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호 마루대문 "하늘천 따지" 평민을 위한 곳, 서당

2021.06.01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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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천 따지"
평민을 위한 곳,
서당


글. 이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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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5월이 됐다. 꽃 중의 꽃 장미가 만발하고 이제 막 여름으로 가기 직전 5월에는 ‘가정의 달’로 불릴 정도로 가정과 관련된 행사가 많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까지. 축하하고 감사할 일이 많은 달이건만 최근 들려오는 소식에는 참담한 사건들이 많다.
 

君師父一體(군사부일체).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의 은혜는 같다. 예로부터 나라의 어버이인 임금과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 그리고 훈육해주신 스승의 은혜는 같다 했다. 그만큼 스승은 우리 인생에 중요하며 자라나는 아이들의 교육은 나라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최근에 교권이 흔들리는 사건들이 들리고 교육의 현장에서 폭력 등의 일이 나타나면서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최근 예절을 가르치는 곳인 서당에서마저 폭력 사건이 벌어지면서 교육 현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많아지고 있다.


오늘날 서당이라고 하면 우리 고유의 전통과 예절을 가르치는 곳으로 부모들이 방학 때 아이들의 예절 교육을 위해 보내고는 한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조차 폭행 사건이 일어나니 사회 곳곳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렇다면 서당은 어떤 교육 기관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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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단원 풍속도첩> 서당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고구려에서 시작된 평민교육

“고구려인은 학문을 좋아하였다. 궁리의 시가에 이르기까지 또한 서로 학문을 힘써 권하며 큰길가에 모두 장엄한 집을 짓고 경당이라고 이름하였다. 미혼의 자제가 무리지어 거처하며 경전을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 - <신당서>


서당의 전신은 고구려의 ‘경당(扃堂)’이다. <신당서>나 <구당서>에 의하면 고구려인들은 커다란 집을 짓고 혼인하기 전에 모여 학문과 활쏘기를 익혔다. 경당에는 형문(衡門)이나 시양(廝養)과 같은 신분이 낮은 자들도 다녔다는 내용이 있어 귀족 자제들을 위한 것보다는 평민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경당에서 책을 읽었다고 하는데 책을 경전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유교 경전을 읽으며 교육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 국립교육기관인 372(소수림왕 2)년 ‘태학’ 설립 이후 경당이 세워졌을 것으로 본다.


경당으로 시작된 평민교육은 시대가 지나도 이어지는데 고려에는 십이도(十二徒), 서당이 있었다. 십이도는 국립교육기관인 국자감과 같은 수준으로 과거준비교육을 했고 서당은 훈장이나 학동의 능력에 따라 기초 문자 교육부터 주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진행됐다. <고려도경>에는 “마을 거리에는 경관과 서두가 두 개, 세 개씩 서로 바라보고 있으며 민간의 미혼자제가 무리를 이루어 선생에게 경서를 배우고, 좀 성장하면 유(類)대로 벗을 택하여 사관(寺觀)으로 가서 강습하고 아래로 졸오·동치도 역시 향선생(鄕先生)에게 배운다”고 기록돼 있다. 이를 통해 고려의 서당은 가세가 풍족한 집안에서 독선생(獨先生)을 앉혀놓고 이웃의 자제들을 무료로 동석시켜 수업하거나 향중(鄕中)의 몇몇 유지나 한 마을 전체가 조합해 훈장을 초빙하여 자제를 교육시키는 등 여러 방식으로 많은 서당이 운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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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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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윤씨 문중의 자녀교육을 진행했던 종학당




이렇게 발전한 서당은 조선시대에 서원과 함께 발전한다. 조선에서의 서당은 사설 초등교육 기관으로 발전했고 중기 이후에는 사회적으로 보편화돼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서당은 기본으로 유학에 기초를 뒀으며 천인의 자제까지 입학이 가능했다.



조선시대 서원과 서당

조선시대 사설교육기관으로는 서원과 서당이 있다. 서원은 뛰어난 유학자 등의 위패를 모시고 후학을 양성한 곳이다. 1543년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안향의 위패를 모시면서 만든 백운동 서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이후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로 있을 때 사액 서원이 되면서 ‘소수서원’이 됐다. 이러한 서원에는 서당도 함께 있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렇다고 서당에 서원이 있는 개념은 아니었고 보통 서원에 들어가기 전 서당에서 기본 자세와 기초적인 유교 경전을 학습했다.


서원에 소속된 서당에서는 유교에 관한 초보적인 지식을 배우고 과거 응시를 위한 교육을 하고 서원의 부속교육기관으로의 역할도 함께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서원은 교육적인 기능보다 제사를 하는 기능이 커졌고 교육적인 기능은 ‘향촌서당’으로 옮겨갔다.


