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호 문화 세계 최고 품질의 고려 한지Ⅰ

2023.07.30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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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 품질의 고려 한지Ⅰ 


글·사진 이명우 운룡도서관·운룡역사문화포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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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한지 재료인 닥나무 껍질을 말리고 있는 모습 (출처: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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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한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종이는 크게 전통적으로 만들어 사용한 한지(韓紙)와 서양의 제지기술로 만든 양지(洋紙)로 구분하고 있다. 한지는 수부지(手浮紙) 또는 수초지(手抄紙)라 불리는데 수부지는 손으로 뜨는 종이로 통상 한지라 불리는 것을 말한다. 요즘은 한지도 만드는 방식은 수부지로 만드는 과정은 같지만 서양의 제지 기계를 이용해 대량생산하고 있어 이 한지를 기계 한지라고 구분한다.


한지는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 제지방식으로 만든 종이로 그 명칭이 중국의 수제지인 화지(華紙)나 일본의 수제지인 화지(和紙)와 구별하여 지칭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지 명칭의 유래에 대한 일부 주장이 여러 가지 있는데 양지의 반대 개념으로 서양의 것과 구별하려고 호칭했다는 설도 있다.


옛날에는 계림지·삼한지·고려지·조선지로 불렸으며 그 외에 재료와 만드는 방법과 쓰임새, 생산지와 크기에 따라 창호지·문종이·참종이·닥종이·저지 등으로 불리다가 일제강점기 이후에 그 명칭이 한지로 통일되어 사용하게 되었다.


중국 한나라 때 채륜에 의해 종이를 만드는 제지술이 시작될 당시는 우리나라에서 고조선 말기 시대였다.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의 세력이 정립되면서 고구려의 영토가 만주 일대까지 확장돼 지역적, 문화적으로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한 시기임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에는 2~4세기경에 중국의 제지술이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한지의 주원료인 ‘저(楮, 닥나무)’가 중국에서는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 사이에 ‘tag’ 혹은 ‘taig’라는 음으로 읽혔다고 한다. 그러므로 닥은 ‘저’의 음이 ‘닥’으로 읽히던 시기에 닥나무가 종이 원료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 같은 근거로 미루어 볼 때 2세기경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닥나무를 사용한 제지법과 종이의 명칭이 함께 전래됐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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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 국가무형문화재 한지장이 한지 뜨기를 시연하고 있다. (출처: 뉴시스)



3세기 후한 말 낙랑시대에 중국에서 종이와 제지법이 들어왔다는 설이 있다. 1931년 조선고적연구회 사업으로 발굴된 낙랑시대(BC 108∼AD 313) 고분 채협총에서 묵분(墨粉)이 붙어 있는 벼룻집, 섬유덩어리, 오수전, 화천, 채문칠권통, 동경 등이 발견되었다.


밀폐된 고분의 칠관 속에서 발견된 종이로 보이는 섬유의 모양이 닥종이가 물에 젖어 덩어리진 것과 같아서 한대의 종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것이 닥종이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미 고대국가 때부터 종이가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또한 <일본서기>에 의하면 285년에 백제의 왕인(王仁)이 일본에 전했다고 하는 <천자문>과 <논어>등이 종이 서적일 가능성이 매우 큰 점이다. 이때가 채륜이 제지술을 발명한 시기로부터 180년이 경과한 후임을 고려하면 이 시기에 제지술이 우리나라에 보급됐다고 볼 수도 있다.


4세기 말이라는 설은 불교가 고구려 소수림왕 2(372)년에 진(秦)의 순도와 아도가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와서 시작되었고, 384년 동진의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전파했는데 이때 많은 책과 제지술도 함께 전했을 것이란 생각에 근거한다. 당시 삼국은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던 시기였으므로 제지술과 불교의 전래는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고, 불경은 종이 수요를 촉발시키기 때문에 372년에 전래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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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삼국시대는 종이와 제지술이 전래된 이후 상당기간 중국 종이를 모방하여 제작하다가 이 시기 이후 독창적인 한지를 생산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한지의 태동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종이의 특성상 삼국시대의 문헌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이 없고 고분의 출토 유물로도 토분 구조상 식물질의 보존이 어려웠으므로 제지 기술에 관해 알 수 있는 문헌자료나 고지(古紙)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현재 고구려나 백제의 종이와 그 제지법에 관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으나 중국의 문헌에서 신라 종이의 우수성에 대하여 언급한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삼국 종이의 우수성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일본에 제지법을 전했으므로 7~8세기경을 우리나라 제지술이 일반화된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신라의 종이는 당나라에서 백추지(白錘紙), 계림지(鷄林紙) 또는 명주실로 만든 것 같다고 해서 견지(絹紙)라 불리며 당대 최고 품질의 종이로 알려졌다. 현존하는 신라 제지술로 만든 종이 인쇄물로는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물로 인정받은 국보 126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으로 이 종이는 751년 이전의 닥종이임이 고증됐다. 신라 경덕왕 14(755)년 때의 문서인 국보 196호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호암미술관 소장)>도 닥종이로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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