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호 문화 고구려 유적지 및 백두산 답사기(1)

2024.08.15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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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유적지 및 백두산 답사기(1) 


글·사진 이명우 운룡도서관·운룡역사문화포럼 회장



2020년 봄에 코로나 대유행으로 실내 집회 금지 조치에 따라 운룡도서관에서 매달 실시하던 운룡역사문화포럼을 못하게 되어서 시작한 야외 역사문화탐방이 매달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서 토요일 또는 일요일 당일치기 및 1박 2일로 진행돼 2023년 말에 45회에 이르렀다.


운룡역사문화포럼 임원들과 회원들의 요청으로 해외 역사탐방을 계획하고 1차로 2024년 5월 50회 기념 역사문화탐방을 고구려의 역사 유적지가 많은 중국 길림성 집안과 백두산 지역을 선택하여 답사 일정을 계획하였다.


심양에 위치한 중국 현지 여행사의 협조로 5월 26일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중국 심양시에 도착한 후 여행사 대절 버스로 환인시로 이동하여 상고성자 고분군, 오녀산성, 오녀산성 박물관을 답사한 후 통화시로 이동하여 숙박한다. 다음날 백두산과 금강대협곡을 답사하고 28일에는 집안시의 국내성 유적과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 장군총, 통화시 박물관, 만발자유적지를 답사키로 하였다.


29일에는 통화시에서 출발, 장춘시로 이동하여 장춘박물관, 위만황궁을 답사하고 심양에서 숙박한 후 30일에 심양고궁 및 요녕성 박물관을 관람한 후 귀국하는 일정으로 4박 5일 고구려 유적지 및 백두산 역사탐방을 26명의 회원들과 함께 실시하였다. 역사탐방의 효과를 증진시키고자 먼저 고구려의 역사에서 국가 기원과 동북아시아에서의 위상 및 수·당과의 전쟁,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에 이르는 중요한 부분을 간추려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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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개마무사 군단



고구려 역사 개요

고구려는 한민족이 세운 크고 작은 여러 나라들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국가이다. 또한 고구려는 우리 민족에게 확실히 강하고 의미있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고구려는 만주 일대와 한반도의 중부 이북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동북아시아 강대국이었다. 전성기 때에는 서쪽으로 대전일대, 동쪽으로 포항 가까이에 이르는 드넓은 육지 영토는 물론이고 동해 중부 이북의 영토와 동해 중부 이북의 해양 영토를 보유하면서 700여 년 이상 존속하였다. 정치적으로 자주성이 강하고 정신적으로 자아가 강한 특성을 갖고 있으며, 다양한 자연 환경 속에서 주변의 여러 종족과 민족들을 융합시켜 통치하였다. 강한 군사력을 갖춘 정복국가였지만 독특하고 성숙한 문화를 영위한 문화국가였다.


고구려는 역사 문헌에 의하면 북부여를 계승하였다고 하는데, 북부여는 현재 북만주인 흥안령 일대에서 남만주 일대에까지 걸쳐 있었던 고조선의 제후국이었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朱蒙)은 북부여의 단군인 해모수의 아들인데 <삼국유사>에서는 ‘동명성왕’으로도 호칭하였다.


주몽은 건국하자마자 송양이 다스리는 비류국을 정복하고 이어서 주변에 있었던 소국들을 차례로 병합하였는데, 이러한 영토확장 정책은 고조선을 계승하고 영토를 수복하여 고조선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까지 계속되었다.


동천왕 재위 19(245)년에 위(魏)나라 관구검이 침략하여 왔다. 동천왕의 군대가 비류수에서 맞서 싸웠지만 패하여 수도 국내성과 환도성이 함락되고, 동천왕은 북옥저와 숙신으로 피신했다가 관구검이 돌아간 후에 돌아와 나라를 수습하였다.


그 후 고국원왕 때 전연(前燕)의 모용황의 침략이 있었고 남쪽의 평양에서 백제와의 전쟁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하여 국가의 위기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부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소수림왕(371~384)이 내부 통치를 개혁하고 국력을 강화시킴으로써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켰다.


고구려는 5세기경에 이르러 광개토대왕에 의하여 동서남북으로 전방위 주변 소국들을 공략하여 북만주 일대와 연해주 지역, 요동반도 그리고 남으로는 한강 이남까지 영토를 확대하여 동아시아 최고의 강대국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해양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동해 및 황해 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장악하였으며 일본열도에까지 세력을 뻗쳤다.


