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호 마루대문 재개장된 광화문 광장 역사와 문화 모두를 품다
재개장된 광화문 광장
역사와 문화 모두를 품다
서울의 중심 종로. 그 가운데에는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경복궁이 있다.
수많은 수난 속에서도 위용을 잃지 않고 있는 경복궁 남쪽으로는, 든든한 광화문도 함께 있다.
이 광화문 앞에 지난달 6일 새롭게 조성된 광장이 시민들에게 공개됐다.
이번에 재개장된 광화문 광장은 역사와 문화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현대와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품고 있다.
그렇다면 과거 광화문 앞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글 이예진 사진 남승우
지난 8월 7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 앞 분수대에서 아이들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1년 9개월 간의 재구조화 공사를 거쳐 재개장한 광화문 광장은 양방향 총 3개 차로를 없애고
1만 8840㎡보다 2.1배 넓어진 4만 300㎡의 대형 녹지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경복궁의 남문이자 궁성의 정문인 광화문은 다른 문에 비해 규모가
웅장하고 화려했다. 특히 5대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형식을 갖추고 있다.
석축기단에 3개의 홍예문(虹霓門) 중 가운데 칸이 가장 높고 크다.
임금이 행차하는 문이기 때문에 천정에는 주작(朱雀)을 새겼다.
그리고 좌우 문으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출입했다.
경복궁 광화문(光化門)의 정면 모습이며 아직은 광화문 앞의 월대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는 상태로 보인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조선의 가장 큰 길
“뒤에 궁성을 쌓고 동문은 건춘문이라 하고 서문은 영추문이라 하며 남문은 광화문이라 했는데, 다락 3간이 상·하층이 있고 다락 위에 종과 북을 달아서 새벽과 저녁을 알리게 하고 중엄을 경계했으며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삼군부·육조·사헌부 등의 각사 공청이 벌여 있었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 4년 9월 29일
조선의 수도를 한양으로 삼으면서 태조와 정도 전은 한양 중심에 경복궁을 지었다. 그중 광화문은 경복궁으로 출입하는 통로이자 가장 큰 길이었다. 광화문의 이름은 처음 정도전이 ‘사정문(四正門)’이라고 지었으며 오문(午門)으로도 불렸다.
이후 ‘왕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로 ‘광화문(光化門)’이라고 바꾸면서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1911년 광화문과 해태상의 모습이 드러난 거리풍경이다. 광화문과 그 앞에 설치된 월대의 모습이 확연히 잘 드러나 있다.
왼쪽에는 말을 타고 내리기 위한 노둣돌의 일부가 살짝 보인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경복궁의 남문이자 궁성의 정문인 광화문은 다른 문에 비해 규모가 웅장하고 화려했다. 특히 5대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형식을 갖추고 있다. 석축기단에 3개의 홍예문(虹霓門) 중 가운데 칸이 가장 높고 크다. 임금이 행차하는 문이기 때문에 천정에는 주작(朱雀)을 새겼다. 그리고 좌우문으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출입했다.
그리고 광화문은 어가(御街)와 연결되어 있어 앞으로는 육조거리가 조성돼 있었다. 이 육조거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광화문 동편으로 의정부를 시작해 남쪽 방향으로 이조, 한성부, 호조가 있었고 반대쪽 서편에는 예조,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 장예원이 배치돼 있었다. 이 같은 형태는 조선 초기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거의 변함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치는 변함이 없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과 함께 소실돼 조금씩 수리하면서 사용됐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경복궁이 전부 소실되면서 왕의 집무실조차 창덕궁으로 옮겨질 만큼 상황이 심각했기에 육조거리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종 초기 흥선대원군이 소실된 경복궁 복원을 추진하고 삼군부를 부활시키면서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경복궁 복원의 결과는 처음 만들어졌던 태조 때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고 한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은 왕권 강화의 목적으로 경복궁 복원과 함께 비변사를 철폐하고 삼군부를 설치해 군무를 이어받도록 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광화문의 모습(1930)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조선왕조실록> 고종 2년의 기록에는 영의정 조두순의 주장이 담겨 있다. 조두순은 “지금 예조가 있는 곳은 바로 국초(國初)에 삼군부(三軍府)가 있던 자리입니다. 그때에 정부와 대치해서 삼군부를 세웠던 것은 한 나라의 정령(政令)을 내는 곳은 문사(文事)와 무비(武備)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었습니다. 오위(五衛)의 옛 제도를 갑자기 복원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훈국(訓局)의 신영(新營)과 남영(南營)과 마병소(馬兵所) 및 오영(五營)의 주사(晝仕)하는 곳 등을 지금 예조가 있는 곳에 합설(合設)하여 삼군부라고 칭하고, 예조는 한성부 자리로 옮겨 설치하며, 한성부는 훈국의 신영 자리로 옮겨 설치함으로써 육부(六部)가 대궐의 좌우에 늘어서게 하여 일체 옛 규례를 따르도록 하며, 그 밖에 각사(各司)는 편리한 쪽으로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주장했으며 이를 윤허했다고 나온다.
이를 통해 삼군부는 광화문 바로 앞에 있던 예조가 있던 곳에 자리 잡게 됐다. 조선 개국 당시 광화문 앞쪽에 의정부와 삼군부를 대칭하여 배치했던 것과 비슷한 형태로 복원해 왕권을 더욱 강화하려한 것이다.
