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호 마루대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왔다

2022.07.31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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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에도 봄은, 왔다 


글·사진 이예진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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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언덕’이라는 의미를 가진 대구(大邱).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며 광역시에 속한다. 이름에도 나타나듯 분지로 이뤄진 대구는 여름에 가장 더운 지역으로 뉴스에서 뜨거운 아스팔트 위 계란을 깨트려 익히는 모습은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를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다.


하지만 대구는 단순히 도시가 크고 더운 것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많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 약 2만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대구는 과연 어떤 얼굴을 갖고 있는 곳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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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팔공산



대구의 진산, 팔공산

대구에는 큰 산 2개가 자리를 잡고 있다. 대구의 동쪽에 있는 팔공산과 남쪽에 있는 비슬산이다. 흔히들 팔공산을 남성의 산, 비슬산을 여성의 산이라고 말한다.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팔공산의 옛 이름은 공산(公山)·부악(父岳)이었다. 하지만 후삼국 시대 이곳에 있었던 공산 전투(927)에서 신숭겸을 비롯해 김락·김철·전이갑·전의갑 등 8명의 장수가 왕건 대신 전사하면서 지금의 팔공산이 됐다.


팔공산은 해발 1192m의 높이로 태백산맥의 보현산과 연결돼 있으며 대구광역시 동구, 경북 경산시, 영천시, 군위군, 칠곡군에 걸쳐 있는 큰 산이다. 최고봉 비로봉을 중심으로 날개를 펼친 것처럼 동봉과 서봉이 솟구쳐있는 모양새다.


팔공산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갓바위’로 관봉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31호)이다. 위치상 경산시에 있는 관봉 석조여래좌상은 머리에 갓을 쓰고 있는 형상의 좌불상으로 신라 선덕왕 때 의현대사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러고 보면 ‘갓’은 참 재미있는 단어다. 최근 한국 드라마가 외국에 많은 인기를 끌면서 ‘갓’이 함께 유명해졌다. 조선 후기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우리 전통 모자 중 하나인 ‘갓’의 발음이 신을 뜻하는 영어의 ‘GOD’과 같아서 “조선 사람들은 신을 머리에 얹고 다닌다”라고도 했다. 이런 것을 보면 이미 오래전부터 하늘의 민족이라고 생각한 선조들의 사상과 맞닿아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 않나 생각된다. 


또 오늘날 보면 굳이 불자(佛者)가 아니어도 종교를 초월해 소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갓바위를 찾는다. 마치 원효대사가 모든 종교는 하나로 통하니 싸우지 말자고 외쳤던 ‘일심사상, 화쟁사상’과도 같다. 원효대사와 인연이 깊은 팔공산답다.

 

팔공산은 여러 방면에서 오를 수 있는데 대구광역시 동구에서 출발하는 케이블카를 가장 많이 이용한다.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비로봉과 더불어 갓바위까지 쉽게 오를 수 있다. 케이블카 외에 경북 군위군에 있는 팔공산 하늘정원을 통해 올라가면 비로봉까지 최단코스로 도착할 수 있다. 


비로봉에서는 동봉과 서봉으로 향할 수 있는데 동봉으로 향하다 보면 석조약사여래입상을 만날 수 있다. 서쪽을 향해 세운 6m 높이의 이 불상은 거대한 모습에 비해 푸근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정확한 연대는 나타나지 않지만 관봉 석조여래좌상과 같은 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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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석조약사여래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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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굴



팔공산에는 이처럼 불교문화 유적이 많다. 하늘정원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원효대사가 6년 동안 머물며 도를 닦은 ‘원효굴’이 있다. 원효대사의 아명인 ‘서당’을 따서 ‘서당굴’이라고도 불리는 원효굴은 원효대사보다 약 20년 먼저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의 염원을 담아 굴 바닥 바위 틈에서 솟아난 물을 마셨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아래에는 654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오도암이 자리 잡고 있으며 팔공산은 원효대사가 태어난 경북 경산 인근에 있어 가장 인연이 깊은 산으로 꼽힌다. 그리고 국보 제109호인 군위삼존석굴도 원효대사가 삼국 통일과정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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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전적기념관



팔공산이 여타의 산들과 다른 점은 정상부에 있다. 보통의 산들의 정상부는 뾰족하게 솟은 암바위가 맞이하는 반면 팔공산은 널따란 공터가 등산객을 맞이한다. 특히 하늘정원을 통해 올라가면 조금은 낯선 풍경을 맞이하게 되는데 바로 군부대가 정상부에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우리의 현대사 중 가장 안타까운 한국전쟁과 연관이 있다.


시산혈해의 지역, 다부동

팔공산의 아픔은 꽤 최근의 일이다. 한국전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북한은 남쪽으로 밀고 내려왔고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후 7월 24일 대전, 7월 말 목포·진주, 8월에는 김천·포항까지 함락시켰다. 


겨우 북한군을 막아낸 곳은 낙동강 전선으로 영덕부터 왜관, 창녕, 마산까지 아슬아슬하게 버텼다. 당시 한국은 대구를 임시수도로 정해 북한군을 끝까지 막고자 했고 북한은 대구와 부산 모두 함락시키기 위해 제3·13·15사단 등 5개 사단 병력을 왜관과 다부동 전선에 집중 투입시켰다.


