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호 문화 고려의 세계 최초 금속활자 발명Ⅰ

2023.02.23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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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세계 최초 금속활자 발명Ⅰ 


글·사진 이명우 운룡도서관·운룡역사문화포럼 회장



인쇄기술자들이 목판인쇄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인쇄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대두되는데

그 해법이 활자 인쇄이므로 이를 인쇄술의 시초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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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활자


신라의 목판인쇄로 만든 <무구정광대다라니경>으로부터 고려에 이어지는 인쇄기술의 발전은 목판인쇄에서 활자로 인쇄하는 것으로의 발전을 의미한다. 목판인쇄는 인쇄하고자 하는 책의 내용만큼 판을 만드는 데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고 한 종류의 책만 찍을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또한 목판의 부피가 크고 무거워 보관하기 어려우며 잘못 보관하면 습기에 의해 썩거나 오랜 기간이 지나면 나무 목판이 부식하여 부서진다.


목판 한개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많은 공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판각부터 제본까지 상당한 시간과 경비가 들었다. 고성 이씨의 이주정(李周禎, 1750∼1813)의 문집 간행 경위를 기록한 <대계집간역시일기(大溪集刊役時日記)>에 상세하게 목판인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동아일보,<대계집>으로 본 목판 제작과정, 2004. 04. 26)


<대계집(大溪集)>. 모두 3책으로 이를 위해 판각된 목판의 수는 140장이다. 판각용 원고인 판하본(板下本)의 제작과 교정을 맡은 전문가 2명과 판각 기술자인 각수(刻手) 3명이 동원됐고, 기간은 3년을 예상했으나 2년 반에 마친 것으로 돼 있다.


소요경비는 목판 1장당 2냥 8전이었다. 구체적인 지출항목은 “판값 1전을 비롯해 운반비 및 소금물에 삶은 비용 5푼, 판목 다듬기 및 마구리 작업 2전, 판각 비용 2냥 3전, 인부의 밥값 1전, 교정비 5푼”으로 기록돼 있다.


목판의 수가 140장이었으므로 총 392냥이 든 셈이다. <대계집>이 간행된 1884년 안동 인근 예천지역의 쌀 한 섬 값이 10냥이 조금 안 됐음을 감안하면, 이는 쌀 약 40섬을 살 수 있는 거액(쌀 1섬을 2가마니로 볼 경우 오늘날 1600만 원 상당)이다. 여기에는 판각된 목판을 인출하는 데 드는 종이값과 그것을 책으로 엮는 비용은 빠져 있다. 문집 발간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든 셈이다.


따라서 인쇄기술자들이 목판인쇄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인쇄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대두되는데 그 해법이 활자 인쇄이므로 이를 인쇄술의 시초로 보고 있다.


중국의 북송 때 필승이란 사람이 11세 기때 흙이나 진흙을 구워서 ‘교니활자(膠泥活字)’ 또는 ‘도활자(陶活字)’라는 것을 만들어서 인쇄를 시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북송의 정치가·군사가·과학자였던 심괄(沈括, 1031~1095) 이 저술한 <몽계필담(夢溪筆談)> 권18 기예(技藝) 편에 북송의 필승(畢昇, 990~1051)이 교니활자로 인쇄를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심괄 지음/최병규 옮김, <몽계필담하>, 범우사, 2002, 21쪽)


“경력연간(慶曆年間, 1041~1048)에 평민인 필승(畢昇)은 활자인쇄를 발명하였다. 그의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교니(膠泥)로 글자를 새겨 필획이 돌출된 부분은 동전의 두께만큼 두꺼웠는데, 글자마다 파서 불로 태워 그것을 견고하게 했다. 먼저 철판 한 덩이에다 그 위에 한 층의 송지와 밀랍 그리고 종이재 등으로 만들어진 약품을 바른다. 그리고 인쇄할 때에는 철재로 된 광(框) 즉 틀을 말함을 철판 위에 놓고 거기에다 빽빽하게 자인(字印)을 배열시킨다.


그 철광(鐵框)에다 완전히 배열하고 나면 바로 하나의 판(板)이 되는데, 그 연후에 불 위에다 놓고 굽는다. 송지와 밀납 등의 약품이 점점 용화되면 다시 하나의 평판(平板)으로 글자의 위를 누른다.


그래야 철판 위의 자인(字印)이 칼을 가는 돌처럼 평평해지기 때문이다. 만약 두세 권의 책만 찍는다면 이러한 방법은 경제적이지 못하지만, 수십 권이나 수백, 수천의 책을 찍는다면 매우 빠른 것이다.”


심괄의 이러한 기록을 통하여 볼 때 필승의 교니활자 제작과 사용 공정은 교니를 사용하여 활자를 만들고 만든 활자를 글자에 따라서 배열하였으며, 활자조판에 먹(墨)으로 칠한 다음 종이를 놓고 눌러서 인쇄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교니 진흙활자는 흙에 아교를 섞어 다진 다음 그것을 깎아서 글자를 새기고 불에 구워 만든 것이다. 교니활자 인쇄술에 관한 것이 문헌에 기술되어 있으나 송대에 인출된 교니활자 인쇄본의 실물이 전래된 것이 없다. 또한 학자들은 필승이 진흙 활자로 인쇄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아무리 활자를 잘 만든다 해도 흙으로 구워서 활자를 만들어 인쇄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특히 활자의 내구성은 물론 판을 짤 때 쓰는 점착성 물질을 송진과 종이 태운 재를 섞어 만들었기 때문에 응고력이 약해 인쇄 도중에 활자가 움직이거나 떨어져 실제 인쇄에는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활자의 시초는 목활자(木活字)의 사용을 활자의 시초라고 인식하고 있다. 목활자는 목판과 같은 재질의 나무를 사용하여 나무 활자를 하나씩 만들어 책의 내용에 따라 활자를 나무판에 조립하여 목판인쇄처럼 할 수 있어 획기적인 인쇄기술의 발명품이다. 또한 한 번 판을 짜서 책을 찍어낸 후 풀어서 필요할 때 다시 판을 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목활자 조판을 하기 위해 사용 빈도가 높은 같은 글자의 목활자를 수십 개 만드는 데 많은 인력과 시간이 소요되고, 인쇄하는 것도 당시에 여러 개의 목활자를 목판에 꽂고 줄을 맞추어 고르게 평면을 유지시켜 인쇄가 가능하도록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나뭇결의 조밀도 차이로 물에 젖으면 높고 낮음에 차이가 생겨 활자 면이 고르지 않으므로 인쇄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조판할 때도 목활자는 갈라지거나 터지기 쉽다.


처음 목활자의 사용 시기는 중국의 원나라 왕정이 1298년 목활자 3만여 개를 만들어 자신이 편찬한 <정덕현지(旌德縣志)>를 인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중국과 유럽의 고인쇄 전문가들은 14세기 초에 왕정에 의해 목활자 인쇄가 시작되었다고 중국과 유럽의 인쇄 전문가들이 주장하고 있다.


왕정은 평평한 판목을 만들고 인쇄하기 적합한 목활자를 제작했다. 또 ‘회전 활자대’라는 도구를 만들어 수많은 활자를 식자하기 편리하도록 정리했다. 이런 방식으로 1314년 무렵 6만여 자에 이르는 목활자를 만들어 지방의 소개서 100여 부를 인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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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활자 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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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활자 조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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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활자 인쇄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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