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호 마루대문 쓸쓸함이 감도는 11월 전쟁의 상흔을 만지다
쓸쓸함이 감도는 11월
전쟁의 상흔을 만지다
글 이예진
재한유엔기념공원 (출처: 뉴시스)
11월 11일. 우리나라에서는 이벤트가 있는 날이다. 공식적인 기념일도 아닌 이날을 많은 사람들은 막대 과자를 주고받으며 즐겁게 보낸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이날
을 1차 세계대전 영령 기념일로 기념하며 전쟁 중에 죽은 이들을 위한 추모의식을 가진다.
사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1·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일제로 인해 직·간접적으로 세계 소용돌이 안에 있었던 우리나라는 종전 이후 냉전시대로 크디 큰 피해를 입었다. 한국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고 도움을 받았던 우리나라는 11월 11일을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식’으로 지정해 전쟁에 스러져간 이들을 추모한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전쟁’으로 시작됐다. 여러 이념과 관계 등의 마찰로 빚어진 ‘전쟁’은 지금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바로 지근에서도 ‘전쟁’으로 많은 이들이 아파하고 있다.
재한유엔기념공원에서 참배하고 있는 유치원생들 (출처: 뉴시스)
추모의 달 11월
11월은 유독 전쟁과 관련된 날들이 많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국전쟁이 있는 6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삼고 있다. 세계적으로는 일제의 항복으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안겨준 8월에 2차 세계대전 종전 기념일을 삼고 11월 11일을 1차 세계대전 종전 기념일로 추모를 한다. 1차 세계대전의 가장큰 피해를 입었던 프랑스는 11월 11일을 1차 세계대전 종전기념일로 추모하며 영국은 이날 현충일로 삼아 전쟁 중에 죽어간 이들을 향해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우리나라는 같은 날 한국전쟁에 도움을 주기 위해 머나먼 타국으로 와 죽어간 유엔군을 위해 추모하는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식’을 가진다. 국가보훈처가 주관하는 유엔참전용사 추모 기념일인 이날은 캐나다 유엔군 참전용사 ‘빈센트 커트니’의 제안으로 2007년부터 시작됐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유엔참전용사가 잠들어있는 곳이 부산에 있다. 부산 유엔기념공원은 세계 유일의 유엔기념묘지로 세계평화와 자유, 대의를 위해 생명을 바친 유엔군 전몰 장병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1월 유엔군 사령부가 부산 대연동에 조성하기 시작한 묘지는 4월에 완공돼 전국 곳곳에 가매장되어 있던 유엔군 전몰 장병들의 유해가 안장되기 시작했다. 이후 1955년 11월 대한민국 국회가 유엔군의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 전몰장병들이 묻힌 곳을 유엔에 영구히 기증하면서 성지로 지정할 것을 결의했다. 결의사항을 전달받은 유엔 역시 이 묘지를 유엔이 영구적으로 관리하기로 하면서 1959년 11월 <재한 국제연합 기념묘지 설치 및 유지를 위한 유엔과 대한민국간의 협정>이 체결됐다.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외곽에 설치된 ‘추모의 장’에 양귀비가 그려진 추모 십자가 (출처: 뉴시스)
유엔기념묘지는 처음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에 의해 관리가 됐으나 1974년에 해체되면서 11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기념공원 국제관리위원회’에서 현재까지 관리를 하고 있다. 그리고 명칭은 재한유엔기념묘지로 시작됐으나 국내 국민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도록 2001년 3월 30일 재한유엔기념공원으로 변경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으며 지난 2007년에는 근대문화재로 등록 되기도 했다.
현재 이곳에 안장되어 있는 전사자 수는 11개국의 2315구이다. 1951~1954년 당시에는 약 1만1000명의 유해가 안장됐으나 이후 벨기에,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그리스, 룩셈부르크, 필리핀, 태국 등의 유해 전부가 조국으로 이장됐으며 그외 몇몇 국가의 일부 유해도 이장되면서 현재에 이르게 됐다.
