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호 문화 정든 님 차마 잡지 못한 이별가
정든 님 차마 잡지 못한 이별가
‘가시는 듯 도셔오소서’… 여인의 애절한 당부
글·자료 이림 시나리오 작가, 허선(국악인)
사진 백은영, 이태교
경주 천관사지터
경주 천관사지터
이별의 노래 애틋한 <가시리>
<가시리>는 고려 가요 중 가장 애틋한 이별노래다. 일명 ‘귀호곡(歸乎曲)’이라고도 한다. 민요 <아리랑>을 연상케 하는<가시리>는 사랑하는 남자가 떠나려 할 때 여인은 아쉬운 마음으로 보내면서 ‘가시는 듯 돌아오라’고 간청한다.
<아리랑>은 상대가 십리도 못가 발병 나리라고 원망했지만 이 노래는 서운하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 있어 서러운 마음으로 보낸다고 했다. 그리고 가시는 듯 돌아오라고 간청한다. 어쩔 수 없이 이별해야 하는 사랑하는 ‘님’에 대한 기원이 애절하다.<가시리>는 <악장가사(樂章歌詞)>에 가사 전문이,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에 1장에 대한 가사와 악보가 실려 있다. 또한 이형상(李衡祥)의 <악학편고(樂學便考)>에 <嘉時理(가시리)>라는 제목으로 가사가 실려 있기도 하다.
<가시리>의 연구자료를 보면 가요 형식은 모두 4연으로 된 연장체(聯章體)라고 한다. 매 연은 2행으로, 각 행은 3음보격의 율격을 이루고 있다. 각 연이 끝날 때마다 “위 증즐가 大平盛代(대평성 )”라는 후렴구가 따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 각 행의 제3음보가 기준음절수보다 적은 음보(音步)일 경우 의미론적 긴밀성과는 상관없이 ‘나 ’이라는 투식어(套式語)가 맨 끝에 덧붙어 있다. 필자는 후렴구가 본래 노래의 맛을 잃어 빼 보았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리고 가시리잇고
날러는 엇디 살라 고
리고 가시리잇고
잡 와 두어리마
선 면 아니올셰라
셜온님 보내 노니
가시 도셔 오쇼셔
유교적 군신 간 노래로 개작
<가시리>는 신라 향가에서 비롯된 4행체 민요였던 것이 고려 궁중음악인 속악으로 개편되면서 투식어와 후렴구가 첨가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작품의 본래 의미와 후렴구의 의미가 호응되지 않는다.
신라 향가는 대개 불교적 내용을 담고 있다. 연구 논문을 종합해보면 신라 진평왕 때의 <서동요(薯童謠)>에서 고려 광종때 균여의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11수에 이르기까지 약370여 년 동안 성행했으며,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수 도합 25수로 나타나고 있다.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사랑을 담은 <서동요>와 조각가 양지가 선덕여왕을 사랑하여 지었다는 <풍요>는 발생 전설 및 창자(唱者)의 본질적인 민요다. 신라의 가요형식을 이어받은 고려의 가요 역시 4구체였다는 점 외에도, 삼국시대 중엽까지 한국말로 된 노래 중에 상류계급과 서민층의 노래가 분립되지 않았다.
궁중의 속악가사로 변하면서 임금의 총애를 잃지 않으려는 신하의 애틋한 충정을 표출함이 나타난다. 여기서 여인은 궁중의 신하로 바뀌고 ‘임’도 남정네에서 임금으로 바뀌게 된다. 충효를 강조한 시대적 이념가요로 개작된 것이다. 후렴구를 살리면 가시리 노래의 맛은 완전히 다르다.
이는 조선 가인 송강 정철(鄭澈)의 가사 <사미인곡>에서 연인이 임금과 신하의 관계로 설정되어 있는 것과 같다. 결국 이 노래는 궁중의 속악가사로 수용되면서 <사미인곡>처럼 신하가 임금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군신지도의 가사로 개작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각 연마다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후렴구가 반복 됨으로써 여인의 애틋한 한은 잃어버렸다. 궁중의 장엄한 잔치 분위기에서 임금과 그를 둘러싼 신하들의 성조(聲調)로 바뀌면서 조선 중기까지 연주되었던 것이다.
사자와의 이별이란 해석도
<가시리>는 여인이 사랑하는 임과 이별하는 정경을 절묘하게 그려내고 있다. 고대 가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다른 고려 가요에서는 볼 수 없는 이별의 깊이와 풍미를 담는 것이 <가시리>의 특징이라고 평가한다.
이별이 아니라 임과의 사별(死別)로 보는 견해도 있다. 갑자기 세상을 떠난 연인에 대한 환생을 염원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고대 불교사회에서는 삼생(三生)을 믿었다. 전생, 현생, 미생(前生, 現生, 未生)이다. 인간이 죽으면 다시 환생한다고 믿어 사자가 묻히는 고분에도 각종 살림도구를 묻어두었다.
갑자기 떠나는 임이 지금처럼 빨리 환생하기를 갈구했던 것인가. 국문학자 강대구는 <가시리 연구(청람어문학, 1995, 가시리)>에서 이 같은 주장을 했다.
