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시대의 흥망성쇠,
전주와 익산에서 지금을 바라보다
글·사진 이예진
유행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꽤 재밌는 현상이다. 한없이 새로운 것을 좇아가는 것 같다가도 결국 어느새 과거의 유물을 찾는다. 일명 ‘레트로(retro)’ 풍의 유행을 보면 조금 이해하기 쉽다. 서울에서도 보면 성수, 홍대는 젊은이들의 거리이면서 최신 유행을 좇는 메카이다. 하지만 이 문화를 향유하는 세대인 MZ(밀레니엄+Z)세대들은 미래의 유행만을 좇지 않는다.
복고풍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서울 종로의 북촌, 익선동, 서촌 등은 과거의 유물이 남아있지만 최근 MZ세대가 많이 찾는 곳 중 하나다. 과거의 집들과 궁, 그리고 이를 즐기기 위해 한복까지 입는 그들을 보면 ‘레트로’ 유행은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레트로의 유행이 아주 잘 나타나는 도시가 있으니 바로 ‘전주’다. ‘전주’하면 ‘한옥마을’로 점철되며 MZ세대가 한복을 입고 찾는 이곳은 사실 과거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탐방팀은 과거의 흥했다가도 망해버린, 이제는 유적으로 남은 전주와 익산으로 달려갔다.
익산 미륵사지 전경. 석탑들 뒤로 미륵산이 든든하게 서 있다.
전주 만경대에서 바라본 전주 시가지 모습
고려의 쇠락, 조선의 시작
전주(全州)는 바로 ‘전주 이씨’의 본관인 곳이다. 또 전라도를 구성하는 ‘전’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원래 ‘전라도’라는 지명은 고려 현종 때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첫 글자를 따면서 처음 등장했다. 그만큼 전주는 과거 후백제 시절부터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그러나 반만년의 한반도 역사 중 전주가 더욱 포커스를 받는 것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향하는 시대다. 이것은 바로 ‘만경대(萬景臺)’에서 알 수 있다. 만 가지 경치를 볼 수 있다는 뜻을 가진 ‘만경대’는 전주의 시내가 훤히 보이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고려 충신이었던 정몽주의 한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千仞岡頭石徑橫 천 길 높은 산언덕에 돌길을 돌아들어
登臨使我不勝情 올라보니 장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네
靑山隱約扶餘國 푸른 산 희미한 곳이 부여국이고
黃葉繽紛百濟城 누런 잎 휘날리는 곳이 백제성일세
九月高風愁客子 구월의 드센 바람이 나그네를 시름겹게 하고
百年豪氣誤書生 백 년의 호기가 서생을 그르치게 하네
天涯日沒浮雲合 하늘가에 지는 해가고 뜬구름에 덮여 버리니
惆悵無由望玉京 서글프게도 개경을 바라볼 길이 없네
- 만경대에 새겨진 정몽주 <登全州望景臺(전주 망경대에 오르다)>
만경대에 오르면 정몽주의 문집인 <포은집> 제2권에 담긴 시<登全州望景臺(전주 망경대에 오르다)>를 볼 수 있다. 만경대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이 시는 1472년 진장 김의수가 새긴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다면 정몽주는 왜 만경대에서 망국의 한을 읊었을까.
때는 1380년. 이성계는 남원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큰 승리를 거뒀다. 이때 정몽주 역시 함께 있었는데 개경으로 돌아가던 중 이성계는 선조들이 살았던 오목대에서 친척들과 승리를 기념하는 잔치를 벌였다. 이때 이성계는 잔치에서 <대풍가>를 부르게 되는데 이것을 들은 정몽주가 한탄을 하며 만경대에 올랐던 것이다.
잔치에서 이성계가 불렀던 <대풍가>는 중국 한나라 태조 유방이 고향이었던 패군 풍현에서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면서 불렀던 노래다. 이에 정몽주는 이성계가 새로운 나라를 건국할 야심을 알아차리고 홀로 말을 타고선 만경대에 올랐던 것이다.
전주 만경대에 새겨진 정몽주의 시 <登全州望景臺(전주 망경대에 오르다)>
만경대와 동시에 지금의 전주 한옥마을 인근에 있는 오목대와 이목대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 앞서 만경대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오목대는 이성계가 왜구를 무찌르고 돌아가던 중 승전을 자축하던 곳이다. 현재 큰 도로 하나만 건너면 갈 수 있는 이목대는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인 목조 이안사가 전주를 떠나기 전에 살았던 곳이다.
