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호 문화 고려의 세계 최초 금속활자 발명 Ⅲ
고려의 세계 최초 금속활자 발명 Ⅲ
글·사진 이명우 운룡도서관·운룡역사문화포럼 회장
목활자는 같은 글자를 많이 준비하기 위해
필요 수량만큼 전부 조각하는 것에 따른 인건비 상승과
목활자의 표면이 쉽게 닳거나 부식되고, 인쇄된 종이가 깨끗하지 않다는 등의
단점이 있으므로 상당한 제약이 따랐다. 당연히 이를 개선할 방법을 찾았는데
그 개선책이 바로 금속활자의 발명이다.
고려에서 목활자는 나름의 편리성 때문에 매우 오랫동안 사용되었고 이는 조선 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실제로 조선 후기에서 말기에 이르는 시기에도 서원(書院)이나 사찰 및 양반 가문에서 경서나 불경 또는 개인 문집과 족보를 발간할 때 널리 쓰였다.
목활자의 인쇄는 11세기에 이미 시작된 것으로 나타난다. 최근에 서산군 운산면 문수사(文殊寺)의 부처의 몸속에 보관되어 온 복장 유물 중에서 1906년 의천(義天)이 찍은 속장경의 간기가 나왔는데, 이것이 나무 활자로 찍은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손보기 지음, <금속활자와 인쇄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0, p173).
고려에서는 책에 대한 수요가 많아져 수많은 목활자를 만드는 데 엄청난 노동력이 동원되었다. 그런데 목활자는 같은 글자를 많이 준비하기 위해 필요 수량만큼 전부 조각하는 것에 따른 인건비 상승과 목활자의 표면이 쉽게 닳거나 부식되고, 인쇄된 종이가 깨끗하지 않다는 등의 단점이 있으므로 상당한 제약이 따랐다. 당연히 이를 개선할 방법을 찾았는데 그 개선책이 바로 금속활자의 발명이다.
금속활자의 발명과 사용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원했지만 초기의 기록이 문헌에 없어 언제 누구에 의해 이루어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동안 학자들이 학설로는 ‘11세기 기원설’ ‘1102년 기원설’ ‘12세기 중엽 기원설’ 등이 있었으나 문헌상 해석의 오류로 판명되어 현재 학계에서는 13세기 초에 발명되어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시대에 금속활자로 책을 인쇄한 사례는 13세기 전기에 나타나고 있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 중조본(重彫本)의 권말에 있는 최이(崔怡)의 발문에 의하면 “이 책은 선문(禪門)에서 가장 중요한 책인데, 전하는 것이 드물어 얻어 보기 어려워 주자본(鑄字本)에 의거하여 1239(고종 26)년 다시 새겨 널리 전하게 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미국에 거주하는 학자 유우식이 2021년 6월에 발표한 논문 <이미지 분석을 통한 매우 유사한 증도가(證道歌) 이본(異本)에 대한 비교연구>에 의하면 “활자 인판(印版)에 같은 글자의 동일한 꼴이 여러 개 나타나며 글자의 크기와 모양이 비교적 일정하고 가지런하며, 글줄이 곧바르지 않고 좌우로 비뚤어져 있어 초기 금속활자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13세기에 금속활자를 사용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금속활자가 1232년 강화로 천도하기 이전인 13세기 초기 개경에서 이미 만들어져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속활자를 만들려면 금속 주조기술, 종이 생산과 인쇄용 잉크 개발 등 관련 기술이 발달해야 한다. 당시 고려는 금속활자를 만들 수 있는 제반 여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금속주조기술은 단군조선때 만들어진 다뉴세문경에서 이어져 내려온 초정밀 금속주조 기술이 삼국시대를 거치며 중국보다도 더욱 발달했기에 목활자에서 금속활자로의 전환이 아주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금속활자를 만드는 데 어떤 금속을 쓸 것인가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금속을 주조하는 것은 단군조선과 삼국시대부터 발달된 것으로 무기나 농기구 등을 만들 때 동에 주석과 아연을 혼합한 놋쇠(아연청동)를, 철기시대에는 단단한 연철이나 강철을 철 용광로에 녹여서 거푸집에 부어 금속제품을 주조하였다.