<가시리>는 우리의 전통적 주제인 ‘이별의 한’을 주제로 하여 민요적 율격과 한의 정서가 가장 잘 표현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임을 떠나보내면서 심기를 살펴야 했던 숙명적 여인의 애절한 모습이 투영되었다.
‘이별의 정’을 나타내는 데 있어 여성적 감정 표출의 원류가 되어 이후에 김소월의 <진달래꽃> 등이 정조(情調)를 이어받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소월도 떠나는 임을 잡지 않고 가시는 길에 진달래 꽃길을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다. 슬픔을 참으면서 죽어도 눈물은 흘리지 않겠노라 다짐한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가시리> 작자는 천관녀?
고려 요는 대부분 작자미상이지만 <가시리>에 대한 가요가 경주 천관사(天官寺)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기록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21 천관사조에 이공승(李公升, 1099~1183)이 지었다는 한시 <유여일곡가사묘섬토동면만고전(有餘一曲歌詞妙蟾兎眠萬古傳)>이 그것이다. 이 글을 해석하면 ‘다만 한 곡조의 가사가 묘하여 달빛에 함께 잔다는 말이 만고에 전하네’라는 뜻이다. ‘섬토(蟾兎)’란 달을 아름답게 표현한 단어이다. <파한집>에는 기생 천관이 자신을 버리고 무정하게 떠난 김유신을 원망하며 지은 ‘원사(怨詞)’가 있었다고 하며 이공승의 시를 수록하였다.
<천관사(天官寺)>
寺號天官昔有緣 천관이라는 절 이름에 사연이 있는데
忽聞經始一悽然 새로 짓는다는 말 듣고 마음이 처연하네
倚酣公子遊花下 술 기운 가득한 공자는 꽃 아래서 노닐었고
含怨佳人泣馬前 한을 품은 아름다운 여인은 말 앞에서 울었다네
紅鬣有情還識路 말조차 정겨워서 그 길을 떠올렸을 뿐인데
蒼頭何罪謾加鞭 종놈은 무슨 죄라고 채찍만 때려댔는고
唯餘一曲歌詞妙 남은 것은 오직 한 곡조의 어여쁜 노래뿐
蟾兎同眠萬古傅 달 속에서 함께 자리라는 가사를 만고에 전하네
이공승은 <가시리>의 작자를 천관녀로 보고 있다. 그녀가 한 곡조 가야금을 타며 이별의 아픔을 노래했을 것으로 상정한 것이다. 그의 문명에 맞게 아름다운 시로 천관녀를 추모하고 있다.
이공승은 어떤 인물인가. 고려시대 추밀원지주사, 한림학사, 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청주 출신 명인으로 덕망이 있던 문신이다. 기록을 보면 매우 청렴한 행적이 보인다.
“그가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서 사신이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사절수행의 군사에게 은 1근씩을 거두는 게 상례였으나 전혀 거두지 않아 청렴함을 보였다.”
이공승은 한림학사를 역임하면서 시를 잘 지어 왕이 주재하는 잔치에 나가 창화한 것으로 역사에 남는다. 성품이 청렴결백하여 1170년 무신난 때도 화를 모면했다. 1173(명종 3)년 김보당(金甫當)의 반무인란으로 다시 문신탄압이 재개되자 불일사(佛日寺)에 숨어 있다가 이의방(李義方)에게 잡혔다. 의종 때에 연복정(延福亭)의 대역사를 일으켰을 때 원망을 사이의방이 죽이려 하였으나 문생 문극겸(文克謙)의 힘으로 모면하였다.
김유신과 천관녀의 사랑
신라 삼국통일의 원훈인 화랑 김유신의 젊은 시절 연인은 바로 왕실의 귀녀가 아닌 천관녀(天官女)였다. <삼국사기> 열전기록은 다음과 같다.
“김유신이 젊었을 때 어머니인 만명부인은 날마다 엄한 가르침을 더하여 교유(交遊)함에 잊지 말도록 하였다. 하루는 천관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만명부인은 얼굴을 마주하며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었다. 주야로 너의 자라남을 바라보고 있다. 공명을 세워 군친(君親)의 영광이 되어야 하거늘 지금 너는 술을 파는 아이와 함께 음방에서 유희를 즐기며 술자리를 벌이고 있는구나’ 하면서 울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황룡사역문화관 왕경조성과 실무진들과 함께
김유신은 즉시 어머니 앞에서 스스로 맹세하기를 ‘다시는 그 집 앞 문을 지나지 않겠다’고 하였다. 하루는 피로에 지쳐 술을 마신 후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김유신이 탄 말은 옛길을 따라서 잘못하여 창가(倡家)에 이르고 말았다. 김유신은 한편으로는 기쁘고 또 한편으로는 원망스러웠다. 천관이 눈물을 흘리면서 나와 맞이하였다. 그러나 공은 이미 깨달은 바가 있어 타고 온 말을 베고 안장은 버리고 되돌아왔다. 천관이 원망하는 노래를 한 곡 지었는데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경주에 천관사(天官寺)가 있는데 즉 그 집이다.”