대한제국을 선포했던 고종은 황권을 공고히 하고자 오목대와 이목대에 친필을 새긴 비석을 뒀다. 이에 오목대에는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 태조가 잠시 머물렀던 곳)’가 적힌 비가 있으며 이목대에는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 목조대왕이 전에 살았던 터)’가 적힌 비가 세워졌다. 다만 이목대 비각은 원래 오목대의 동쪽 높은 곳에 있었는데 길을 넓히는 공사로 인해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현재는 오목대의 경우 경관이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오목대에 올라서면 한옥마을 전경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옥마을의 입구에 있는 경기전은 전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 중 하나다. 고즈넉한 한옥과 푸르른 자연이 함께해 사진이 잘 나오는 곳이자 조선의 시작인 태조 이성계의 어전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그래서 옆에는 어진박물관도 함께 자리해 있다.
오목대에서 바라본 전주 한옥마을 전경
전주 경기전 입구
성계의 어전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그래서 옆에는 어진박물관도 함께 자리해 있다.
경기전은 1410(태종 10)년에 ‘어용전(御容殿)’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태종은 부왕인 태조의 어진을 모시기 위해 완산(전주), 계림(경주), 평양 3곳에 어용전을 창건했다. 이후 1442(세종 24)년에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종전으로 이름을 바꿨다. 경기전은 임진왜란 때 화재를 입고 1614(광해군 6)년에 중건됐다.
경기전으로 들어가면 입구에 홍살문이 먼저 반긴다.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 내삼문을 건너면 태조의 어진을 만날 수 있다. 다만 현재 경기전에 있는 것은 모사본으로, 진본은 어진 박물관에서 전시 중에 있다. 어진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태조어진>은 1872(고종 9)년에 모사한 것으로 평상시 집무복인 익선관과 청룡포 차림이며 백옥대와 흑화를 착용한 전신상인 것이 특징이다.
또 다른 왕도로 향하다
전주에서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익산이 있다. 충청남도와 맞닿아 있는 익산은 전주와 또 다른 왕도의 향기를 풍긴다. 전주는 과거 도읍지의 역할은 한 적이 없으나 익산은 왕도가 될뻔한 사연을 갖고 있다.
본래 익산은 공주, 부여와 함께 백제문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곳이다. 그것을 미륵사지를 통해 알 수 있다. 익산 미륵산 아래 있는 미륵사지를 향하면 백제의 화려했던 문화를 느낄 수 있다. 미륵사지는 백제 무왕이 창건한 미륵사의 절터로 현재 남아있는 백제 시대의 절터 가운데 가장 크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 무왕과 왕비가 사자사에 향하던 길에 지금의 미륵산인 용화산 아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자 연못을 메우고 탑, 법당, 회랑을 지으면서 ‘미륵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미륵사지에 남아있는 석탑을 통해 백제의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화려함을 엿볼 수 있다. 발굴을 통해 미륵사에는 3개의 탑이 있었는데 동쪽과 서쪽에 있는 것은 석탑이었으며 가운데는 목탑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복원과 보수를 마친 서탑과 동탑이 나란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중에서도 서탑은 국보 제11호로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크고 오래된 탑이다. 원래의 형태는 알 수 없지만 동쪽에 있는 9층 석탑과 같은 규모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서탑이 시선을 받는 것은 규모 외에도 당시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층마다 모서리의 기둥이 다른 기둥보다 살짝 높게, 그리고 지붕이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면서 끝에만 솟아오른 모양 등의 곡선미를 특징으로 하는 목조건축의 형식을 갖고 있다. 즉 재료는 바위이나 목탑의 형태를 지닌 것으로 당시 백제 목공들이 얼마나 섬세한 손재주를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미륵사 복원도
익산 미륵사지 서원 석탑(왼쪽)과 동원 석탑(오른쪽)
서탑은 복원과 보수 과정도 순탄치 않아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의 눈길을 받기도 했다. 기록을 보면 미륵사가 언제 폐사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까지도 유지됐음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서탑도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와유록> 등에서 탑의 붕괴에 대해 기록되어 있으며 오랜 시간에 걸쳐 훼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1913년 세키노 다다시와 다이니 세이치에 의해 탑의 실측조사와 촬영이 진행된 후 1915년 시멘트로 보수되기도 했다.