현재 안장되어 있는 유해의 조국으로는 호주,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뉴질랜드, 노르웨이, 남아프리카공화국, 튀르키예, 영국, 미국 등 11개국이며 우리나라 전사자의 유해도 37구가 잠들어 있다.
이처럼 한국전쟁에는 전 세계 곳곳에서 많은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 1950년 6월 27일 제2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유엔 연합군 파병을 결의하면서 16개국의 전투지원과 6개국의 의료지원이 있었다. 전투지원을 한 16개국으로는 호주, 벨기에, 캐나다,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프랑스, 그리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뉴질랜드, 필리핀, 남아프리카공화국, 태국, 튀르키예, 영국, 미국 등이며 의료지원을 한 6개국으로는 덴마크, 독일, 인도, 이탈리아, 노르웨이, 스웨덴 등이다.
나주 옛통학기차 (제공: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치다
이처럼 전쟁은 승자와 패자를 낳는다. 승자는 모든 것을 갖게 되지만 패자는 모든 것을 잃고 승자에게 종속되고 만다. 100여 년 전 우리나라가 그랬다. 500년의 역사를 이어온 조선이었지만 최신 서양 무기를 장착해 밀고 들어오는 서양 세력과 일제를 이길 수 없었다. 결국 말년의 조선은주권을 뺏기지 않도록 여러 방법을 모색했으나 일제에게 주권을 넘기고야 말았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민족이 아니었다.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 다시 일으키려 노력했던 이들이 있었다. 이에 11월은 일제에 항거하다 스러져버린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달이기도 하다. 바로 ‘독립’을 키워드로 한 기념일이 두 번이나 있기 때문이다. 바로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인 3일과 ‘순국선열의 날’인 17일이다.
항일 운동의 주체가 된 학생들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은 1929년에 발생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시발점으로 한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1929년 11월 3일부터 1930년 3월까지 지속됐으며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간의 갈등으로부터 시작됐다. 당시 학교에는 일본인 학생들을 비롯해 선생들도 일본인으로 더러 구성되어 있었고 식민지 교육 아래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이 심화됐다.
차별이 심화되면서 조선인이 다니는 학교와 일본인이 다니는 학교로 나눠지기도 했는데 광주에서는 이 학교들끼리 충돌이 일어나면서 학생들의 항일 운동이 시작됐다. 처음의 시작은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열차에서 발생했다.
열차 안에서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 박기옥과 그 친구들을 희롱하자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춘재가 나서면서 갈등이 일어났다. 열차 안의 갈등은 학교의 패싸움으로 커졌으며 일본 경찰이 출동해 일본인 학생의 편을 들면서 심화됐다.
이 사건으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11월 3일 광주에서 가두시위를 시작했다. 이날은 일왕의 생일이었기에 기념행사에 모든 학생들이 참여해야 했다. 하지만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기념식 후에 있을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적극적인 투쟁을 진행하고자 했다. 그러던 중 신사 참배를 하고 돌아오던 일본인 중학생들이 광주고등보통학교의 최쌍현을 단도로 찌르는 일이 발생했고 이를 들은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도주하는 일본인 학생들을 쫓아가 구타했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글마루 DB)
이렇게 사건은 점점 커졌고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300여 명이 운집해 가두시위를 시작한 것이었다. 이 시위에는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을 비롯해 광주농업학교 학생 일부도 참여했으며 나중에는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까지 합류하게 됐다.
시위대의 수는 점점 늘어났고 인근의 조선인 군중들까지 지지하자 일본인 상인들은 폐점했고 학교에는 3일간 휴교령이 내려졌다. 이날 가두시위를 주도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39명과 광주농업학교 학생 1명이 구속됐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에 학생들은 더욱 더 반기를 들며 항일 운동을 확산시켜 나갔다.
이러한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신간회를 비롯한 여러 독립 단체들이 손을 보탰으며 이로 인해 학생항일운동은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이로써 광주에서 발생한 항일 운동은 학생만의 시위가 아닌 각계각층으로 확산됐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는 1919년에 있었던 3·1운동 이후 민족 최대의 항쟁으로 발전했다. 당시 학생항일운동에 참여한 수만 5만 4000여 명이었다.
