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호 마루대문 나라가 어려울 때 붓 대신 창과 활을 들던 그들, 선비

2024.09.07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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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어려울 때

붓 대신 창과 활을 들던 그들,

선비 


글 백은영 사진 박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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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君子)는 참된 삶을 위해 사고하고, 그 사고를 바탕으로 실천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바로 이 ‘군자’가 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특히 선비들은 군자의 덕목으로 인(仁)을 강조했는데, 이는 유교 사회의 기본적 도덕규범인 ‘오륜(五倫)*’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인(仁)과 함께 ‘의(義)’ 또한 중시했으니, 이황은 “저들이 부유함으로 한다면 나는 인(仁)으로 하며, 저들이 벼슬로 한다면 나는 의(義)로써 한다.”는 말을 남겼을 정도다.


공자는 이러한 군자가 갖춰야 할 덕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렸으니 군자는 자고로 위엄이 있어야 하며, 그 위엄 속에는 인애와 자비, 온유함과 긍휼함이 있어야 하고, 매사에 이치적이고 논리적이며 합리적인 사고로 지혜를 겸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군자삼면(君子三面)이라 한다.



*오륜(五倫)

父子有親(부자유친: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친함이 있어야 한다.) 君臣有義(군신유의: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로움이 있어야 한다.) 夫婦有別(부부유별: 부부 사이에는 구별(분별)이 있어야 한다.) 長幼有序(장유유서: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 朋友有信(붕우유신: 벗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親’은 단순히 친밀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仁)’을 의미하는 것이며, ‘別’이란 단순히 구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부 간의 역할이 다르며 이를 존중한다는 ‘禮’의 정신을 담고 있다. 삼강오륜의 親, 義, 別, 序, 信은 인의예지신(仁, 義, 禮, 智, 信)이라는 유교의 다섯 가지 기본적인 덕목을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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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논산시 노성면에 위치한 노성궐리사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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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유학을 공부하는 유생들’을 선비라고 불렀다. 이들은 학식이 있고 행동과 예절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관직과 재물을 탐내지 않았으며 고결한 인품을 지닌 이들로 여겨졌다. 한마디로 말해 선비는 ‘도덕과 학문을 지키는 사람’으로 나라가 어지러울 때는 붓 대신 창과 활을 들고 전쟁터로 나가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킬 줄 알았다.

당시 선비들은 청렴, 검소, 절제 등의 가치관에 따라 인(仁), 의(義), 효(孝), 제(悌)등의 덕목을 실천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 따른 이상적 국가의 건설을 평생의 업으로 삼았다. 이렇듯 선비들은 이상적 인격체인 군자(君子)를 지향하며 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바로 이와 같이 선비들이 추구했던  덕목과 가치관의 총체가 바로 ‘선비정신’이다.

오늘날 이 선비의 정신을 이어가는 이들을 유림(儒林)이라 부른다. ‘선비정신’은 경기도와 전라도, 충청도 지역에 근간을 둔 기호학파와 영남지방에 근간을 둔 영남학파 등으로 나뉘어 계승돼 왔으며, 이를 가르치는 학문인 성리학은 조선의 중심 사상이자 사회 윤리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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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에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하다 중국 심양에 끌려가 순절한 홍익한·윤집·오달제 삼학사(三學士)의 우국충절을 기리기 위

해 세운 사당인 현절사가 있다. 사진은 지난 7월 남한산성을 찾은 논산시 유림협의회 회원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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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시 유림협의회 양철야 회장은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붓 대신 창과 활을 들고 

전쟁터로 나가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킬 줄 알았던 유림들의 ‘선비정신’을 오늘날 다시금 생각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번 역사유적 탐방을 기획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선비정신 되살려야

최근 이 ‘선비정신’을 오늘날에 되살려 나라의 정사(政事)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남한산성 및 삼전도비를 다녀간 이들이 있다.


