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호 문화 고려의 세계 최초 금속활자 발명Ⅱ

2023.04.20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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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세계 최초 금속활자 발명Ⅱ 


글·사진 이명우 운룡도서관·운룡역사문화포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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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의 인쇄작업을 묘사한 판화


이러한 사실들은 구텐베르크가 금속 작업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노하우와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하며, 아버지에게서 압착 기술의 아이디어를 가져왔다면 금속세공 기술은 금속활자를 개발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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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 금속활자


세계의 여러 가지 위대한 발명 가운데서도 활판 인쇄술의 발명은 동아시아와 아랍 세계 및 유럽의 종교와 문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2001년 9월 4일 고려 불경 <직지(直指)>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국으로 공인되기 전에는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자로 인정되어 왔다.


서양 최초의 활판인쇄를 발명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400~1468)는 귀족의 아들로서 독일 마인츠에서 태어났다. 마인츠는 로마 시대부터 상업 도시로 존재하였던 유서 깊은 도시이다. 금 세공업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구텐베르크는 1411년 가족들과 귀족들 사이의 분쟁으로 마인츠를 떠나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로 갔다.


1419년 아버지가 사망하였으며 구텐베르크는 1437년경부터 보석의 연마와 절단 분야에 대한 가문의 지식으로 상인들에게 보석연마 기술을 가르쳐 수익을 창출하였으며, 이어서 협동조합을 만들어 보석 가공과 순례자를 위한 주석 합금으로 만든 모자 부착용 작은 클램프를 금형으로 주조하는 사업을 하였다.


이때 구텐베르크는 여러 가지 예술적인 기술을 익혔고 인쇄를 시도했다. 1448년 마인츠에 돌아온 구텐베르크는 인쇄사업을 하기 위하여 많은 양의 돈을 빌려 인쇄소를 세웠고 금속주조기, 양피지, 종이 등 인쇄에 필요한 기술과 재료를 확보하고 성서를 42행으로 인쇄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1452년에 시작하여 1455년에 완성됐는데 이 성서는 한 페이지가 42줄의 2단으로 이루어져 <42행성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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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400~1468)

구텐베르크의 아버지가 금화를 제조하는 조폐국에서 일했다는 기록을 보아 활자 주형을 압착하는 아이디어는 아버지로부터 얻었을 것이다. 금세공사조합 기록에는 동업자들과 함께 보석세공과 거울 만드는 일을 하면서 많은 학생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구텐베르크가 금속 작업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노하우와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하며, 아버지에게서 압착 기술의 아이디어를 가져왔다면 금속세공 기술은 금속활자를 개발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구텐베르크는 금속활자를 주조하는 특별한 방법을 고안하였는데 그는 많은 활자를 정확히 주조할 수 있도록 자모(字母)들이 거꾸로 새겨 각인된 펀치(동전 등을 압착 주조하는 데 사용하는 압착공구: 프레스 공구)로 철판에 찍어 주형(鑄型:금형)을 만들었다. 이 글자 주형에다 납과 안티모니, 주석의 합금을 부어 활자를 대량 찍어 냈다.


이러한 주조 방식은 철로 만든 금형을 사용하기 때문에 수천번을 주조해도 모양과 크기가 일치한 활자를 만들 수 있었다. 또한 조판과 활자가 서로 요철(凹凸) 상태로 물리게 만들어서 수백 장을 인쇄해도 활자가 밀리지 않도록 고안하였다.


이러한 인쇄조판을 대량 인쇄에 용이하게끔 기존의 포도주 기름 등을 짜던 압축기(프레스)를 활용하였으며 인쇄잉크는 중국이나 고려의 인쇄술에서 사용치 않은 유성잉크를 사용한 것이 특징 중 하나다.


유럽보다 앞서 개발된 중국과 고려의 인쇄기는 낱개의 글자를 움직일 수 있었지만 기계로 눌러서 인쇄하는 방법이 아닌 반면,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필요에 따라 낱개의 글자를 새겨 글자들을 끼웠다 뺐다 할 수 있는 것이어서 속도와 편의성, 인쇄의 품질관리 측면에서 보면 훨씬 발전된 것이었다.


15세기에 발명된 구텐베르크의 기계식 인쇄 방법과 원리는 옵셋인쇄(offset printing)가 출현하는 20세기까지 그대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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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 인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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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 <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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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 금속활자 조판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 이전에도 이미 유럽에서도 목판인쇄술이 사용되었지만 이 목판인쇄술은 기술적으로도 구텐베르크 인쇄술에 비해서 열등했기 때문에 널리 보급되지 못하였다. 목판에 잉크를 묻히고 종이를 위에 올린 후 롤러로미는 방식으로 인쇄했는데, 이 과정에서 잉크가 번지거나 종이가 찢어지거나 더러워져서 인쇄의 질은 좋지 않았다.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이런 ‘목판 인쇄본책’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책의 수요가 제일 많은 대학에서도 대규모로 필경사들을 고용해서 책을 필사하는 제도가 이미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 목판인쇄가 발전하지 못하였다.


구텐베르크는 책을 인쇄하는 데 고급스럽게 보이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으며 그렇게 특화된 인쇄물이 잘 알려진 <성경>이며, 주로 똑같은 서식과 문장이 반복해서 계속 쓰이는 행정서류가 주된 생산품이었고 그중에는 교회 면죄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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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의 최초 <성경> 인쇄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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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성경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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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인문주의자와 대학이 초기에 인쇄기를 멸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쇄기는 책의 소비자 가격을 20%로 확 줄여버렸기 때문에 인쇄기의 가능성에 온 유럽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1470년대에는 이미 유럽 주요 대도시 12곳에 인쇄소가 열렸고, 1500년이 되면서 유럽 전체에는 240곳으로 확 늘어났다.


이 시대의 책은 국제 교역에도 쓰일 수 있는 고급 상품이었기 때문에 70%가 넘는 책이 라틴어로 계속 쓰였고, 국제 교역망을 따라 퍼진 염가의 책은 기존의 5배나 비싼 필사본 책들을 쇠퇴하게 만들었다.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은 그의 견습공들에 의해 1464년에 로마로 전파되었으며 1500년 때까지 유럽 260개 도시에서 인쇄소가 생길 정도로 급속하게 전파되었다. 당시 성서를 비롯한 종교 서적,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신대륙과 오지 탐험 관련 서적, 등 수십만 부의 책이 인쇄되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기의 발명 전 유럽에서 500~1400년대까지 필사된 책의 총량은 대략 10만여 권으로 추산된다. 인쇄술 발명 후 불과 50년 사이에 유럽 전역에서 1500만~2000만 권이나 되는 책이 생산되었다. 이는 이전 인류가 생산한 책의 숫자보다 더 많은 양이다.


이 같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유럽을 떠나 1539년 멕시코, 1556년 인도, 1584년 페루, 1602년 필리핀, 1639년 미국, 1640년에 이란까지 전파되었다. 또한 인쇄술의 발명 이전까지 소수 지배계급의 전유물이었던 책이 지식에서 소외되었던 대중 속에 급속히 전파되었으며 역사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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