사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1929년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1928년에 있었던 6·10 만세 운동부터 꿈틀대기 시작했다. 독립을 갈망했던 학생들은 동맹 휴교 등으로 항일 항쟁을 벌여왔고 이를 기반으로 해 1929년 열차 사건이 마중물이 되어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확대 될 수 있었다.
이에 1953년 국회에서는 11월 3일을 ‘학생의날’로 지정했다. 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학생들에게 민족적 사명을 다하도록 사기를 높이기 위함이었다. 정부는 매년 ‘학생의날’을 기념했으나 1972년 10월 유신 이후 <각종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의해 폐지되기도 했다. 그러나 1984년 9월 22일 국가기념일로 ‘학생의
날’이 부활됐고 2006년 2월 9일에 지금의 명칭인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변경돼 기념하고 있다.
제81회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 (출처: 뉴시스)
조국을 위해 피를 흘리다
순국선열(殉國先烈). 한번쯤 들어봤을 이 단어는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한 이들을 가리킨 말이다. 순국선열에 대해 조금 자세히 풀어보자면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광복 전날인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고 독립운동이나 일제에 항거하다가 순국한자를 뜻한다.
즉 11월 17일에 있는 순국선열의 날은 일제에게 국권이 뺏겼던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위해 순국한 이들에 대한 추모와 존경을 표현하는 법정 기념일이다. 그래서 ‘충렬을 드러내는 날’을 뜻하는 현충일과는 조금 다르다. 6월에 있는 현충일의 경우 국토방위에 목숨을 바친 이의 충성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다.
이런 순국선열의 날이 11월 17일인 이유는 그날이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날로 치욕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9년 11월 21일에 열린 임시의정원 제31회 임시총회에서 지청천, 차이석 등 6인이 11월 17일 ‘순국선열공동기념일’을 제안했고 원안대로 의결되면서 기념일을 제정했다.
광복이 될 때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매년 추모행사를 진행했고 광복 후 한국전쟁까지는 민간단체가 행사를 주관했다. 1955년부터 1969년까지 정부 주관으로 행사가 진행됐으며 1962년 부터는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옮겨졌다. 그러다 1970년부터 1996년까지 민간단체 주관으로 현충일 추념식에 포함됐다가 1997년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면서 정부 주관 행사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시계방향으로) 효창공원에 있는 백범 김구의 묘, 삼의사묘, 임정 요인의 묘(글마루 DB), 서울 강북구에 있는 이준 열사의 묘 (출처: 문화재청)
순국선열들의 묘역은 전국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는 서울과 대전의 국립현충원이 있으며 서울에서는 서대문 독립공원에 순국선열 위패가 봉안된 독립관이 있다. 또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묘와 이봉창·윤봉길·백정기 3의사 묘, 이동녕·조성환·차이석 임정요인의 묘가 함께 있다.
이 외에도 서울 강북구 북한산 둘레길 인근에는 ‘순국선열묘역순례길’이 있다. 이곳에는 헤이그 특사로 많이 알고 있는 이준 열사를 비롯해 김병로·이시영 선생 등의 묘가 자리해 있다. 그중에서도 1940~1945년 사이 중국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광복군의 합동묘소도 있어 시선을 끈다.
쌀쌀해지면서 쓸쓸한 기운마저도 감도는 11월.여태 많은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달이다. 지금도 우리 인근에서는 전쟁의 포격 소리에 잠 못 드는 이들이 있다. 오랜 세월 무수히 많은 전쟁으로역사는 피로 얼룩져 있었고 지금도 그 역사를 써져 가는 중이다.
하지만 이 전쟁으로 남는 것은 아픔과 고통밖에 없다.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하는 것은 전쟁 없는 세상이며 싸움이 없는 ‘평화’의 세계다. 역사 속 전쟁에 스러져간 이들을 추모하면서 앞으로는 이런 전쟁이 없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남은 우리의 사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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