지난 7월 26일 논산시 유림협의회(회장 양철야)는 ‘남한산성과 삼전도비 앞에서 충절을 생각한다’는 주제로 120여명의 회원들과 함께 역사유적탐방을 진행했다. 이번 탐방은 논산시(시장 백성현)의 후원으로 진행, 논산시는 평소에도 지역 유림들의 활동 및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탐방을 기획한 논산시 유림협의회 양철야 회장은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척화에 앞장섰던 문정공 팔송 윤황 선생이 인조 임금을 모셨던 곳”이라며 “인조 임금이 피신 47일 만에 항복하고 한겨울 먼 길을 걸어 삼전도(지금의 송파)까지 가서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했던 뼈아픈 역사가 서린 곳”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윤황 선생의 아우 충헌공 윤전 선생은 봉림대군 등 왕실 가족을 모시고 오랑캐와 항전하던 중 강화도에서 순절당하셨으며, 윤선거의 부인이자 윤증 선생의 어머니인 공주 이씨 역시 강화도가 함락당하자 자진 순절하는 등 끝까지 청나라와 맞서 싸운 기록이 있다”며 “조선 후기 파평 윤씨 가문은 척화파의 대표세력이자 사족 가문으로 이름을 알렸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다. 병자호란 당시 충청도관찰사 정세규가 이끄는 충청도 병력이 경기도 용인과 광주시의 험천이라는 곳에서 기습을 받아 전멸했다. 이때 정세규 휘하 충청근왕군에 합류했던 연산현감 김홍익 역시 험천 전투에서 피살됐으며, 포천현감 권대유는 포천의 속오군을 이끌고 청군의 포위를 뚫고 남한산성에 입성했다.


양철야 회장은 “병자호란 당시 수령들은 속오군을 지휘하거나 근왕군에 합류하는 등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앞장서서 나라를 지키는 등 유림으로서, 선비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며 “병란 당시 유림들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를 기호학파의 본산지에 있는 유림들에게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싶어 오늘 답사를 기획하게 됐다”고 전했다.


한편 노성궐리사 제장이자 성균관 부관장이기도 한 양철야 회장은 인성교육에 관심이 많아 1960년대에 이미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설립했으며, 유교의 근본정신인 충효사상을 비롯한 ‘인의예지신’이 다시금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덕목이 될 수 있도록 앞장서고 있다.


충절을 보여주는 현절사

역사는 병자호란 당시 인조 임금의 ‘삼배구고두(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림)’를 삼전도의 치욕이라 부르지만, 치욕의 역사라고 해서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 역시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이는 지금의 위정자들이 더욱 새겨들어야 할 것으로, 나랏밥을 먹는 사람들이라면 당연 나라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고 사랑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남한산성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남한산성에 있는 현절사(顯節祠)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선양(심양)에 끌려가 순절한 홍익한·윤집·오달제 삼학사(三學士)의 우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1688(숙종 14)년 삼학사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유수 이세백이 세웠고 1693년 봄에 사액(賜額)했다. 이후 1699년부터는 삼학사와 같이 청나라에 항복하기를 반대했던 주전파(主戰派)의 거두 김상헌·정온 두 충신도 함께 모시고 있다. 이런 선현들의 의리정신을 전승하고 널리 현양하기 위해 현절사 유사들의 주관으로 매년 음력 3월과 8월 중정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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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한남루. 한남루는 정조 22(1798)년에 광주 유수 홍억이 행궁 입구에 세운 2층 누문이다. 행궁이란 임금이 항상 거처하는 궁

궐을 떠나 임시로 머무는 별궁으로 여러 가지 목적에 따라 많이 건립됐다. 남한산성 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에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해 인조 4(1626)년에 건립됐다. 실제로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여러 신하들과 함께 머물며 항전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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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논산시 노성면에 있는 노성궐리사는 공자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궐리(闕里)는 공자의 고향인 중국 산동성 곡부현의 ‘궐리촌’에서 유래했다. 

