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호 마루대문 관동대지진 100주년을 앞두고 ‘조선인 대학살’ 그날의 진실이 밝혀진다
관동대지진 100주년을 앞두고
‘조선인 대학살’
그날의 진실이 밝혀진다
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관동대지진위령탑건립추진위원장
1923년 9월 1일 발생된 일본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열차 선로가 무너진 모습
경시청 소독반(11월 15일)
흰 깃발을 통해 경시청 소독반이 우물을 소독하고 있는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일제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불령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탔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조선인 집단 학살의 원인을 제공했다. 일본 정부와 군경까지 가담해 학살을 일삼았지만 민간인 자경단에게 그
책임을 돌렸다. 그마저도 형식적인 재판에만 회부됐을 뿐이다.
불령선인(不逞鮮人).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항거·저항했던 조선인을 일제가 부정적으로 지칭한 말로 ‘불령’은 제멋대로 행동하거나 도의에 따르지 않는다는 뜻이며, ‘선인’은 조선인을 뜻한다. 일본은 독립운동가를 비롯해 일제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불령선인이라 칭했으며, 한번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히면 철저한 감시와 관리를 받아야만 했다. 일제는 비폭력 만세운동인 3·1운동을 불령선인의 폭동이라고 하는가 하면, 1923년 일어난 관동대지진 당시 불령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타서 일본인을 살해하려 한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그 결과 아무 죄도 없는 수많은 조선인이 학살당했으며, 이런 유언비어의 급속한 확대 뒤에는 군대와 경찰이 있었다. 철저하게 조작된 유언비어를 일본 정부가 조직적으로 유포시켜 무고한 조선인을 집단 학살한 사건. 100여 년 전 일어난 관동대지진 뒤에는 흉흉해진 민심을 달랜다는 명목으로 그 모든 혼란과 혼돈의 책임을 조선인에게 전가해 학살을 일삼은 참혹한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
화염에 휩싸인 니혼바시 미츠코시백화점(日本橋 三越百貨店)
미츠코시백화점(삼월백화점)이 관동대지진 후 이어진 대화재로 화염에 휩싸인 모습이다.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을 찍은 뒤 그림
으로 표현한 것이다. 백화점 옆은 당시 유명했던 오복양복점이다. 당시 이 건물들이 들어선 곳은 긴자(銀座)로 ‘긴자’라는 이름은 에도시기
초기인 1612년 시즈오카에 있던 은화 주조소를 이곳으로 이전한 데서 비롯됐다.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관동대지진으로 잿더미가 됐지만
재개발하면서 일본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이 됐다.
날조된 유언비어에 자행된 집단 학살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도쿄를 중심으로 관동 지방에 대지진이 발생했다. 진도 7.9급의 초강력 지진은 많은 사상자와 이재민을 낳았다. 건물들은 무너졌고 철길도 엿가락 휘듯 휘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진이 대화재로까지 번지면서 도쿄, 요코하마 지역을 비롯한 관동 일대는 거의 파괴되다시피 했다. 수많은 건물이 붕괴되고 전기와 수도는 물론 전신, 철도까지 파괴돼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가뜩이나 경제 불황으로 민심이 흉흉하던 차에 대지진까지 발생하자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고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폭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일제는 민심과 여론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다. 일본 정부는 자국민의 분노를 표출시킬 대상이 필요했다. 이에 지진 발생 다음날인 9월 2일 출범한 제2차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權兵衛) 내각은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내각은 “사회주의자와 조선인에 의한 방화가 다수 발생하고 있다” “조선인이 도쿄시 전멸을 기도하여 폭탄을 투척할 뿐 아니라 독약을 사용해 살해를 기도하고 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 일본 신문들 역시 이 소문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보도하기 시작했다.
철저하게 날조되고 조작된 유언비어는 기정사실화돼 일본인들은 대대적인 조선인 색출을 시작했다. 도쿄 시민들이 자경단(自警團, 지역 주민들이 도난이나 화재 등의 재난에 대비하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조직한 민간단체)을 결성해 조선인을 발견하면 죽창이나 쇠갈고리 등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이렇게 전국적으로 조직된 자경단만 3689개에 달했다. 어디 이뿐이랴. 군경에 의한 조선인 학살도 자행됐다. 또한 재난 시기 자경단과는 별도로 관헌의 재원을 받아 ‘불령단’이라는 폭력단체를 조직해 조선인들을 살해하는 데 노골적으로 가담했다. 군경과 자경단, 불령단 등에 의해 학살당한 조선인이 6000명(<독립신문> 발표)에서 많게는 2만 3000명 이상(독일 문헌 등)으로 파악된다. 이는 문헌상의 숫자일 뿐 실제로는 더 많은 희생자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3년 당시 총독이었던 사이코 마
고토는 학살당한 조선인은 2명이며, 이것도 오인으로 인한 희생이었다고 발표했다.
