 나룻배에 지프차를 실어서 한강을 건넜다. 높은 곳에 올라가 머릿속에 조감도를 그리고 신갈 저수지 부근에서 오른쪽 수원 국도 쪽으로 길을 낼지 왼쪽으로 낼지, 경사도와 토질·골재를 채취할 만한 위치, 개천의 수량과 폭, 교량건설 위치 등을 지도에 표시했다. 서둘러 국도로 청와대에 도착하니 저녁 7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대통령은 그 시간까지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도를 펼치고 보고를 들은 대통령은 이후락 비서실장을 불렀다.


“내일 건설부 장관, 서울시장, 경기도지사, 경제수석비서, 이후락 비서실장과 행정관리비서관들을 모두 소집해 주게.”

“내일 10시경으로 할까요?”

이후락 비서실장이 묻자, 대통령은 말했다.

“한 시간이 아쉬운 이때 그렇게 늦으면 안 되지, 더 빨리 9시로 해.”

1주일 만에 끝낸 용지 매입다음 날인 1967년 11월 28일 오전 9시 정각, 대통령 주재 하의 회의가 시작됐다. 대통령은 미리 준비해 놓은 5만분의 1 지도판 앞에 서서 서울-수원 간 고속도로 건설 예정 노선을 개괄적으로 설명하고 나서 말했다.

“시중의 두 개 은행이 고속도로 예정 노선의 지가를 비밀리에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고속도로 건설 예정지의 평균지가는 논이 평당 150~200원 내외이고, 임야는 100원 이하입니다. 전답과 임야를 가리지 않고 평당 300원으로 예산을 배정해 줄 테니 300원 이하로 매입하도록 하고, 남으면 농지구역 정리와 고속도로 진입로 건설에 쓰도록 하시오.”

그리고 덧붙였다.

“시간을 끌수록 땅값이 춤을 출 것이기 때문에 용지 매입은 일주일 만에 끝내야 합니다!”

“기간이 너무 짧습니다.”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가 난감해하자 박 대통령은 말했다.

“해당 군수는 면장을, 면장은 이장들에게 얘기해 주민들 동의를 받아내면 됩니다.”

박 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서울-수원간 고속도로 용지 매입은 1주일 만에 끝났다. 이후 다른 구간도 이런 방식으로 용지수매를 끝냈다. 그리하여 경부고속도로는 강남의 7.6㎞ 구간 약 9만 2000평을 구획정리로 확보한 서울 구간을 제외하고 총 619만 6000평의 토지가 편입됐다. 이중 국유지 36만 9000평을 제외하고 사유지 582만 7000평에 대해 13억 7667만원이 지급되어 평당 236원에 매수했다. 당시 담배 한 갑에 40원(파고다), 쌀 한 가마에 4350원하던 때였다.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땅값이 치솟아 고속도로 건설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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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습격하러 왔다 붙잡힌 김신조



건설공사

1968년 기공식 9일을 남겨놓은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124부대 소속 공작원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를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은 청와대로부터 300m 떨어져 있는 종로구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하였다. 침투한 31명 중 29명은 사살되고 김신조를 생포(투항)했으며 1명은 북으로 돌아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들의 기습과 퇴각 과정에서 총 32명의 군경과 민간인이 사망하고, 52명이 부상당했다. 심각하고 큰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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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2월 1일 서울 원지동에서 거행된 경부 간 고속도로 기공식. 박정희 대통령이 발파 버튼을 누르고 있다.



“전쟁이 아니면 예정대로 한다.”

박 대통령은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2월 1일 예정대로 서울 영등포구 원지동(현 서초구 양재동 교육문화회관 부근)에서 기공식을 거행했다. 그 당시만 해도 국내 건설회사에는 이렇다 할 장비가 없어 군 장비를 동원했다. 기공식이 끝나자 육군 제1201 건설공병단 220공병대대가 차출돼 건설 현장에 투입됐다.

서울-수원 구간 구역별 감독관은 64명의 현역 장교들이 맡았다. 현역 장교 출신의 감독관 선발기준은 미혼이어야 하고 월남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으며 책임감이 강할 것 등 세 가지였다. 열악한 업무 환경을 이겨내고 임무를 완주할 사람은 젊고 패기 있는 군인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원리 원칙을 준수하려 노력했다. 시방서를 들고 다니며 조금이라도 시방서에 어긋나거나 차질이 발생하면 가차 없이 재시공 내지는 공사를 중단시킬 정도로 철저히 관리 감독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현장에 수시로 방문했다. 그때마다 장영호 대령이 공사 현황을 브리핑했다.

박 대통령은 건의 사항을 얘기하면 현장에서 바로바로 해결해 주었다. 수많은 우여곡절과 시행 착오 끝에 서울-수원간 31.3㎞의 첫 구간이 1968년 12월 21일 착공 10개월 21일만에 완료되었다. 이어서 대전, 대구, 부산까지 순차적으로 공사가 이어져 1968년 2월 1일 착공하여 2년 5개월 만인 1970년 7월 7일 전체 구간이 준공되었다.

총연장 428㎞에 429억 원이 투입되어 1㎞당 약 1억 원이 든 셈이다. 이것은 그 당시 건설 중이었던 일본의 도쿄(東京)~나고야(名古屋) 고속도로 건설비의 5분의 1밖에 들지 않아 ‘세계에서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값싸게 건설한 고속도로’란 기록을 세웠다. 이 대역사에 연인원 892만 8000명과 165만대의 장비, 16개의 건설업체와 3개 건설공병단이 참여하였다. 공사과정에서 77명이 목숨을 잃었다.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 인근에는 77명의 순직자를 기리는 위령탑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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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이한림 건설부장관이 1970년 7월 7일 아침 대전 인터체인지에서 준공테이프를 끊었다.


 

의의

경부고속도로 완공 개통으로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이동 시간이 15시간에서 4시간 반으로 단축됐다. 전국이 ‘1일 생활권’으로 되었으며, 물류 시간과 비용 절감으로 유통 혁명을 가져왔다. 농어촌에서 생산된 산물이 대도시로 유통되어 농어촌은 부유해졌고, 고속도로 연변에 수출형 공업단지가 형성될 수 있었다.

그 생산품은 납기에 맞추어 수출 항구로 원활하게 수송될 수 있었다. 물류의 혁명은 1970년대 철강, 석유, 화학, 조선, 자동차, 전자 등의 중화학 공업단지 건설과 수출증대로 이어졌다. 또한 지역간 인적, 물적, 정보와 문화 등이 활발하게 교류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 경부고속도로는 지도자의 비전, 전문적 효율적인 팀 구성, 지휘부 내부와 지휘부와 현장 간의 원활한 의사소통, 현장 중심의 확인 행정의 국가 리더십과 헌신적인 건설업계, 공병단, 건설노동자들이 이루어낸 빛나는 결과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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