1948년 반도호텔에서 찍은 중앙청 사진 (출처: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사라져버린 왕도(王道)
경복궁 복원과 함께 육조거리는 화려하게 정돈됐다. 하지만 이는 얼마가지 않았다. 바로 일제의 침략이 시작된 것이다. 겨우 주인을 찾았던 경복궁은 다시 주인을 잃게 됐다. 고종은 을미사변으로 인해 아관파천을 단행했고 러시아 공사관에 1년 동안 머무르다 1897년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했다. 1910년 강제병합이 이뤄진 후 경복궁은 주인을 완전히 잃게 됐고 일제는 조선의 상징과 같은 경복궁과 육조거리를 훼손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경성지구 개정사업을 진행했다. 경복궁내에 총독부를 만들고 조선의 상징이었던 곳에서 식민통치를 위한 각종 박람회를 열었다. 육조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제는 육조거리를 1914년 ‘광화문통(光化門通)’이라고 이름을 바꿨으며 1926년 조선총독부가 완공되면서 광화문을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이전시켰다. 광화문과 육조거리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이곳은 행정적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해방 이후 들어선 미군정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그대로 활용했으며 광화문통에서 ‘세종로’로 이름이 바꿨다. 이후로도 조선총독부 건물은 대통령 집무실 및 정부청사, 박물관 등으로 활용됐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태극기와 인공기가 번갈아 걸리기도 하면서 일부가 파괴됐고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이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을 진행하면서 조선총독부 건물을 모두 철거했다. 이로써 우리의 아픔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국민들의 광장이 되다
일제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훼손된 경복궁과 광화문 복원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왔다. 특히 일제에 의해 옮겨졌던 광화문은 1968년 제자리로 찾아가게 됐다. 그전까지는 한국전쟁 중에 폭격을 맞으면서 석축만 남은 채 불타 없어져 폐허로 방치돼 있었다.
다만 1968년 박정희 대통령 시기 복원을 하면서 산업화와 경제 성장의 상징물이었던 철제 콘크리트로 목조건물이던 누각을 메워버렸다. 그리고 당시 중앙청으로 사용하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가리기 위해 원래 위치에서 북쪽으로 11.2m, 동쪽으로 13.5m, 경복궁 중심축에서 3.75도가 틀어졌다.
광화문 일대 모습이다. 지금은 철거된 구 조선총독부 건물과 구 경기도청 건물이
율곡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 박물관)
경복궁 복원 문제는 1980년대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됐다. 1984년 경복궁을 포함한 5대 궁복원에 대한 내용을 정부는 발표했고 1991년에는 ‘경복궁 복원 기공식’과 함께 김영삼 정부에들어서 복원 논의가 빠르게 이뤄졌다. 당시 경복궁에는 건물 36동밖에 있지 않았다. 고종 중건때 건물이 500여동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경복궁이 얼마나 많이 훼손된 것인지 알 수 있다. 이에 1995년에 강녕전과 교태전이 재건됐고 이후 동궁, 흥례문, 태원전 등의 복원이 진행됐다.
이후로도 복원은 계속 진행됐다. 원래 2009년에 마무리 될 계획이었던 1차 복원 정비 사업은 2010년까지 진행됐다. 1차 복원 정비 사업으로 광화문이 제자리를 찾으면서 광화문·흥례문·근정문이 일직선으로 놓이게 됐으며 1968년에 콘크리트로 메웠던 부분은 나무로 교체됐다. 1572억원의 예산 투입으로 89동 8987㎡(2720평)의 건물이 복원됐다.
지난 8월 7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 분수대에서 아이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특히 1차 복원 정비 사업으로 제자리를 찾은 광화문 앞으로 시민들을 위한 광장이 조성됐다. 2008년 5월에 착공돼 2009년 8월 1일에 개방된 광화문 광장은 광화문에서 시작해 세종로사거리, 청계광장까지 이어진다. 이에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대표 명소가 됐으며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집회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늘이나 시민의 편의시설이 부족하고 광화문 전면부 역사공간이 미흡하다는 점, 보행접근성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2020년 11월 재구조화공사에 들어갔다.
이에 공사 들어간 지 21개월 만에 지난달 6일 재개장을 하면서 다시 시민들에게 새로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 드러낸 광화문 광장은 도심 속 시민들의 휴식공간이 되도록 ‘공원 같은 광장’으로 만들어졌다. 이에 총면적은 2.1배 늘어난 4만 300㎡로 됐으며 녹지 공간도 3배 이상 늘어난 9367㎡가 됐다. 광장 폭 역시 35m에서 60m로 1.7배 확대됐다.
넓어진 녹지와 함께 세종로 공원 앞에는 212m 길이의 역사물길, 세종문화회관 앞에는 ‘터널분수’와 ‘한글분수’ 등 한여름 더위를 식히는 수경시설이 만들어졌다. 이외에도 앉아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휴식 공간도 만들어졌다.
그러면서 육조거리 문화재는 그대로 재현해 놨다. 공사 중 발굴된 ‘사헌부문터’는 우물, 배수로 등 발굴 당시 모습을 그대로 뒀으며 삼군부·병조·형조 등 과거 유구를 그대로 보존해 육조거리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이와 함께 밤에는 다양한 야경을 즐길 수 있다. 세종대왕 상 뒤편에 설치된 미디어글라스, 이순신 장군 동상 앞으로 있는 분수, 세종문화회관 앞 ‘해치마당’에 설치된 미디어 월, 세종문화회관과 KT광화문빌딩 벽면에는 미디어아트 작품이 전시돼 야경 명소로 다시 부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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