화재를 피해 피난하고 있는 사람들
관동대지진은 뒤이어 일어난 대화재로 더욱 많은 피해를 입었다. 사진은 저녁 6시쯤 화재를 피해 피난 가고 있는 도쿄 시민들의 모습이다.
뜨거운 화기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머리에 중절모나 수건을 뒤집어쓴 모습을 볼 수 있다. 화재로 인해 숨쉬기가 어려웠으며 불길로 인
해 거리의 온도가 48~50도까지 오르기도 했다. 사면이 불바다인 상황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모습이다. 한편 조선인들은 이곳에 거주할
수 없었다. 대지진 당시 자경단들은 일본교(日本橋, 니혼바시) 앞에서 피신하려는 사람들 속에서 조선인들만 찾아내 학살했다.
사진은 말하고 있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발생한 관동대지진은 이틀 동안 여진만 323회(일본 매일통신사 자료집)가 지속될 정도로 그 피해 규모가 컸지만, 연이어 발생한 대화재로 인한 피해가 더욱 컸다. 대지진 발생 당일 발생한 화재는 해풍의 영향으로 요코하마 시가지가 삽시간에 불바다가 될 정도였다. 밀려오는 해일로 인해 해안은 바닷물에 잠겼고, 엄청난 열기로 인해 접근이 불가능했다. 이러한 화재로 인해 지진 이틀 후 도쿄의 기온이 무려 46도까지 올라갔다고 하니 그 피해를 짐작할만하다.
일본 기상청 자료에 따르면 이 지진으로 사망자 9만 9331명, 행방불명 4만 3476명, 가옥 전파(全破) 12만 8266동, 반파(半破) 12만 6233동, 소실 44만 7128동, 유실 868동의 피해가 발생했다. 일제는 대지진 직후 일어난 대화재에 대해 조선인들이 방화를 저지른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지만 화재의 원인은 정작 다른 곳에 있었다. 대지진이 일어난 시간은 점심 준비로 바빴을 때다.
당시 각 가정집과 요식업소에서는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불을 사용했는데, 이때 지진이 발생하면서 불이 대부분이 목재건물인 피해지역 건물들을 불태우며 널리 퍼져나간 것이다. 특히 당시 가옥 구조 및 생활 습관은 부엌을 바깥에 따로 두고 사용하는 것이 아닌, 집 안에서 직접 불을 사용해 취사를 하는 방식이었기에 화재 위험성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취사 문화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9월 1일 11시 58분은 점심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당시 일본은 집 안에서 불을 때는 취사 문화가 있어 더 큰 화재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진은 당시 일본의 취사 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목욕 문화 역시 방 안에서 나무통에 불을 피워 물을 데웠던 터라
불이 동시다발적으로 번졌다. 지진이 잦은 특성으로 목조건물이 많았던 것도 화를 키웠다. 자신들의 문화가 그러함에도 대화재의 원인을 조
선인들에게 돌렸던 일본 정부. 이제라도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지진 전날인 8월 31일 일본 규수 지방에 태풍이 상륙했고, 지진 발생 당일 오전에는 동해로 빠져나가 있었다. 이 태풍이 일본 전역에 큰 영향을 미쳤고 도쿄를 비롯한 관동 지방에 거센 남풍이 불고 있었던 터였다. 목재건물들이 밀접하게 들어선 도시구조에 강풍까지 불었으니 화재는 걷잡을 수 없이 순식간에 확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원인들을 뒤로한 채 불량선인들이 방화를 저지른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무고한 조선인들이 잔인하게 죽어간 것이다.