천관녀를 일부 기록에선 창기라고 기록되지만 그녀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신궁의 여사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천관녀’는 하늘 제사를 주관하는 직을 나타내는 명칭인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에도 여사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바로 박혁거세가 누이인 아노를 시켜 주재했다는 것이다.
화랑도는 처음에는 진흥왕이 창제했으며 원화라고 불린 여성들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그러나 집단 내에서 서로 시기 질투로 남모, 준정이라는 여인 간의 살인 사건으로 폐지되고 젊은 남자들로 구성되게 되었다. 화랑의 시초격인 미시랑을 필두로 많은 화랑들이 낭도들을 지휘했으며 진평왕대 등장한 화랑이 바로 김유신이었다.
김유신은 비록 가야 왕족의 후예였지만 신라왕실의 외척으로 어머니 만명부인은 신라 왕실 갈문왕 입종의 딸이었다. 화랑도 안에는 일부 여성낭도들도 있었으며 그 무리 중 천관녀는 하늘에 제사를 지낸 제사장역을 맡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유신이 천관녀와 사랑에 빠지자 가장 염려한 이는 어머니였다. 아들이 큰 인물이 되기 위해선 신라왕실과 혼인을 이루어야 하는데 천관녀와 사랑에 빠지면 일이 그르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유신은 어머니의 질책을 받고 스스로 애마의 목을 베는 결단을 함으로써 천관녀와의 사랑을 끝냈던 것이다. 천관사 뒤편에는 도당산이라는 산이 있다. 신라의 귀족들이 모여서 정사를 논한 신성한 곳으로 보이는데 역사학자들은 천관사가 신궁(神宮)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학자들은 천관녀가 기생으로 알려진 것은 불교가 융성한 고려시대에 토속 신앙인 여사제를 비하하기 위해 낮추어 보았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또는 여자가 제사장이라는 것이 고려나 조선의 사회에서 불경하게 비추어져 기녀로 비하했을 가능성이 있다.
일설에는 천관녀가 사랑하는 님이 떠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삼국을 통일한 후 김유신이 천관녀와의 애틋한 사랑을 기억하고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절을 지었다는 것이다.
애틋한 비련 ‘천관사지’
경주 천관사지(慶州 天官寺址)는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244번지 반월성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신라 때 세워져 고려 시대까지 존속했으나 조선시대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절터에는 복원해 놓은 석탑 1기와 기와조각들만 남아 있다. 이곳에는 원래 사각기단을 갖춘 팔각석탑이 있었다고 하는데 1919년 석재를 구하는 주민들이 탑을 파괴하였고, 이후 계속 파괴가 진행되어 석탑의 하층부 기단만 남아있었다.
팔각 석조물은 보기 드문 예다. 삼국시대 팔각건물은 제사 유적으로 평양의 절터, 하남 이성산성 등에서 조사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천관사 팔각석탑은 신궁유적일 가능성이 있다. 외로운 영혼 천관녀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설화를 입증하는 것인가.
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0년 이곳을 발굴 조사한 후 석탑복 원도를 작성하여 주변에 흩어져 있던 석탑 부재를 활용, 팔각 몸통의 3층석탑을 복원하였다. 아울러 경주시가 2020년까지 15억 원을 들여 건물지와 탐방로를 정비하려 했는데 학계와 경주시 간의 석탑의 옥개석을 둘러싼 논란이 일어 지금은 중단된 상태라고 한다.
경주 천관사지에서 찾아진 와편
‘가락 있는 곳’ 취재반은 하루 전에 늦게 출발, 새벽에 천관사지에 도착했다.
절터 허허로운 벌판 새로 복원한 석탑이 취재반을 맞는다. 이곳이 화랑 김유신과 천관녀의 사랑을 증거하는 유적인가. 절터를 돌며 신라와편을 조사했다.
여름 잡초가 무성한 절터 곳곳에 잘 다듬은 석재 편과 삼국시대 와편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띈다. 천관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지었다는 설화를 뒷받침하듯 통일신라 이전의 와편의 잔해가 찾아진다.
에필로그
‘내일은 미스트롯2’ 결승전 우승자 양지은씨가 부른 트로트<가지를 마오>가 <가시리>의 정서를 담고 있다. 떠나가는 연인을 향한 한국 여심의 애절한 호소가 지금도 이어지는 것인가. 그러나 요즈음 연인들은 떠나려면 언약도 가져가고 손까지 놓지 못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가지마오 가지를 마오
그 강을 건너지마오
가려거든 가시려거든
이 언약 가져가시오
검은머리 파뿌리 되는 날까지 지켜준다고
내 손잡고 눈물로 맺은
언약을 잊지마시오
강물에 떠내려가는
마지막 꽃잎일새라
이손을 놓지 못하오
님이여 움켜쥐시오 (하략)
서운하면 오지 않을지도 모를 걱정을 하며, 가시는 길에 진달래 꽃길을 만들어 주겠다는 덕성을 잃었다. 이별의 종장 위해 비극이 늘어나는 세태는 바로 아름다운 이별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경주 천관사지터에 남아있는 석탑을 살펴보고 있는 답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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