사실 이 시멘트 보수는 거의 탑이 더 이상 무너지지 않도록 발라놓은 상태여서 흉물스럽게 보이기도했다. 이에 2001년부터 본격적으로 해체보수정비 작업에 들어갔으며 3년간 해체한 콘크리트가 185톤에 이를 정도였다. 약 20년 동안 해체 보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완전한 형태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됐다. 이 안에서 금제사리호, 유리사리병, 청동합, 은제관식 등 9600여 점의 유물과 탑지(塔誌)가 발견됐다. 발견된 탑지를 통해 석탑의 건립 연도를 알 수 있게 됐다.
이처럼 거대한 절과 탑을 지을 정도로 백제 말기 무왕 대에는 다시금 문화의 꽃이 피던 시절이었다. 이는 인근에 있는 왕궁리 유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백제 왕궁리 유적은 미륵사지와 함께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곳으로 백제 왕궁의 모습이 잘 남아 있다.
왕궁리 유적에 대해 백제 이전에 있었던 마한 기준도읍설, 백제 무왕천도 및 별도설, 후백제 견훤도읍설 등 다양하나 현재는 백제 무왕 때 천도를 했다는 가설이 가
장 힘을 얻고 있다. 왕궁리 유적에 있는 백제왕궁박물관에는 백제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하려 했음을 <관세음응험기>를 근거로 든다. 그리고 왕궁리 유적 터에서 ‘수부(首府)’ 도장을 찍은 기와가 발견되면서 익산 천도설이 더 큰 힘을 받았다. ‘수부’란 왕이 거처하는 수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점은 무왕이 죽은 후 이 왕궁은 절터로 변한다. 터에서 ‘왕궁사’ ‘대관관사’ ‘관궁사’ 등의 사찰 이름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면서 사찰이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왕궁에서 사찰로 변한 이유를 아직 확인할 수 없으나 무왕이 익산 쌍릉에 묻히면서 무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활용했다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유적터에 있던 왕궁리오층석탑이 있는데 세워진 시기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다. 미륵사지 석탑을 본떠서 만든 백제계 석탑이지만 통일신라시대 기와가 주변에서 발견되고 있어 백제, 통일신라, 고려 등 세워진 시기에 대한 여러 견해가 나왔던 가운데 1965년 보수작업 때 사리장엄구가 발견되면서 고려시대로 많이 보고 있다.
탑의 1층 지붕돌 위에는 두 개의 사리구멍이 있었는데 동쪽 사리구멍 상자에는 녹색유리제사리병이 담긴 금제상자가 있었으며 서쪽 사리구멍에는 금강경을 새긴 은판이 담긴 금동제상자가 있었다. 이에 고려시대까지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양식에 신라탑의 형식이 일부 어우러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처럼 익산은 백제 무왕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무왕의 생애가 다 담긴 지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제 무왕은 탄생한 설도 특이한 왕인데 바로 그 유명한 <서동요>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익산에서는 서동공원에서 매년 서동축제를 진행한다. 무왕은 익산에서 태어난 곳으로 서동공원은 그의 설화와 비슷하게 금마저수지를 끼고 있다.
<삼국유사>에 보면 무왕은 과부였던 어머니와 용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어렸을 때 마를 캐면서 생계를 유지해서 동(薯童)으로 더 많이 불렸다. 나중에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이야기에 서라벌로 간 서동은 아이들에게 선화공주가 서동과 어울린다는 내용의 <서동요>를 부르게 했다. 결국 선화공주가 궁에서 쫓겨나자 서동은 선화공주를 백제로 데려와 결혼했다. 그리고 마를 캐면서 발견했던 황금으로 백제 왕위에 오르게 됐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현재까지도 무왕의 왕비가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인지에 대한 설은 분분하다. 당시 백제와 신라의 관계가 통혼을 할 정도가 아니었고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유물에서 미륵사 창건을 주도한 왕비가 백제의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적혀있기도 해 설왕설래가 많다.
덕이 넉넉한, 향을 쌓다
이러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오랜세월 지켜보는 곳이 있다. 바로 ‘덕유산(德裕山)’이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덕유산’은이름 그대로 덕이 많고 너그러운 모산과 같은 형상을 지니고 있다. 등산로만 10개로 다양하게 오를 수 있는 덕유산은 등산인들에게 지리산, 설악산에 이어 애정하는 산으로 꼽힌다. 이번 탐방팀은 이틀에 걸쳐 구천동 계곡을 통해 올라가는 코스와 무주리조트 곤도라를 통해 오르는 두 코스로 올랐다.
구천동 계곡 코스로 오르면서 오랜만에 콸콸 흐르는 계곡물에 시선을 뺏겨 백련사까지만 오르다 철수를 했지만 왜 덕유산을 향해 ‘덕이 넉넉하다’라고 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코스였다.