서당 역시 처음의 서원과 마찬가지로 학문적으로 능력 있는 개인이 열어 제자들을 기르는 곳이었다. 16세기 사림파가 나타나면서 확대됐는데 ‘향약보급운동’과 연관이 있다. 


사당 설립을 주도한 사림은 대부분 향촌사회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명문사족들이었다. 대부분 생원·진사들이 서당 설립을 주도했으며 서당 교육을 통해 유학적 질서를 향촌사회에 보급하고 정착시키려고 했다.


17세기 이후 생겨난 향촌서당은 이전과 동일하게 과거 준비를 위한 교육을 진행했으며 한문의 독해력 및 유학의 기초 경전의 지식을 이해하고 순수한 동몽교육 및 예의범절 교육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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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보물로 지정된 도산서원의 도산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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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향교




훈장과 학생

대부분의 서당은 작은 규모로 이뤄졌다. 그렇기에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인 훈장은 서당에 1명씩 있었고 규모가 큰 경우에는 학생들 가운데 나이와 학식이 우수한 자를 ‘접장’으로 세워 훈장의 감독 하에 지도하도록 했다.


훈장은 일정한 자격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고 마을에서 학식이 있고 덕망 있는 자가 맡았다. 18세기 이전까지는 향촌사회에서 명망 있는 사족들이 직접 서당을 운영했기에 지위나 대우가 좋았다. 그래서 마을 잔치 등이 있으면 훈장을 모셔서 대접했으며 서당의 운영비나 훈장 가족의 생활비까지 학부형이 부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18세기가 되면서 중인과 같은 사족이 아닌 계층이 서당의 훈장으로 나타났다.


훈장은 일정한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학식이 천차만별이었고 경(經)·사(史)·자(子)·집(集)에 두루 통한 사람이 드물었고 주석과 언해를 참고해 겨우 뜻을 해득할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직업적인 훈장이 나타나고 몰락한 지식인들이 교편을 잡으면서 훈장에 대한 사회적 대우가 낮아졌다. 당시 가난한 벽촌의 훈장 중에는 한문자의 활용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자도 있었다. 이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신분 질서가 무너졌고 전통 윤리관이 변화하면서 자연스레 따라오는 변화였다.


서당을 다니는 학생들은 5~6세의 아동들이 중심이었지만 20세 안팎의 나이대도 있었다. 서당에 따라서 다니는 학생의 수는 2~3명인 경우도 있었고 많으면 40명이 되는 큰 서당도 있었다. 그래서 큰 규모의 서당은 접장을 두고 운영했다. 이러한 접장은 훈장에게 직접 수업을 받으면서 자신이 속한 접의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보수는 없어도 학비가 면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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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지난해 보물로 지정된 옥천 이지당, 우)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



이러한 서당교육은 조선 말기로 접어들면서 쇠퇴했다. 이러한 쇠퇴를 막고자 유형원·정약용 등은 교육체제일원화를 논의했다. 사학이었던 서당과 서원을 관학에 흡수시켜 학제를 계열화하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국가재정과 관료조직의 성격상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고 19세기 말 근대 교육이 도입되면서 ‘개량서당’이 등장했다. 개량서당은 근대교육을 도입해 민중들의 계몽에 함께했다. 하지만 일제는 이를 가만히 두지 않았고 1918년 <서당규칙>을 공포해 서당 개설을 막았다.


<서당규칙>

1. 서당을 개설하려고 할 때에는 도지사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2. 서당에서의 교과서는 조선 총독부 편찬의 교과서를 사용하여야 한다.

3. 조선총독부가 적격자로 인정하지 않는 자는 서당의 개설자 또는 교사가 될 수 없다.

4. 도 장관은 서당의 폐쇄 또는 교사의 변경, 기타 필요한 조치를 명령할 수 있다.


일제에 의해 점차 없어진 서당은 광복 후 <교육법>이 제정되면서 학제가 정비되는 과정에 소멸되어 갔다. 초등 이전의 교육을 맡았던 서당의 교육기능 역시 학교로 옮겨졌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한자 교육을 하는 곳으로 바뀌게 됐다.


이같이 서당은 평민의 교육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지난해 12월 29일에는 강릉향교 명륜당과 같은 서원·향교와 함께 도산서원의 도산서당, 옥천 이지당 등 3건이 보물로 지정됐다. 서당 중에서 보물로 지정된 것은 처음이다. 문화재청은 “20건의 서원·향교 문화재는 역사·예술·학술·건축 가치가 뛰어나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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