일제는 또한 당시 일본인들의 주요 식수였던 우물에 불령선인들이 독약을 넣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무고한 조선인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대지진과 대화재의 피해는 똑같이 당하면서 이에 더해 유언비어로 인한 생명의 위협까지 받아야 했으니 말이다.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유언비어로 인해 일본인들 또한 식수를 구하기 힘들었으며, 배급을 받기 위해 긴 줄을 서야만 했다. 우물을 식수로 먹기 위해 금붕어를 물통에 넣어 하루 정도를 기다렸다 먹기도 했으며, 비둘기를 이용하기도 했다.
경시청 화재(9월 1일 오후 2시)
일본 경시청이 온통 화마에 뒤덮인 모습이다. 소방관들이 물을 뿌리며 화재 진압을 하지만 불길을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안전을
위해 10월 5일 불타고 남은 건물을 폭파했다.
학살 현장으로 내몰린 조선인
불황과 대지진으로 피폐해진 일본인들은 민간인 자경단까지 만들며 조선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일본 군경도 합세했다. 이들이 얼마나 잔악무도한 방법으로 조선인들을 학살했는지,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였는지는 사진 자료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가 잔인하게 학살한 수많은 우리의 선조들은 희생당한 뒤에도 수치를 당해야 했다. 지진과 대화재로 잿더미가 된 도시는 방치된 시체들에서 나는 악취와 시신을 태우는 냄새로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자경단과 군경은 일본식 옷을 입고 다녀도 의심이 가면 기미가요를 불러보라고도 하고, 어려운 일본어 발음을 시켜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가차 없이 살해했다.
“쥬고엔 고쥿센(15엔円 50전錢)”
일본어에서 ‘쥬(十)’는 탁음이라고 해서 독특하게 발음되는데 당시 일본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를 ‘주고엔’ 혹은 ‘추고엔’이라고 발음한다는 데서 찾아낸 방법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인과 탁음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 일본인들도 상당수 살해당했다고 한다.
“일본 군인들이 일제히 칼을 빼 조선인 83명을 한꺼번에 죽였어요. 심지어 임신한 부인까지도 죽였는데 배를 가르는 과정에서 갓난아이가 튀어나오자 아이까지 죽였어요.”
조선인 학살에 관한 일본인들의 목격담도 이어졌지만, 일본 정부는 군대와 경찰의 학살은 모두 은폐하고 그 책임을 민간인 자경단에 돌렸다. 그마저도 형식상 재판에 회부한 것에 불과해 모두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됐다.
붙 타는 경시청(9월 1일 오후 4시경)
화염에 휩싸인 일본 경시청의 모습이다. 그 화력이 얼
마나 센지 바로 옆에 강물이 있어도 화재를 진압하기
에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이미 화재 진압은 포기
한 상태로 불티가 하늘을 날고 강물 위로도 떨어진 것
이 보일 정도다.
대지진과 대화재의 재앙에서 벗어나 목숨을 구했어도 유언비어로 인해 학살의 현장에 내몰린 조선인들. 자신들을 자경단으로부터 보호해줄 것이라 믿고 경찰서와 경마장 등을 스스로 찾아온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경찰의 말만 믿고 들어와 있다가 한꺼번에 자경단의 손에 넘겨지는 일도 허다했다.
조선인들을 내놓으라는 자경단의 소란에 못 이기는 척 뒷문으로 조선인들을 내보내 집단 학살에 가담한 군경들. 이 모든 것들이 자료집으로, 사진으로 고스란히 남아 그날의 진상을 알려주고 있다. 물론 자신이 보호하고 있던 조선인들을 자경단으로부터 보호한 일부 경찰서장과 조선인들을 고용하고 있던 일부 경영인도 있었지만 ‘조선인 피난소’를 찾은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살아돌아오지 못했다.
지금도 일본 정부는 일본 경찰과 군은 조선인을 보호하였을 뿐이며, 조선인을 학살한 건 자경단이라고 발뺌하지만 실제로는 일본 경찰과 일본 군이 조선인을 직접 죽이는 일이 많았으며, 자경단에게 조선인을 넘기는 경우도 허다했다.
여기에 소개되는 사진들은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 경시청 주관으로 발행된 자료집 중 ‘대지진과 대화재’ 당시의 기록을 담은 간지 형식의 사진집이다. 더이상 발뺌할 수 없는 확실한 자료이다. 조선인들을 보호하고 있는 사진이라고 하면서도 신원을 식별할 수 있는 특징인 눈(目)을 일부러 지운 흔적들도 찾아볼 수 있다. 과연 이 사진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이 사진들 외에도 일본의 만행을 입증할 수 있는 사진들은 많다. 그렇지만 관심을 갖고 이를 보도하는 언론은 사실상 전무한 실정이다.