여타의 산들과 같이 재미있는 암릉코스가 있거나 전망이 탁 트여 화려한 볼거리를 자랑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저 산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정상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계곡물과 어우러진 울창한 수목들은 등산객들을 안전하게 품어주고 있었다. 덕유산은 높이가 높고 넓게 분포한만큼 다양한 동식물이 공존하는 곳이다. 그래서 1975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자연적 보전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덕유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향적봉’이다. 해발 1614m 높이의 향적봉은 남한에서 네 번째로 높은 곳으로 겨울철 설산을 보러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높은 정상에서 파노라마로 펼쳐진 전망은 왜 높은 곳으로 사람들이 향하려고 하는지 잠시나마 알게 해준다.
‘시대’의 흥망성쇠
향적봉(香積峰)은 향나무가 주변에 많아 향나무의 향이 많이난다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하지만 단순하게 우리가 그렇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번 탐방을 통해 백제의 흥망성쇠, 고려에서 조선으로 향하는 발자취 등을 봤다. 결국 ‘흥망성쇠(興亡盛衰)’라는 단어를 보면 한 나라는 지고, 그 자리에 한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시작이라고도 볼 수 있는 전주를 생각하면, 경기전 바로 맞은편에 세워진 전동성당을 보면서도 그 이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914년에 세워진 전동성당은 천주교 신자의 순교지였던 곳이었다. 조선 후기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피를 흘렸던 곳이 조선 태조의 어전이 있는 경기전 바로 앞에서 위풍 당당하게 세워져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미사를 드리는 성당이 된 것을 보면 단순히 ‘나라’의 흥망성쇠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흥망성쇠를 생각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떠올려본다.
하지만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고 했다. 난세속에 영웅이 나온다고 한 것처럼 오늘의 이 어지러운 시대의 흥망성쇠 또한 있는 것은 아닐까. 역사를 통해 오늘날을 바라본다고 했다. 이성계는 옛 조선을 떠올리며 그 기상을 잇는다고 해 해 뜨는 아침의 나라 ‘조선(朝鮮)’이라고 명했다. 이에 단군이 세운 조선은 ‘고조선’이 됐다.
그렇다면 왜 한반도를 문명의 시작부터 ‘해 뜨는 아침의 나라’라고 생각했을까. <성경>에서도 보면 마지막 때 인자가 출현한다고 했으니 그곳이 바로 ‘동방’이다. 동방 즉 해가 뜨는 곳에 마지막 시대를 이끌어 갈 인자가 나오는 것이니 여기 한반도의 출현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과거 정치와 종교는 일치의 시대를 이어왔다. 고조선의 ‘단군왕검’이라는 것 역시 종교와 정치가 합쳐져 생긴 이름이었으며 통일신라는 불교로 통일시킨 세 나라의 백성들의 마음을 모았고 고려 역시 불교로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가 망할 때 결국 종교와 정치가 합쳐져 있는 것에서부터 쇠락의 길이 보이니 고려 후기 ‘신돈’을 예로 들 수 있다.
이에 이성계는 불교 대신 ‘성리학’ 유교를 채택함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나 이 역시 나중에는 부패하면서 망국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결국 근대로 나아갈수록 종교와 정치를 각각 나누고 있으며 현재 우리나라의 근간이 되는 헌법에도 이를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세태를 보면 헌법에서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어 있다 함에도 여전히 정치권에서 종교인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고 그 가운데 부패의 모습을 여전히 우리는 눈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종교 경서인 <성경>에는 어떻게 나와 있을까. <성경>에서는 구약시대의 메시야로 예수님을 맞이했고 마지막 때에 보혜사 성령과 함께하는 ‘아이’가 출현한다고 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는 구약시대를 끊고자 왔지만 다윗의 자손으로 나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자 육적으로는 왕가의 자손임을 나타냈다.
이제는 <성경>에서 말하는 마지막 때다.
이 마지막 때에 나타나는 ‘아이’ 역시 그렇다. 지금은 없어져버린 조선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전주 이씨’ ‘경주김씨’ 등 족보를 이어오고 있고 누군가를 만날 때 조상
이 누구인지, 어느 집안의 사람인지 확인하기도 한다. 이처럼 왕가의 핏줄로 나타난 ‘아이’가 이제 새로운 세상을 연다. <성경> 속에 약속된 ‘아이’가여는 새로운 세상은 생로병사의 끝없는 굴레가 끊어진다. 석가가 찾아다녔던 미륵의 세계를 여는 ‘아이’를 우리는 찾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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