고려시대에도 금속제품에 주로 놋쇠를 가장 많이 사용하였고 화폐와 금속활자도 놋쇠를 사용하였는데 놋쇠는 구리가 60~80%에 주석과 아연·납 등이 조금씩 들어가면 혼합물의 비율에 따라 놋쇠의 질이 좋아지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려는 초기부터 백성들이 물물교환 대신 금속화폐를 사용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여 996(성종 15)년에 철전인 건원중보(乾元重寶)를 주조하였고, 1101년에 주전도감(鑄錢都監)을 설치하고 이듬해인 1102년 12월에는 고주법(鼓鑄法)을 제정하고 해동통보(海東通寶)를 주조하게 되었다.
고려의 화폐 건원중보나 해동통보를 보면 모양이 바르고 글자가 뚜렷하며 고르다. 또한 화폐 주조의 기술은 차후 금속활자의 주조와 같은 기술이 적용되었는데 이로 보아 고려에서는 이미 수백 년 전부터 금속활자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하고 있었던 셈이다.
종이는 중국이 먼저 만들었다고 해도 종이의 질은 우리나라가 더 우수했다. 인쇄용 잉크는 금속활자 단계로 넘어오면 목활자 인쇄와는 다른 문제가 발생되었는데 그것은 목판이나 목활자 인쇄에 쓰는 먹물을 금속활자에 그대로 적용하면 인쇄가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금속활자를 인쇄하기 위해서는 종래의 먹물 성분 외에 기름 성분이 들어가야 한다. 먹은 그을음, 아교, 향료를 원료로 만들어지는데 그을음의 탄소 성분은 소나무를 태운 송연과 기름을 태워 얻는 유연을 사용하고 여기에 아교를 넣어 그을음의 미립자를 서로 엉겨 붙게 하면서 먹 형태를 만든다. 이때 같이 섞는 향료는 아교 냄새를 없애기 위해 쓰인다.
당시 고려의 종이와 먹이 세계적인 수준이었는데 고려는 송나라에 종이와 함께 먹도 많이 수출했다. 문종 34(1080)년에는 공무역으로 종이 2000폭과 먹 400정을 수출했으며, 송나라 상인들이 직접 고려에서 백지와 송연묵을 사가기도 했다.
금속활자를 만드는데 금속 화폐를 만드는 것과 같이 거푸집(주형)을 만들어 쇳물을 부어서 글자를 화폐처럼 찍어낼 수 있다면 글자 한 개의 거푸집으로 같은 글자는 얼마든지 주조할 수 있다. 따라서 활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활자의 거푸집이 있어야 하고, 이 거푸집은 밀랍이나 나무에 글자를 새긴 활자의 모형을 이용하여 만든다.
거푸집을 밀랍으로 만들 때 밀랍과 소나무 수지의 배합 비율은 기후에 따라 다르다. 여름에는 형태가 변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함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합성수지를 30% 정도 섞고 겨울에는 너무 단단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약 20%의 합성수지를 배합해 합성 밀랍을 만든다.
거푸집을 나무로 만들 때에는 매우 단단한 황양목을 사용했다. 밀랍에 글자를 새긴 활자의 원형에 주형토를 입혀 주형을 만들고 소성한 후에 녹인 청동을 부어 활자를 만드는 방식은 ‘밀랍주조법(lost-wax casting)’이라 하고, 나무에 글자를 새긴 활자의 원형을 모래에 찍어 주형을 만들고 녹인 청동을 부어 활자를 만드는 방식은 ‘주물사주조법(green sand mould casting)’이라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고려시대 금속활자는 국립중앙박물관과 북한 개성박물관에 한점씩 소장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복(覆)’ 자 금속활자는 개성 지역의 개인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활자꼴이 반듯하지 않고 조선시대 활자의 모습과는 다른 점이 많이 있다.
활자면이나 뒷면이 완전한 장방형이 아니고 네 변의 길이가 서로 달라서 1.2㎝, 1.15㎝, 1.2㎝, 1.0㎝정도로 활자 모양이 불균형할 뿐만 아니라 글자 모양도 위가 좁고 아래쪽이 넓다. 그보다도 더 특이한 것은 활자의 뒤쪽이 구슬을 끼었다 빼낸 듯한 타원형으로 오목하게 파여 구리 소비를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된다.
이 ‘복’ 글자체가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글자체와 같다는 것은 이것이 적어도 1232년 이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판단되며, 또한 놋쇠의 합금이 해동통보의 합금과 같은 성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도 해동통보와의 관계가 깊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따라서 이 활자 ‘복’ 자는 고려시대 활자 모양을 알게 해주는 유일한 증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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