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호 문화 남진-나훈아처럼, 스포츠에도 라이벌 관계 많아
남진-나훈아처럼,
스포츠에도 라이벌 관계 많아
라이벌보다 더 소중한 걸 깨닫게 해 준 파리올림픽
글 전경우 스포츠저널리즘 박사
‘가황’ 나훈아가 은퇴를 발표하면서 많은 팬들이 섭섭함을 감추지 못했다. 오랜 세월 한국 가요계를 이끌어 온 대스타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다는 사람도 있다.
나훈아 하면, 바늘과 실처럼 따라붙는 이름이 있다. 남진이다. 나훈아와 남진, 남진과 나훈아, 누구 이름을 먼저 불러야 할지 모를 정도로 우리 가요 역사에서 최고의 라이벌로 꼽혀 왔다.
남진은 1965년에 데뷔해 ‘울려고 내가 왔나’ ‘가슴 아프게’가 잇따라 히트하면서 정상에 올랐다. ‘님과 함께’ ‘마음이 고와야지’ ‘빈잔’ 등 무려 1000여 곡을 부르며 전성기를 누렸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의상을 입고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러 소녀팬들의 마음을 뒤흔 들었다. 원조 오빠부대였다.
나훈아는 남진보다 1년 늦은 1966년 ‘천리길’로 데뷔했다. 1년 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히트하면서 남진의 아성에 도전하는 거물급으로 주목받았다. ‘무시로’ ‘잡초’ ‘테스형!’ 등 얼마 전까지 내놓은 신곡까지 2600여 곡을 불렀다. 노래방에서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가 나훈아의 것이다.
남진(출처: 뉴시스)
1984년 2월 나훈아의 제의로 모 일간지 기자와 남진, 셋이 만났다. 나훈아와 남진이 팔씨름하는 사진과 함께 ‘나훈아와 남진 20년 라이벌 청산’이란 제목의 기사가 나갔다. 기사는 두 사람이 “그동안 치열했던 대립 관계는 가수라는 인기 직업상 서로 더 잘해 보려는 발전적인 경쟁이었지 인간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이제 무대에도 같이 서면서 가깝게 지내겠다”고 전했다.
당시 기사를 쓴 기자의 후일담에 따르면 그때 두 사람이 밝힌 나이는 남진이 두 살 위였다. 하지만 서로 반말로 친구처럼 편하게 지내기로 했다고 밝혔다.
나훈아(출처: 뉴시스)
국가대표 경기(A매치)에 100회 이상 출전한 6명의 대한민국 축구 스타들.
위) 왼쪽부터 김호곤, 차범근, 조영증. 아래) 왼쪽부터 조광래, 허정무, 박성화
얼마 전 남진은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나훈아의 은퇴소식에 대한 심경을 밝혔다. 남진은 “시대가 만들어 준 명라이벌이었다. 라이벌이라는 것은 대중들이 만들어 준 거다”라고 말했다.
남진은 또 “실제로 나훈아는 예뻐하는 후배였다”며 “갑자기 옆 사람이 떠나버리니까 놀랐다. 의지할 곳이 없는 것 같아 아쉽다”고 했다.
남진과 나훈아. 이 두 라이벌 덕분에 한국 가요가 더 풍성해지고 발전할 수 있었다.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하고 증오한 게 아니라, 서로 격려하면서 건전하게 경쟁하는 생산적인 관계였다.
스포츠에선 라이벌 하면 ‘차붐’ 차범근과 ‘진돗개’ 허정무를 빼놓을 수 없다. 둘은 선수 시절 함께 국가대표로 뛰면서 수많은 명장면을 만들었고, 국민들을 웃고 울게 만들었다. 하지만 둘은 늘 라이벌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
차범근은 경신고 시절 이미 국가대표가 된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121번의 국가대표 경기(A매치)에서 55골을 넣었고, 1979년 독일 분데스리가로 건너가 리그 308경기에서 98골을 터트렸다. ‘갈색 폭격기’란 별명으로 독일과 유럽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족적을 남겼다.
허정무도 만만찮다. 87번의 A매치에서 30골을 터트렸고,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에서 3년간 활약하며 77경기에서 15골을 넣었다. 차범근과 함께 출전한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에서 아르헨티나의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를 온 몸으로 방어하는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가 됐다.
허정무가 다리를 뻗어 태클을 걸었는데 마라도나의 정강이를 걷어찬 꼴이 되고 말았다. 외신들은 ‘태권도 축구’라고 빈정댔지만 온몸을 불사르는 투혼에 국민들은 박수를 보냈다. 그 대회에서 아르헨티나는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차범근과 허정무, 두 사람은 선수 은퇴 후 감독으로 변신하고서도 줄곧 라이벌 관계로 관심을 모았다. 프로축구 K리그에서 차범근은 수원 감독으로, 허정무는 전남 감독으로 활약했다. 두 팀이 맞붙을 때마다 언론은 ‘라이벌 대결’이라며 흥분했다. 두 사람 모두 국가대표 감독을 역임하며 명지도자로서 이름을 남겼다.