경찰서 내 조선인들의 모습(9월 10일)
대지진과 대화재의 피해를 입은 관동 지역 안에만 10여 개 정도의 경찰서가 있었다. 조선인 보호소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경찰서로 데려왔
지만 이곳에서 살아나간 사람들은 없었다. 조선인을 찾으러 다니는 자경단들에게 경찰서는 쉽게 조선인을 학살할 수 있는 장소였다. 조선인
들을 내놓으라는 자경단에 못이기는 척 뒷문으로 내보내면 끔찍한 학살이 진행됐다. 사진을 보면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지워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사람을 특정할 수 있는 눈을 지움으로써 추후 일어날 조선인 학살의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다. 즉 신분이 노출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눈동자를 지운 후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일본의 작가이자 자유기고가인 가토 나오키(加藤直樹) 역시 “지진 발
생 1년이 지난 1924년 발표된 한 ‘경찰청보고’에도 조선인 폭동설은 유언비어이며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학살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인정했
다. 가토 나오키의 저서 <9월, 도쿄의 거리에서> 참고.
제노사이드로 인정돼야
“관동대지진 당시 자행된 조선인 학살은 제노사이드 범죄다.”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우리네 선조들의 원한을 풀어줘야 한다며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관련 자료와 사진들을 모아 세상에 알린 정성길 관동대지진위령탑건립추진위원장의 말이다. 정 위원장은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은 ‘조선인 폭동설’ 등 조작된 유언비어를 일본 정부가 조직적으로 유포시켜 선동한 대학살이므로 1)제노사이드(genocide)가 인정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는 또한 “앞으로 2년 후면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선조들이 억울하게 죽었는데 확실한 사망자 수도 모르고 있다”며 “정부가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들의 억울한 넋을 풀어주지 못한다면 의식이 깨어 있는 사람들 함께 나서야 한”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라도 왜곡된 역사부터 진상규명해 중국의 난징대학살과 나치 독일에 의한 홀로코스트(정부가 조직적으로 한 유대인, 집시, 동성애자 등의 말살정책)처럼 관동대지진 당시 자행된 조선인 학살 사건도 제노사이드로 인정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성길 위원장은 2018년 ‘조선인 대학살’을 규명할 수 있는 증거 사진들을 모아 ‘95년 전 한국 동포 대학살 화보 <관동대지진의 실체>’를 출판한 바 있다.
1) 제노사이드(genocide)는 인종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genos’와 살인을 나타내는 ‘cide’를 합친 것으로 ‘집단학살’을 뜻한다. 특정 집단을 절멸시킬 목적으로 그 구성원을 대량 학살하는 행위로 보통 종교나 인종, 이념 등의 대립으로 발생한다. 1944년 법률학자인 라파엘 렘킨(Rafael Lemkin)이 국제법에서 집단학살을 범죄행위로 규정할 것을 제안하면서 처음 사용한 용어다. 1948년 유엔 총회에서 제노사이드에 관한 협약이 승인됐으며, 특정 국가·종족·인종·종교집단을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파괴할 의사를 갖고 자행하는 행동을 ‘제노사이드 범죄’로 정의했다. |
동경제국대학 의학부교실
화재로 인해 제국대학 전체가 전소됐다. 화공
약품을 다뤘던 터라 그 피해가 컸다. 일제의
말처럼 조선인들의 방화로 건물 전체가, 도시
의 대부분이 전소될 수는 없다. 당시 바람이
많이 불어 불티도 대단했다.
역사를 왜곡해서도 안 되지만, 잊어서도 안 된다.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알고 있지만 나와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며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태도다. 100여 년 전 공포 속에서 처참하게 죽어갔던 선조들의 억을함을 누가 풀어줄 것인가. 우리가 잊은 채로 살아간다면 일본 정부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내기란 더욱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100년을 넘기면 어쩌면 또 다른 100년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집단 학살’이 국제적으로 제노사이드로 인정될 수 있도록 지금 힘을 모을 때다
정성길 관동대지진위령탑건립추진위원장(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
박물관장)
1. 화염에 싸인 제국극장
사진 속 중앙에 위치한 건물은 당시 유명했던 제국극장이다. 제국극장은 1911년 준공돼 도쿄 중심지인 마루노우찌에 소재한 일본 최초의
서양식 극장이었다. 제국극장 오른쪽은 경시청으로 지붕도 가라앉고 화염에 소실된 모습이다. 경시청에 붙은 불이 제국극장까지 옮겨붙은
것으로 강이 바로 옆에 있어도 불을 끌 수 없을 만큼의 화재였다.