숙종42(1716)년 송시열의 제자가 니구산(尼丘山) 아래에 궐리사를 세우고 다음해에 공자의 영정을 봉안했다. 양철야 회장이 궐리사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 심양으로 끌려간 삼학사는 청 태종의 국문에 “나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못함을 안타까워할 뿐이다” “몸 바쳐 나라를 구하려 했던 뜻은 죽어도 떳떳하다”와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들의 기개에 감탄한 청 태종은 삼학사가 죽은 뒤 그들의 충절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으나 청나라 몰락 후 파괴돼 방치됐다가 1930년대에 발견됐다.


한편 논산시 광석면 오강리 227에는 윤황의 학문과 덕을 추모하기 위해 숙종 원년인 1675년에 김수항 등이 세운 노강서원(魯岡書院)이 있다. 노강서원은 1682(숙종 8)년에 사액서원으로 승격되면서 윤황 외에도 윤문거를 추가로 모셨고, 1723년에는 윤선거와 윤증을 추가해 모두 4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 심양으로 끌려간

삼학사는 청 태종의 국문에

“나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못함을 안타까워할 뿐이다”

“몸 바쳐 나라를 구하려 했던 뜻은

죽어도 떳떳하다”와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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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야 노성궐리사 제장이 궐리사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이 중 석호 윤문거(1606~1672)는 윤황의 넷째 아들로 1633년 문과에 급제, 1636년에는 정언이 돼 청과의 화친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평생 학문에만 뜻을 둔 인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기품과 학문, 덕이 높아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1682년에 노강서원에 제향됐다.


석호 윤문거의 아우인 윤선거는 송시열·송준길과 더불어 ‘충청5현’으로 불리는 인물로 이미 20세에 문학으로 이름이 났으며, 그의 아들인 명재 윤증은 어려서는 시남(市南) 유계(兪棨)에게 학문을 배우고 윤증 고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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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 앞에서 나라를 생각하다

남한산성을 둘러본 논산시 유림협의회는 이후 송파구로 자리를 옮겨 서울 사적 제101호로 지정된 서울 삼전도비를 찾았다.


인조 14(1636)년 봄, 조선은 형제 관계를 군신 관계로 바꾸자는 후금의 요구를 물리쳤으나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바꾼 청 태종은 병자호란을 일으키게 된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항거했지만 결국 당시 한강나루터였던 삼전도로 나와 청 태종의 신하가 되는 의례를 거행했다. 인조 17(1639)년에 세운 삼전도비의 원래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로 치욕의 역사가 기록돼 있다. 삼전도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로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용 모양으로 장식했으며, 몸돌 앞면에는 청에 항복했던 상황과청 태종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을 만주문자(왼쪽)와 몽골문자(오른쪽)로 새겼다. 뒷면에는 한자로 남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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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시 유림협의회(회장 양철야)는 지난 7월 26일 ‘남한산성과 삼전도비 앞에서 충절을 생각한다’는 주제로 

120여 명의 회원들과 함께 역사유적탐방을 진행했다.



비석 옆에 있는 작은 크기의 받침돌은 제작 당시 더 큰 비석을 세우라는 청의 요구로 버려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전도비는 고종 32(1895)년에 청일전쟁이 끝난 뒤 땅속에 묻혔던 것이 몇 차례에 수난 끝에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문화재의 위상을 갖추게 됐다. 이후 원래 위치(현재 석촌호수 서호 내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세워야 한다는 의견을 수렴해 2010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보호각을 설치했다.


남한산성과 삼전도비를 돌아보며 답사를 마친 논산시 유림협의회 양철야 회장은 “이번 답사를 통해 나라가 힘을 잃으면 얼마나 큰 어려움에 처하는지, 백성들은 또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면서 “당시의 역사를 돌아보며 현재의 유림들이 다시금 선비정신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으로 오늘 이 자리를 마련했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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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7(1639)년에 세운 삼전도비의 원래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로 치욕의 역사가 기록돼 있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항거했지만 결국 당시 한강나루터였던 삼전도로 나와 청 태종의 신하가 

되는 의례를 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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