장수왕은 남진정책을 추진하여 한반도의 지배권을 확립하였으며, 해양활동을 더욱 활발히 하였고 북으로 진출하여 현재의 동몽골 지방인 지두우 지역을 유연과 분할하여 지배하였다. 이 시기의 고구려는 한반도의 대부분, 만주 전체, 요동반도 그리고 동해와 황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동아시아에서 대륙과 해양을 겸비한 대륙적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동북아시아 부여계의 모든 나라들이 고구려에 귀속되었고 주변 종족들도 흡수하는 작업을 추진하여 선비·오환·거란 등을 수용하였으며, 물길 등 북방 퉁구스계 종족도 고구려에 편입됨으로써 고구려는 동아시아 속에서의 위상이 격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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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전성기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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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성자 고분군 정문



6세기말에 이르러 중국 지역은 선비족이 세운 나라인 수나라로 통일되고, 북방에서 돌궐이라는 유목민족의 신흥국가가 성립되면서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는 전면적으로 재편되었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종주권과 교역권 등의 이해관계로 북방의 강대국인 고구려와 남쪽 신흥 강국인 수나라는 상호 경쟁체제에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598년에 고구려는 수륙군으로 선제공격을 감행하였고, 이 전쟁을 시발로 하여 동아시아 패권전쟁은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약 70년 동안 주변의 모든 국가들과 종족들을 끌어들이면서 벌어졌다. 고구려와 수나라 간에 벌어진 전쟁은 5차에 걸쳐 무려 15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특히 3차 전쟁 때는 수나라의 2대 황제이자 최후의 황제로 전락한 양제가 무려 정병만 113만여 명을 거느리고 수륙양면으로 침입해 왔다.


수나라는 요동성 전투, 대동강 방어 작전, 살수전투에서 고구려에 대패하면서 퇴각하였다. 그 후 두 번에 걸쳐 해안 지방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은 전쟁 패배로 인한 후유증으로 국력의 상실을 극복하지 못한 채 5년 후인 618년에 멸망하였다.


고구려는 수를 이어 등장한 당나라와 다시 대규모 전쟁을 벌였다. 645년에는 당나라의 태종이 10여 년 동안 전쟁을 준비한 후에 대규모 군대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초전에 요하를 건너 요동성을 공격하여 점령한 후에 그 기세를 몰아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당태종은 3개월에 걸친 안시성 전투에서 패배한 후에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전투에서 입은 상처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고구려가 수·당과 대규모 전쟁을 하는 동안 신라는 백제와 대결하고 있었고 당과 연합군을 결성하여 660년에 백제의 사비성을 함락시켜서 멸망시켰다.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는 다시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거듭된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하였고 665년 연개소문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 3명과 대신들과의 권력 쟁탈전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맏아들 남생이 자신이 거느리던 북쪽 관할 지역의 군대를 이끌고 당나라에 투항한 후 당나라 군대를 안내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666년 보장왕이 연남건을 대막리지로 임명하자 12월에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가 자신이 관할하던 남쪽 지역의 군대를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나당연합군의 계속된 공격으로 668년 9월에 보장왕이 당나라에 항복하여 평양성이 점령당하였다. 그 후 고구려군은 여러 지역 산성에 웅거하여 저항을 계속하다가 671년 안시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였다. 그러나 30년 후 고구려 장군인 대조영에 의해 ‘발해’로 다시 건국되어 후고구려로 맥을 잇게 되었다.


환인(桓因)시는 요녕성의 관할도시로 부근에 석탄·철 등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철과 석탄의 도시(煤鐵都市)’로 유명하며 안산(鞍山) 다음 가는 동북부 제2의 제철도시이다. 행정구역은 번시만족(本溪滿族)자치현과 환런만족(桓仁滿族)자치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면적 8411.3㎢. 인구 156만 명(2007)의 소도시이다. 역사적으로 환인지역은 고조선을 이은 부여의 땅으로 고구려가 첫 번째 도읍으로 삼고 졸본성을 세웠던 지역이다. 고구려의 멸망 후 당나라 때에는 안동도호부에 속했다. 고구려의 첫 수도는 홀본, 졸본 등으로 불린다. 광개토태왕 비문에는 “비류 홀본 서쪽 성산 위에 도읍을 세웠다.”라고 되어 있다. 서기전 37년부터 서기 3년까지 수도였다. 현재 홀본의 위치는 환인현 혼강가에 있는 오녀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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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성자 고분군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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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성자 고분군(출처: 동북아역사넷)



