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호 마루대문 日本, 그 왜곡과 조작의 역사
日本,
그 왜곡과
조작의 역사
조작사진
일본의 메이지 신정부를 수립한 제122대 일왕인 명치(앞줄 오른쪽 2번째)를 중심으로 각국 수상급의 모습. 다 같이 모여 기념촬영을 한 것처럼보이나 일본이 당시 외교력을 과시하기 위해 조작한 사진이다. 러시아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2세(뒷줄 왼쪽 2번째)와 초대 주한미국 공사 루셔트 푸트(맨 왼쪽)의 모습이 보인다. 고종황제(뒷줄 맨 오른쪽)는 용포가 아닌 평상복 차림을넣어 신분을 격하시킨 것에서 일본의 민족근성을 엿볼 수 있다.
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흔히들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곤 한다. 그만큼 변화되기 힘들다는 의미다. 오죽하면 사람이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하면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라고 하겠는가. ‘한결같다.’는 말은 보통 좋은 쪽으로 쓰이지만, 여기 ‘한결같이’ 조작과 왜곡을 일삼는 나라가 있으니 바로 일본이다. 물론 모든 일본인들을 도매금으로 싸잡는 말이 아니다. 일본의 대륙진출과 침탈 야욕이야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제국주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던 일본이 저지른 만행은 반드시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할 일이다.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 착각하며 끊임없이 침략을 일삼던 일본. 지금도 역사 왜곡은 물론 군국주의 야욕을 드러내며 지난 역사에 대한 반성도 없고, 책임도 지지 않는 일본의 ‘조작과 왜곡’의 역사를 사진을 통해 들여다본다. |
일본군이 서울 남산 기슭에 자리 잡았던 조선통감부 길목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가운데 언덕에
아치형의 개선문이 보인다. 일본은 무력으로 남의 집 앞마당을 무참히 짓밟았다.
침략 야욕 속 소외당하는 일본
1904∼1905년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제국주의 전쟁이 일어났다.이 러일전쟁의 배후에는 영일동맹(英日同盟)과 러시아프랑스 동맹이 있었고, 제1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었다. 러시아는 패배의 결과로 혁명운동이 진행됐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 만주로 진출할 수 있게 됐다.
러일전쟁 중 일본은 계획대로 일본군 제12사단을 인천을 통해 상륙시켰고, 이때 일본의 특사대신으로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이 두 번째 한국에 방문했다. 이등박문은 제국주의에 의한 아시아 침략에 앞장섰으며, 을사늑약을 강요하고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인물이다. 일본에서는 근대화를 이끈 정치가로 평가되지만 조선 식민지화를 주도한 원흉으로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안중근에게 저격당해 사망했다.
여기에 공개된 사진은 일본군이 서울 남산 기슭에 자리 잡았던 조선통감부 길목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언덕에는 아치형의 개선문이 설치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진 왼쪽에 보이는 것은 명동성당이다. 사진에서도 보이지만 일제는 한국의 허락 없이 자기 마음대로 남의집 앞마당에서 훈련하고 있지만, 이미 힘을 잃은 나라는 말 한마디 할 수가 없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그곳을 무참히 짓밟은 일제의 만행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1903년 알렌 미국 공사의 초청으로 정동 미국공사관에서 회의를 가진 후 각국 주한외교사절들이 기념촬영한 모습.
오른쪽부터 청국 공관원, 독일 잘데른 공사, 프랑스 뿔랑시 공사, 미국 알렌 공사, 청국 허태신 공사, 영국 조던 공사, 벨기에 방가르트 공사이다.
왼쪽 첫 번째는 미국 센즈 궁내부고문, 두 번째는 러시아 라밴 공사의 모습이다.
무력으로 무참히 짓밟는 일본군
힘을 잃은 나라는 말 한마디 못해
외교적으로는 소외당했던 일본
한편 사진 속 장소는 조선시대 군사들이 훈련했던 무예장(武藝場 )이 있었던 터라, 예장 혹은 예장골로 불렸다. 오늘날 예장동이라는 지명의 기원이다. 이후 1885년 도성 내 일본인의 거주가 허용됨에 따라 일본인들이 남산 주변지역에 정착하면서 왜성대(倭城臺)라고 불리기도 했다.
