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호 문화 성공한 불의와 제5공화국 출범

2024.01.06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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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불의와 제5공화국 출범 


글 백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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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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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갖는 대표적인 상징성은 ‘희망’이다. 일제강점기의 저항시 중 하나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역시 비록 나라는 빼앗겨 얼어붙어 있지만 우리에게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봄은 빼앗길 수 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1968년 발표된 신동엽 시인의 <봄은> 역시 봄과 겨울이라는 상징적 대립을 통해 분단된 조국(겨울)의 통일(봄)을 염원하고 있다. 이처럼 ‘봄’은 암담하고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 더 나은 세상을 향한 ‘희망’을 상징한다.


지난해 11월 개봉한 영화 <서울의 봄(감독 김성수)>은 ‘잘 만든 영화’라는 평가를 받는다. 배우들의 연기도 일품이지만, 사실을 기반으로 한 영화로서 관객들이 ‘그 날들’을 되짚어보고 생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영화 <서울의 봄>은 개봉 이후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가 하면 영화 관람객 층도 1980년대를 기억하는 기성세대뿐 아니라 이 세대를 경험하지 못한 2030세대까지 폭넓은 선택을 받았다.


영화는 군사반란이 일어난 1979년 12월 12일 저녁 7시부터 이튿날 새벽 4시까지의 9시간을 다뤘다.


영화에서는 반란군과 진압군 지휘관 등의 이름을 허구의 이름인 전두광, 노태건, 이태신 등으로 대신했지만 외모와 말투에서 우리는 극중 인물이 누구를 모티브로 한 것인지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사실을 기반으로 한 영화이지만 영화 속 모든 부분이 실제 일어난 일은 아니다. 감독의 상상력으로 구성된 부분도 있고, 극적 재미를 더하기 위해 과장된 부분도 있다. 영화의 흥행과 함께 12·12 군사반란에 관한 관심도 높아져 1980년대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를 중심으로 관련 논문이나 기사, 책 등을 찾아보고 공부하는 현상까지 생겨났다. 영화가 주는 힘이다. 그렇다면 영화 <서울의 봄>이 다룬 역사 속 ‘서울의 봄’이 무엇인지 한번 짚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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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서울의 봄’은 대한민국에서 수많은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1979년 10월 26일부터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 17일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가 단행되기 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에 비유한 것으로 ‘서울의 봄’은 신군부가 투입한 계엄군에 의해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무력 진압되면서 종결됐다.


10.26 사건: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박선호, 박흥주 및 안가 경비원들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고, 차지철 경호실장, 정인형 대통령 경호처장, 안재송 대통령 경호부처장, 김용섭 대통령 경호관, 김용태 대통령 경호실 차량운행계장 등을 살해한 사건이다. 궁정동 안가에서 일어나 ‘궁정동 사건’ ‘박정

희 대통령 피격 사건’ 등으로도 불리나 ‘10·26 사건’이 더 익숙하다. 궁정동 안가에서 연회 중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가슴과 머리를 맞고 국군 서울 지구 병원으로 이송되는 중 사망했다.


12·12 군사반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김진기 육군 헌병감 등을 체포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전두환은 대한민국을 장악하고 정치적인 실세로 등장, 이후 1980년 5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5·17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5·17 쿠데타에 반항한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 계엄군을 보내 학살과 진압으로 강경 대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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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검증 중인 김재규와 박흥주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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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민정당 대표최고위원이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1987년 6·29 선언을 기획하고 수락하는 모습을 연출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그해 노 전 대통령이 민정당 대선후보로 지명된 직후 힐튼호텔에서 열린 축하연에서 대선 필승을 외치고 있다.




5·17 쿠데타: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하나회(신군부) 인사가 정권 장악을 위해 주도한 비상계엄 확대 조치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다. 신군부는 시국을 수습한다는 명목 아래 1980년 5월 17일 24시부터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정당 및 정치활동 금지·국회 폐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설치 등의 조치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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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 당시 광주 동구 금남로 전일빌딩 주변 모습 (출처: 5·18 기념재단)



또한 신군부는 계엄 확대와 동시에 계엄포고 제10호를 발령하면서 대학교 휴교령·언론보도 사전검열 강화·집회 및 시위 금지 등의 조치를 내렸다. 이는 헌법에 규정된 국회 통보 절차도 거치지 않고 계엄군을 동원해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한 채 벌인 불법조치였다. 비상계엄이 확대되기 직전 보안사에서 예비검속을 통해 김대중·김종필을 비롯한 주요 정치인 26명을 합동수사본부로 불법 연행, 학생·정치인·재야인사 2699명을 체포하고 신민당 총재 김영삼 역시 가택연금 처분을 내리는 등 정치 탄압을 감행했다. 이처럼 하나회는 비상계엄 기간 제5공화국 정권을 창출하는 과정에서 인권유린·헌정파괴 행위를 자행했다.