심양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 30분 고속도로를 달려서 환인에 들어가면 가장 가까운 첫 번째 유적지가 상고성자(上古城子) 고분군이다. 마을입구에 도착하여 승용차가 다닐 수 있는 골목길로 5분 정도 걸어서 상고성자 고분군에 도착하니 넓은 유적지는 약 2m 높이의 붉은색 나무 울타리로 둘러져 있으며, 붉은색의 커다란 대문과 안내소 역할을 하는 파란 지붕의 붉은색 건물이 보인다.


대문 안쪽과 건물에는 인기척이 없고 철문은 굳게 자물쇠로 잠겨있다. 아마도 찾는 사람들이 없어 폐쇄돼 있는 것 같다. 나무 울타리 넘어 멀리 보이는 안쪽에 적석총의 돌무더기만 조금 보일 뿐이다. 우리 일행은 들어갈 방법이 없어 정문과 한문 안내판 및 멀리 보이는 돌무더기 사진만 찍고 돌아서야 했다.


중국은 관광지처럼 조성된 유명한 유적지외에는 작은 유적지는 거의 운영을 안 하고 폐쇄되어 있는 실정이다. 작년 11월에 답사한 중국 산시성 임분에 있는 요(堯)제릉도 건물이 어마어마하게 크게 건축되어 있지만 찾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문이 굳게 잠겨있고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서 들어가지를 못하였다.


상고성자 고분군은 요녕성 환인현 육도하자향 상고성자촌에 있다. 1960년대 조사에서 200여 기가 확인되었다. 1960년대 말 현지 주민의 농경지 개간으로 인해 대부분 파괴되어 1988년 조사에서는 27기로 감소되었다. 2006년 9~11월까지 요령성 문물고고연구소에서 고구려 후속 연구 프로젝트를 위한 조사를 실시하였고 보호 구역 안에서 22기를 확인하고 보존토록 하였고 1호~4호묘 등 총 4기를 발굴 조사하였다.


고분군은 주변보다는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하는데 동서 200m, 남북으로 1500m 가량 범위로 펼쳐져 있다. 현재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적석총은 약 15기 정도가 있다. 한 변의 길이가 10m이상 되는 기단식 적석총과 무기단식 적석총이 혼재한다.


무덤의 대부분은 기단식 돌무지무덤이다. 기단식 돌무지무덤은 형태상으로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무덤 네모서리에 큰 돌을 놓고 그 사이를 돌로 채워 초보적인 기단을 만든 무덤이다. 다른 하나는 커다란 돌로 방형으로 기단을 만든 전형적인 형식이다.


대체로 후자가 상대적으로 비교적 큰 규모를 갖추게 되며 한 변의 길이가 10m 정도에 이른다. 이외에 고분군의 서쪽 끝에 위치한 기단식 돌무지무덤은 길이 19.7m, 너비 10.2.m, 높이 2.5m 정도로 큰 돌을 1~3층으로 들러 싼 큰 규모이며, 봉분 안에 자갈이 깔려져 있는 여러 개의 무덤방이 있었던 특수한 형태의 고분이다. 일부 무덤은 끈으로 묶여 있는데 이는 고구려의 매장하는 풍습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3개의 작은 돌무덤이 있으며 그 주위에는 기단이 없고 모두 조약돌로 만들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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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성자 고분군(출처: 동북아역사넷)



상고성자 고분군의 돌무지무덤은 집안 지역에서 1~3세기에 유행하던 돌무지무덤과 유사한 형태로서 대체로 같은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곳에서 후기에 등장하는 봉토분이 전혀 없기 때문에 고구려 초기의 역사와 관련된 상고성자 고분과 하고성자 평지성에 살던 주민집단의 고분군임을 알 수 있다. 이곳 인근에 혼강과 육도하 그리고 하고성자 유적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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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개마무사



* 기사에 게재된 사진의 저작권은 운룡역사문화포럼(이명우 회장)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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