제국주의에 대한 열망, 대륙진출의 야욕으로 물든 일제였지만 외교적으로는 소외당하기 일쑤였다. 초대 주한미국공사인 호러스 알렌은 1903년 정동에 있는 미국공사관으로 각국 주한외국공사를 초청했다. 각국 공사 즉 외교관 회의를 주재한 후 본관 앞뜰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서울에 와 있던 각국 외교사절들은 서로 경쟁과 협조 관계를 맺고 있었다. 사진 속에는 독일, 프랑스, 미국, 청국, 영국, 러시아 공사의 모습이 보이고 있지만 일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각국 외교사절들이 모인 자리에 초청받지 못한 것으로 당시 국내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사진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제 사회 속에서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는 일본의 모습을 사진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백두산 정계비 옛모습. 숙종 48(1712)년에 국경을 정하기 위해 세운 비(碑)로 주홍색으로 글을 새겼다. 1914년에 촬영된 사진이다.
이와 관련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는 “이러한 중대한 모임에 일본 공사를 제외시킨 것은 당시 외교관원들 사이에서 홀대를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며 “미국 공사가 주최한 회의에서 일본을 제외했다는 것은 외교적으로 소외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역사적으로 중대한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백두산에 쇠말뚝도 박아
욕심은 끝이 없다고 했던가. 일본은 우리 민족의 영산이라고 불리는 백두산 천지에도 쇠말뚝을 박아 일본 시조신을 위해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1943년 일본은 백두산 천지에 재단을 마련해 일본 개국신인 아마테라스 오미가미를 위해 제를 올렸다. 또한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줄 것을 합창해 소리 높여 주문을 외우고 기원했다. 이는 사진으로도 명백히 남아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뿐 아니다. 일본은 한국의 간도영유권 주장의 근거가 됐던 백두산 정계비를 철거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백두산 정계비의 모습이 담긴 사진은 그야 말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진이다. 백두산 정계비는 ‘서쪽은 압록강을 경계로 삼고, 공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삼는다.’는 뜻의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의 비문으로 한국의 간도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작용해왔다. 1712년에 세워진 이 비석은 비문에 언급된 ‘토문강’의 지명에 대해 한·중 양국의 해석이 엇갈려 양국 영토 분쟁의 씨앗이 돼왔다. 백두산 정계비는 1931년 만주사변 직후 일제에 의해 철거됐다. 중국은 장차 통일 한국의 간도 반환 주장에 맞서기 위해 지난 2006년 백두산을 ‘장백산(長白山, 창바이산)’란 명칭으로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는가 하면, 백두산을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려는 등 이른바 ‘백두산 공정’을 펼쳐왔다.
백두산 천지에 쇠말뚝을 박아 일본 개국신인 아마테라스 오미가미를
위해 제사를 지내고 있는 모습
일본, 백두산 정계비 철거
광개토대왕릉비문도 조작해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도
또한 ‘우기기’라면 둘 째 가라면 서러울 일본은 지금까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다. 독도가 한국의 고유영토라는 역사적 사료가 많음에도 일본은 계속해서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일본은 수십 년 전부터 광개토대왕릉비문을 조작하고 훼손해오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왜가 신라를 궤멸시켰다(倭滿倭潰)’는 임나일본부설이다. 이는 우리 학계가 비문 내용을 연구 끝에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크게 궤멸시켰다(倭滿倭潰)’는 내용으로 밝혀내 종지부를 찍었으나 일본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100여 년 전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와 그 옆에 비를 지키며 서 있는 한조선인의 모습.
한편 광개토대왕릉비와 관련, 100여 년 전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와 그 옆에 서 있는 조선인이 찍힌 사진은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광개토대왕릉비를 지켜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눈이 덮인 황량한 대지 위에 그 위풍당당한 위용을 자랑이라도 하듯 우뚝 솟아 있는 광개토대왕릉비와 그 옆에 망건을 쓰고 핫바지를 입은 한 조선인이 서 있는 모습은 우리 민족이 광개토대왕릉비를 제 몸처럼 지켜왔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역사를 왜곡·조작하는 일은 이제 놀랍지도 않다. 심지어 죄 없는 조선인들을 무참히 학살하기도 했는데,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지방에서 발생한 대지진(규모 7.9)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수 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한 것도 그중 하나다.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도 조선인 대학살에 대해 인정하지도, 반성하지도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이 있다. 역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회개가 없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일본 정부의 잘못된 역사 의식으로 피해를 받는 건 다름 아닌 일본 국민이며, 올해 들어 계속되는 대형 자연재해와 인재 또한 이를 방증하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역사의 심판대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는 것이 나라와 국민을 위한 길임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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