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호 문화 고려의 목판인쇄술과 세계문화유산 팔만대장경Ⅱ

2022.12.30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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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목판인쇄술과

세계문화유산 팔만대장경Ⅱ 


글·사진 이명우 운룡도서관·운룡역사문화포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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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복원 작업 (출처: 뉴시스)



11세기 초 현종 때에는 6000권에 달하는 대규모의 대장경 조판사업이 시작되면서 \

고려의 목판 인쇄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최고의 수준까지 도달하였다.



서기 706년경에 시작된 신라의 목판 인쇄기술은 그후 주로 불교의 경전을 인쇄하는 사업을 중심으로 이어져 온 듯하다. 그리고 그 규모도 차츰 커져 왔을 것이다. 신라의 목판 인쇄 기술은 고려왕조에 이르면서 잘 계승되고 발전하였다. 11세기 초 현종 때에는 6000권에 달하는 대규모의 대장경 조판사업이 시작되면서 고려의 목판 인쇄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어 최고의 수준까지 도달하였다.


고려 북방에 있는 거란(契丹)은 몽골계의 한종족으로 5세기 중엽부터 요하 상류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던 여러 부족으로 이루어진 민족이다. 10세기 초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흩어져 있던 부족을 통일하고, 916년 거란국의 건국을 선언하였다. 얼마 뒤에 요(遼)로 국호를 바꾸어 강국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이러한 세력을 배경으로 925년 2월에 동쪽의 발해를 침공해 이듬해 2월에 멸망시켰다.


성종 12(993)년에 고려는 서북변에 쳐들어온 거란 소선영(蕭遜寧)의 대군을 물리쳤지만, 거란은 이에 그치지 않고 현종 원년(1010) 11월에 재차 40만 대군을 일으켰고 이듬해 정월에는 개경을 침략해 대묘·궁궐·민옥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전례 없는 국란에 직면한 고려가 이를 타개하는 방법으로 대장경을 간행하여 불력(佛力)으로 외침을 물리치는 일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다사다난한 국정을 타개하며 문화대국으로의 위력을 떨치고자 대장경의 간행을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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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보 고려 초조대장경판(11세기) 2 . 국보 제206호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 (출처: 문화재청)

3. 국보 제265호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3 (출처: 문화재청) 4. 국보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판각 형태




고려시대의 학자 이규보가 저술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제25권(18~20쪽)에 있는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의하면 “거란이 침입하여 현종왕이 전라도 나주(羅州)로 피신하였다. 그 후 현종 왕이 1011년에 개성(開京)으로 돌아오면서 충북 청주 행궁에서 연등회를 열었다. 이때 대장경 목판을 새기기로 발원하였고 그 후에 거란군이 물러갔다.”라는 기록이 있다.


고려의 초조대장경은 1011(고려 현종 2)년부터 991년에 들어온 <개보칙판대장경>을 저본으로 삼아 대장경 목판을 새겨 초조대장경 5000축(軸, 두루마리)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문종 5(1051)년경에 거란으로부터 들여온 대장경을 저본으로 하여 대장경 목판을 다시 만들기 시작해 선종 4(1087)년에 2차 대장경 사업을 완료하였다.


고려의 수도 개경의 흥왕사와 현화사 등지에서 판각된 초조대장경 목판(木版)과 인쇄본은 그 후 대구 팔공산 부인사로 옮겨져 보관해 오다가 고려 고종 19(1232)년에 몽고의 2차 침입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고려 초조대장경의 목판은 소실됐지만 그것으로 찍은 두루마리 인쇄물은 국내와 일본에 남아 있다.


국내본은 249권이 있는데 성암고서박물관에 90권, 호림박물관에 89권이 두루마리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일본에는 임제종 사찰 남선사(南禪寺)에 1869권, 대마도 역사민속자료관에 600권이 있는데 이는 일본이 조선에 사신을 보낼 때마다 대장경을 달라고 요청해서 받아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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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팔만대장경> 재조본 사분율 권47, 50 (출처: 문화재청)




이 시기에는 대장경판을 새길 수 있는 것이 그 나라의 문화의 수준과 국력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이때 거란도 대장경을 찍어 냈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광종 9(958)년에 과거제를 실시한 고려에서는 과거시험에 응시하는 학생들의 공부에 필요한 시부(詩賦), 경서, 의서, 복서 등이 대량으로 필요해짐에 따라 학문을 위한 서적 인쇄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11세기에 들어서면서 송나라에서 책을 많이 수입하였고 유교 경전도 차츰 목판으로 찍어 내게 되었으며 지방에까지 도서들을 목판 인쇄토록 하였다. 이같이 고려는 유교 경전이나 불경 등 여러 서적들을 모으고 책 목판을 새기는 관판(官版) 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여 동경, 서경 등을 비롯하여 전주, 나주, 충주, 진주, 상주목 등에서 여러 서적들을 인쇄하였다.


1087년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송나라에서 귀국하여 속장경 4000권을 새겨서 찍게 하였다. 11~12세기의 고려의 목판 인쇄술은 송나라의 인쇄문화를 앞설 정도로 발달된 높은 수준의 기술을 보유하였다. 활발한 목판 인쇄로 인하여 고려 왕궁의 임천각(臨川閣)에는 수만 권의 책이 있고, 청연각(淸燕閣)에는 역사·사상·문학·문집 등의 책이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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