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호 문화 다문화적 관점에서 본 영웅들의 이면 (3) - 세종대왕

2021.06.28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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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적 관점에서 본 영웅들의 이면 (3)

- 세종대왕 


글.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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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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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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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군6진의위치




세종대왕은 우리의 역사에서 대표적인 성군으로 칭송받고 있다. 고구려를 강성대국으로 만든 광개토대왕이나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대왕, 약소국 신라를 강대국의 기반에 올려놓은 진흥왕, 삼국통일의 업적을 이룩한 태종무열왕과 문무왕, 거란의 침략을 격파한 고려의 현종, 조선의 기틀을 다진 태종과 중흥기를 이끈 영조·정조 등이 대표적인 현군(현명한 군주)으로 칭송받고 있지만, 그 누구도 세종의 위업을 넘어서진 못한다. 


세종대왕의 업적 중에서 가장 큰 업적을 꼽으라면 많은 사람이 두말하지 않고 ‘한글 창제’를 꼽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쓰는 한글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창제한 사람이 뚜렷이 존재하는 유일한 문자이다. 


그 어떤 문자보다 많은 음성을 표기할 수 있으며, 가장 과학적이며 독창적인 문자로 알려져 있다. 한글을 창제하기 위한 세종대왕의 노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우리와 언어구조가 같은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언어뿐 아니라, 인도의 산스크리트어까지 연구했다. 


그 외 세종대왕의 업적으로는 최윤덕과 김종서를 시켜 압록강 두만강 지역의 4군 6진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했던 것과 이종무로 하여금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한 것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동북아는 명나라가 서고, 원나라가 북쪽으로 밀려가 북원이 성립되는 상황이었다. 원과 명의 교체기에 동북 만주지역은 여진족이 할거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국제정세 속에서 압록강과 두만강 주변에 4군과 6진을 개척함으로써 동북지역 국경을 확장하고 획정한 업적으로 남겼다. 또한 상왕인 태종의 지시이긴 하지만, 즉위 원년에는 장군 이종무로 하여금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고, 신하로 복속시킴으로써 이후 100여 년간 왜구의 출몰이 없는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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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장군무덤(용인처인구광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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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함경도관노비사진




이외에도 세종대왕의 업적은 많이 있다. 그중 장영실 등을 등용하고 명나라에 보내 과학기술 서적을 들여오고 각종 발명품을 만들어 농업 기술력을 획기적으로 향상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해시계·물시계를 비롯해 자격루를 제작했고, 천문과 별자리를 관측하는 혼천의를 발명했다. 또한 애민 정신에 입각하여 조선의 각종 제도를 정비했으며, 관비의 출산휴가를 7일에서 100일로 늘려주고 남편의 출산휴가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 세종대왕도 다문화와 인권문제에서는 문제점이 없지 않았다. 세종대왕과 관련한 다문화 일화 중에서 꼽을 수 있는 것은 ‘백정’의 문제와 다종교의 문제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노비종모법을 채택함으로써 노비의 숫자를 급속히 증가시키고 조선의 신분질서를 고착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세종은 성리학이 바탕이 된 유교적 국가를 이상사회로 생각했던 군주였다. 따라서 세종대왕의 통치는 다문화 문제와 인권문제에서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먼저 인권문제에서 세종대왕은 상민, 양반의 신분질서를 확립시키고 노비를 늘렸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즉 세종 14년에 신하들의 건의로 제정된 노비종모법이 그것이다. 신라시대 서원경(지금의 청주)의 호구조사에 의하면 노비의 비율을 전체 인구의 6% 넘지 않았다. 그와 같은 비율은 고려에서도 지속되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노비종모법을 시행하고, 양천교혼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즉 양천교혼에 따른 노비증가를 억제한 것이다. 


하지만 고려시대 후반기에 들어오며 지방의 문벌에서 양천교혼을 통한 가솔노비의 숫자를 늘리는 편법이 유행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말에는 전체인구에서 노비의 비율이 급속히 증가하여 20%를 넘어섰다. 이로 인해 군역면제자가 많아지고, 국가의 세금이 걷히지 않는 등의 문제점이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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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초상:천민출신인장영실은태종에게발탁되어벼슬이종3품상호군에이르렀다. 



이에 태종은 정승 황희의 건의에 따라 노비종모법을 폐지하고, 노비종부법을 시행하였다. 양천교혼에서 주로 여성이 노비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는 노비종모법이 노비의 숫자를 늘리게 된다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버지의 신분을 따르게 하는 노비종부법을 채택하자 노비의 숫자가 전체 인구의 10% 미만으로 급속히 줄어들었다.이에 불만을 품은 사대부들이 세종에게 노비종모법으로 환원할 것은 강력히 건의하였다. 