허정무 감독은 예전 방송에서 선수시절 연세대 소속이었던 자신과 고려대 소속이었던 차범근과의 라이벌 관계에 대해 “라이벌 의식은 당연히 했다. 늘 이기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판단해 봐도 선수로서 나보다 훨씬 뛰어난 분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허 감독은 “나는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에서 뛸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포지션이라도 제대로 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 부분에서 차범근 선배가 최고라고 인정한다”고 했다.
허 감독은 1980년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에 진출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맞대결 때 허정무 선수가 아르헨티나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를 수비하는 모습(출처: 연합뉴스)
서독의 축구전문지 <키커>가 1980년 2월호 표지에 차범근
선수를 내세웠다. (출처: 연합뉴스)
2024 파리올림픽 탁구 혼합복식 시상식에서 동메달을 차지한 한국 임종훈, 신유빈과 은메달을 차지한 북한 리정식, 김금용 등이
시상대에서 삼성 Z플립6로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출처: 연합뉴스)
차 감독은 한 해 전인 1979년 독일 분데스리가로 떠났다. 이에 대해 허 감독은 “차범근 감독의 덕을 봤다. 유럽에서 대한민국 축구를 전혀 모를 때 차범근 선배를 보고 나를 발견한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스포츠 사상 가장 화제가 된 라이벌은 야구에서 ‘무쇠팔’ 최동원과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이었다. 두 사람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명투수들이었다.
최동원은 1984년 한국시리즈 4승과 통산 평균자책점 2위(2.46)라는 눈부신 기록을 달성했다. 선동열은 통산 평균자책점(1.20)과 완봉승(29회), 승률(0.785) 부문 1위에 오른 ‘국보급’ 투수였다.
최동원과 선동열은 현역 시절 딱 세 차례 맞대결을 펼쳤다. 연세대와 고려대, 경상도와 전라도, 롯데 자이언츠와 해태 타이거즈, 주무기인 커브와 슬라이드 등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는 요소도 극적이었다. 두 거물급 투수의 대결은 팬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최동원과 선동열은 프로무대에서 1승 1무 1패를 기록했다. 기막힌 무승부다. 1987년 5월 16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세 번째 대결이 펼쳐졌다. 연장 15회, 4시간 56분 혈투 끝에 2대 2 무승부로 끝났다.
최동원은 209개, 선동열은 232개를 던졌다. 둘 다 완투했다. ‘양팀 선발 15이닝 2실점 완투’라는 역사적 기록과 함께 팬들이 가슴에 ‘최동원’ ‘선동열’ 두 별의 이름이 영원히 새겨졌다.
선동열은 경기 인터뷰에서 “최동원 선배라는 거대한 목표가 있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동 100원은 “앞으로 한국 프로야구를 이끌어갈 최고의 투수”라며 선동열을 칭찬했다. 진심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아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이 ‘마지막 승부’는 훗날 영화 <퍼펙트 게임>으로 만들어졌다. 조승우가 최동원역을 맡았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라이벌 관계가 있다. 스포츠에서 한국의 라이벌은 늘 일본이었다. 식민지 시대의 설움을 스포츠를 통해 씻어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북한과도 라이벌 관계였다. 남북이 정치, 군사적으로 대립한 탓이다.
한일 축구는 가장 뜨거운 관심을 모았던 라이벌 대결이었다. 일본을 이기면 ‘대첩’이라며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친 것에 비유하며 즐거워하고, ‘후지산이 무너졌다’며 통쾌해 했다. 한일전에서 골을 넣거나 이기면 영웅이 되고, 지거나 골을 못 넣으면 바로 역적이 됐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일본 축구는 이제 한국의 라이벌이 아니다. 우리보다 몇 수 위인 축구 강국이다. 2024 파리올림픽에 일본은 남녀 대표 팀 모두 본선에 나섰다. 일본 남자 팀은 8강까지 올랐고, 여자팀은 우승 후보 브라질을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우리나라는 남녀 모두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어쩌다 운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예견되고 걱정해 왔던 일이다.
북한도 죽기 살기로 맞붙던 라이벌 시대가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국력만큼이나 스포츠에서도 실력 차이가 너무 많이 나기 때문에 라이벌 관계가 될 수가 없다. 지난 파리올림픽에서도 남북 대결로 관심 받을 일이 없었다.
파리올림픽에서 남북한 선수들이 만나도 대화도 하지 않고 인사도 없었다. 시종 냉랭했다. 북한 선수들은 감시와 통제 속에서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마음놓고 웃지도 못했다. 그 어린 청춘들이 무슨 죄가 있을까, 그들도 모처럼 해외에 나와 사람들과 어울리고 맛있는 것도 먹고, 사진 찍으며 추억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파리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은 참 멋있었다. 승패와 상관없이 미소를 잃지 않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 줬다. 스포츠는 이기고 지는 것보다 그것을 통해 즐거워지는 것, 행복해지는 것, 조금 더 성장하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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