이 쿠데타에 대한 항의로 일어난 것이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다. 군부는 이를 무력으로 탄압했고이로써 ‘서울의 봄’은 막을 내렸다.


제5공화국

10·26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붕괴되고, 12·12 군사반란으로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 소장이 군부권력을 장악하면서 정치적인 실세로 등장했다. 한편 10·26 사건 이후 한국의 모든 정치 세력은 유신헌법을 폐지하고 민주적인 내용이 담긴 헌법으로 개정하기로 합의, 국민들은 오랜 1인 독재 체제를 마감하고 드디어 올 민주화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다. 하지만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반대 세력을 탄압하고 정국을 주도하기 위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후 임시국회를 무산시키고, 국보위를 설치해 실질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했다. 신군부 세력은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킨 후9월 제5공화국 헌법을 확정하고 10월 27일 공포했다. 전두환은 1980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에 오른 뒤, 개헌 후 1981년 3월 3일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를 통해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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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교육대 모습



전두환 정권은 집권 해인 1981년 5월 ‘국풍 81’ 축제를 개최해 광주 민주화운동 1주기에 대한 관심과 분위기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으며, 이듬해인 1982년에는 한국프로야구를 창설하고 야간통행금지 조치를 해제했다. 학원 두발·복장 자율화 정책을 시도하고 서울지하철 2·3·4호선 등의 선진국형 국토개발에 주력해 신군부에 반발하는 세력을 유화시키려 했다. 일명 ‘3S정책(프로스포츠 산업, 컬러 텔레비전 보급, 포르노 영화 장려)’도 이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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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 14일 서울 보안사령부에서 기념촬영한 12·12 주역들의 모습



한편 표면적으로는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새질서를 확립한다’는 목적, 즉 사회정화운동이라는 미명 아래 반인륜적 불법 기구인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범죄자 외에 무고한 시민까지도 수용해 인권유린을 자행했다. 전국의 불량배 소탕이라는 그럴싸한 명분 아래 5공 불법 정권 찬탈에 반기를 드는 정치적 반대파를 숙청하는 도구로도 사용해 실질적으로 정치범수용소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종교적으로는 이단을 척결한다는 이유로 전국의 목회자를 교육시키는 ‘청지기교육원’을 출범시켜 결론적으로 5공 정권을 정당화시키는 데 앞장서게 했다. 1980년 8월 6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위한 조찬기도회’에서는 당시 성결교 증경총회장이던 정진경(신촌성결교회) 목사가 “이 어려운 시기에 막중한 직책을 맡아서 사회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악을 제거하고 정화할 수 있게 해준 데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는 발언을 해 이를 생중계로 지켜보던 국민들뿐 아니라 같은 교단 목회자 사이에서도 큰 반감을 일으켰다.


하나회와 국보위

하나회(壹會, 一會)는 일심회(一心會), 신군부(新軍部)로도 불린다. 1963년 전두환, 정호용, 노태우, 김복동 등 대한민국 육사 11기생들의 주도로 비밀리에 결성했던 군대 내 불법 사조직이다. 1979년에는 육사 11기, 12기생을 중심으로 발전해 12·12 군사반란, 5·17 쿠데타를 주도했다. 한편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에 의한 군사정변이 일어날 당시 서울대학교 학군단(ROTC) 교관으로 근무하던 전두환이 육사생도와 졸업생 등 1000여 명을 동원해 5·16 군사정변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벌였고, 이를 계기로 박정희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 이후 하나회는 박정희에 충성을 맹세하며 대통령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키웠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는 1979년 12·12 군사반란, 5·17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가 내각을 장악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행정기구다. 보안사령부는 전두환의 지시로 시국을 수습한다는 명목 아래 1980년 5월 31일 대통령 자문기구 형식으로 최규하 대통령을 위원장으로, 전두환을 국보위 상임위원장으로 하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같은 해 8월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하고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된 후 국보위는 제5공화국 헌법 부칙에 따라 입법권을 가진 국가보위입법회의로 개편됐다.


신군부 세력은 안보 체제의 강화, 경제난국의 타개, 사회악 일소 등을 통한 국가기강의 확립을 내걸었지만 짧은 기간 동안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유혈 탄압, 김대중·김종필 체포, 김영삼 강제 정계 은퇴, 언론계와 공직자 숙청, 삼청교육대 발족 등으로 실제로는 공포정치를 이용한 정·재계 개편으로 신 지배구조를 수립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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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지난해 12월 17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22

일 개봉한 <서울의 봄>의 누적 관객수는 849만 5625명이다(12월 17일 기준). 사진은 서울 메가박스 코엑스에 붙은 <서울의 봄> 포스터의 모습 (출처: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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