한편 제국극장 외에도 일본을 대표하는 제국호텔이 있으니 이곳은 몽양 여운형 선생이 공직을 사퇴하고 개인 자격으로 일본의 초청을 받아
연설을 한 곳이다. 일제는 여운형 선생을 회유하려 했지만 제국호텔에서 수백 명의 기자들을 상대로 한 여운형 선생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는데 우리 한민족만이 홀로 생존권이 없을 수 있는가. 일본 정부는 조선인의 자유와 평등을 방해할 무슨 권리가 있는
가. 조선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다.”
2. 조선인 보호 수용소
“경시청(警視廳)의 ‘조선인 보호 수용소(保護鮮人収容所)’ (메구로경마장目黑競馬場) 9월 13일”이라고 적혀 있다. 앉아 있는 사람들은 전
부 조선인이다. 학살을 일삼는 자경단과 군경으로부터 피해 온 이들로 동네 유지나 이들의 고용주 등에 의해 몸을 피할 수 있었다.
3. 부상자 수용(9월 7일)
학교 목조건물에서 비교적 가벼운 부상을 당한 환자들을 진료하는 병원이다. 이곳 역시 조선인들은 들어올 수 없었다. 일본 자국민들 중에
서도 아이나 노인, 여성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경찰서에 모인 사람들(9월 10일)
자경단으로부터 몸을 피하기 위해 경찰서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이다. 스스로 온 사람들도 있지만 지역 유지나 고용주들에 의해 피신한 이들
이 많다. 명분은 이들을 보호해준다는 것이었지만 “조선인을 내놓으라!”는 자경단의 외침에 뒷문으로 내보내 학살당하게 만들었다.
공포와 수심이 깃든 모습이다. 조선인 보호소에서 외려 더 많은 학살이 일어났는데, 이는 밖에서 일일이 조선인을 찾아다니는 것보다 한번
에 많은 조선인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모인 조선인들은 전부 노동자들로 석탄을 나르는 등 고된 노동으로 그 생활이 피박했다.
왼쪽) 사상병자수용
지진 발생 다음 날인 9월 2일 경찰서에서 보호받고 있는 사상자들의 모습이다. 오른쪽에 경찰이 서 있는 것으로 보아 감시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간은 저녁 6~7시 정도로 사진에는 다 담을 수 없지만 보호소에는 사상자들로 꽉 차 있었다.
오른쪽) 경찰서 내 사상자(9월 3일)
경찰서에 죽은 사람의 시신을 안치했다. 관 앞에 향불을 피운 흔적이 있다. 관과 향 등을 보아 일본 자국민들의 시신을 안치한 곳임을 알 수
있다.
국기관 내 사상자(9월 7일)
1909년 료고쿠의 에코우인(回向院, 회향원)에 처음으로 국기관이 건설된다. 개관식 때 대단한 스모팬이자 작가인 에미 스이인(江見水蔭)이
“스모는 일본의 국기(国技)다”라는 연설을 하면서 ‘국기관(国技館)’이 됐다. 이후 관동대지진 때 불타버렸으나 국기관의 트레이드 마크인
텟산(大鉄傘, 지붕)은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재건할 수 있었다. 바로 이 국기관 별채에 환자들을 수용해 치료했다. 오른쪽에 화상
입은 환자의 모습이 보인다.
왼쪽) 응급환자 후송(9월 2일)
막사를 만들어 응급환자 후송 및 치료가 진행된 곳이다. 이곳 역시 조선인들은 들어갈 수 없었다. 일본인과의 차별을 둔 것이다. 학살로 길거
리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조선인들과는 달리 들것에 실어 후송하는 모습이 일본인임을 방증한다.
오른쪽) 복구 작업에 동원(9월 14일)
일제는 살아남은 조선인들을 모아 화재로 잿더미가 된 도시를 청소하라고 강제 동원시켰다. 긴 장대에 달린 깃발이 펄럭이는 모습과 지친
표정의 조선인들. 그 어디도 편히 쉴 곳 없었던 우리네 선조들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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