그렇게 세종 14년에 노비종부법을 노비종모법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러자 또다시 노비의 숫자는 급속히 늘어났다. 심지어 양반 사대부들은 노비종모법을 악용하여, 여노비와 양인남자의 결혼을 강요하여 가솔노비를 늘리는 편법을 자행하였다. 그로 인해 세종 말년에 전체 인구 중 노비숫자는 30%에 육박하게 되었다. 


이러한 노비종모법은 세조에서 다시 노비종부법으로 바뀌었다가 성종 때에 양천교혼 금지,노비종모법이 최종적으로 시행되었다. 이로써 전체 인구의 40~45%가 천민과 노비인 조선의 신분 질서가 확립되었다. 즉 세종은 태종의 노비종부법을 노비종모법으로 전환함으로써, 노비를 급속히 늘리고 양반 사대부 중심의 조선사회 신분질서를 확립케 한 군주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이외에 세종대왕 후반기에 각종 개혁조치가 후퇴를 거듭하였다. 그중 하나가 노비출신이면서 상호군의 벼슬을 하고 있던 장영실의 관직을 박탈하고 쫓아낸 것을 들 수 있다. 장영실은 송나라 기술자 출신인 아버지와 동래부 관기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손재주와 기술이 남달라 태종에 의해 발탁되었다. 그리고 세종 때는 명나라에 파견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자격루나 혼천의 등 과학 기자재를 발명하였다. 하지만 세종 말년에 임금의 가마가 부서지는 책임을 물어 곤장 80대에 삭탈관직을 당하고 쫓겨났다. 그런데 정작 가마제작을 담당한 관리는 그대로 두었고, 장영실만 쫓겨나게 되어 여러 가지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즉 천문관측은 천자의 나라인 명나라의 권한이기 때문에 명나라 눈치를 본 세종이 장영실을 쫓아내기 위한 구실로 가마가 부서진 책임을 물어 쫓아낸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고, 또 천민 출신인 장영실이 못마땅한 양반 사대부가 모함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도 있다. 어찌되었든 장영실은 가마문제로 쫓겨나게 되었고, 다시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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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백정의사진:구한말인천항에서노역했던백정우)임꺽정:명종때황해도에서난을일으킨백정출신임꺽정



또 백정의 문제도 세종의 업적과 문제점으로 동시에 지적되는 사안이다. 백정은 거란과 원나라 등 유목민족이 난민으로 밀려 들어와 한반도에 살고 있던 이주민 집단이었다. 이들은 유목민족의 본성에 따라 이리저리 떠돌면서 사냥하고 다니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에 의한 범죄도 많았다. 이에 세종은 백정이라는 명칭을 이들에게 부여하여 정착하여 살도록 했다. 백정이라는 명칭은 고려시대 일반 백성을 부르는 명칭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종의 의도는 이주민 집단이었던 백정에게 ‘동화주의적’ 입장에서 이들이 정착하여 일정한 직업에 종사하며 살도록 배려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종의 희망과는 달리 ‘백정’은 이주민 집단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고, 차별적 신분질서를 고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조선의 차별적 신분질서는 홍길동과 임꺽정 그리고 장길산 등의 도적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즉 홍길동은 연산군 때 충청지역에서 활개를 치던 도적으로 출신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 연원은 농토를 잃고 부랑민이 된 양민들이 부자들의 집을 털고, 관아를 휘젓고 다녔던 사건이었다. 명종 때 황해도 지방에서 출몰했던 백정 출신의 임꺽정도 신분 차별과 탐관오리에 맞서 일어났던 사건이었다. 그리고 장길산은 백정과 같은 신분인 광대출신으로 차별받던 서얼(이영창), 승려(운부)와 손을 잡고 거사를 도모했던 도적이었다. 이러한 조선의 차별적인 신분이었던 백정과 광대 등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신분질서가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불가촉천민’과 같은 존재였다. 


이외에 세종의 동화주의적 입장은 다른 다문화와 종교문제에서도 드러난다. 즉 세종의 즉위식에는 불교, 도교뿐 아니라 고려시대에서부터 존재했던 무슬림의 ‘승려(이맘)’까지 즉위를 축하하는 경을 읽고 기도를 올렸다. 다시 말해 다종교인들이 세종의 즉위 때까지는 임금의 즉위를 축하하고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관습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의식은 세종에서 끝났다. 그 이후 즉위하는 군주들은 모두 유교적 예법에 따라 즉위식을 올렸다.


이렇듯 세종대왕 시대를 거치며, 조선은 모든 것이 유교적 신분질서에 입각하여 운영되는 국가가 되었다. 이는 세종대왕이 추구했던 유교적 이상 국가에 따른 각종 제도와 문물이 정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종의 통치로 인해 조선사회에서 양반, 상민, 천민의 신분질서가 고착되고 경직된 사회로 나가는 계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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