국군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제1·8사단과 미국의 제1기병사단 장병들과 함께 전선을 지키고자 했고 9월 중순까지 버티면서 인천상륙작전까지 성공할 수 있도록 했다. 이 30일간 12번의 공방전을 통해 낙동강 전선에서 발생한 사상자 수가 국군에만 1만여 명에 달하며 북한군의 경우에도 약 1만 7500명의 피를 흘렸다. 


낙동강 전선에 있었던 전투로는 유학산 전투와 328고지 전투, 수암산 전투, 가산산성 전투 등이 있으며 모두를 가리켜 ‘다부동 전투’라고 한다. 유학산 전투는 칠곡군 가산면과 석적읍 사이에 있는 유학산에서 8월 13일부터 23일까지 있었던 전투다. 유학산은 대구로 향하는 다부동 일대의 도로를 감제할 수 있는 곳이어서 대구 방어의 관문이자 요충지이기에 국군은 뺏길 수 없었다. 원래 고지를 먼저 점령한 것은 북한군이었으나 국군은 맨손으로 암벽을 올라 9회에 걸쳐 백병전을 치르면서 고지를 탈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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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산성



동시에 인근에서는 328고지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유학산 전투와 비슷한 날짜인 8월 13일부터 24일까지 있었던 328고지 전투는 무려 15번의 주인이 바뀌는 처절한 현장이었다. 328고지 역시 낙동강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 전략적 요충지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피 흘린 가운데 승기만 잡았던 것은 아니었다. 8월 15일부터 30일까지 있었던 수암산 전투는 식량과 탄약이 부족한 악조건 속에 벌어졌다. 수암산 전투에 투입된 국군 1사단 12연대 2대대는 수암산 정상 인근의 513고지를 점령하기도 했지만 끝내 정상은 탈환하지 못한 채 미 7기병연대에게 인계하고 다부동으로 이동했다. 


칠곡군에서 벌어진 ‘가산산성 전투’도 치열했다. 팔공산 도립공원 내에 있는 가산산성(사적 제216호)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인조 때 국방수호의 절실함을 깨닫고 경상도관찰사 이명웅이 장정 10만여 명을 동원해 1639(인조 17)년 9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쌓은 성이다. 이후 여러 번의 보수·정비를 통해 국내에서 드문 삼중곽 형태의 산성으로 완성됐다. 하지만 이 가산산성이 절실하게 이용된 것은 다부동 전투였다.


8월 18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가산산성 전투’는 북한군이 국군 1사단 11연대본부와 미군 포병부대를 습격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북한군은 지속적으로 후방을 교란시켰고 국군은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가산산성에 주둔하던 북한군에게 반격을 가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24일 국군이 가산산성을 완전히 탈환하고자 남문과 서문을 공격했고 동문과 북문의 퇴로를 차단하면서 포위하고자 했다. 매섭게 저항하던 북한군은 27일 국군의 2개 중대가 집중사격을 하는 동안 또 다른 2개 중대가 성벽을 넘어 남문을 진입하면서 완전히 탈환했다. 


다부동 전투에는 전문적인 군인 외에 오로지 애국심을 가지고 용기 있게 자원한 ‘학도의용군’도 함께했다. 이들은 전쟁 중 학업을 포기하고 펜 대신 칼을 들고 나라를 지키고자 스스로 참전한 학생들로 1950년 6월 29일 수원에서 200여 명이 모여 조직된 ‘비상학도대’가 이들의 모체다. 전쟁 기간에 참전한 학생들은 전투요원에 2만 8000여 명, 후방지원요원에 27만여 명으로 조직됐으며 이 가운데 7000여 명은 군번과 계급도 없이 나라를 지키다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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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전적기념관 내부에 전시된 국군 하사의 철모, 군번줄, 계급장



근대 역사의 중심지, 대구

이처럼 대구는 많은 피가 쌓이고 쌓인 곳 중에 하나다. 덕분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쟁 초반 불리하던 전세가 드라마틱하게 역전됐다. 하지만 대구는 피만 흘린 곳이 아니다. 근대 개화의 모습을 고스란히 품고 있기도 하다.


대구는 조선시대에 영남 내륙교통의 요지이자 군사적 중심지로 여겨졌다. 안동과 더불어 영남학파 문인들이 기거하는 곳이었으며 이는 개화시기에도 영향을 끼쳤다. 일제에게 나라가 뺏기기 전 개화의 흐름에 맞춰 대구에는 신명학교 등 근대적 중등교육기관이 나타났고 이를 통한 인재들이 양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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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 전투에서 결사 항전한 제1사단 수색대대 학도병

과 소년병의 모습(1905년 8월)




이에 근대 교육을 받은 이들이 마음을 합해 민족실력양성운동을 전개했으며 1907년 서상돈·김광제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경제적 구국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됐다. 일제의 탄압 속에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나 이 정신은 1990년대 IMF가 터지고 ‘금모으기 운동’으로 이어졌다. 근대적 대구의 모습에는 이면이 있는데 바로 경북지역의 기독교가 뿌리를 내렸다는 점이다. 이는 중구에 있는 근대골목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청라언덕부터 시작되는 이곳에는 3채의 붉은 벽돌 건물을 만날 수 있다. 이 건물 모두 100년이 넘은 근대 문화유산으로 20세기 전후 대구에 온 미국 선교사들이 지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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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근대골목 청라언덕에 있는 선교사 블레어의 주택. 이곳에는 블레어의 주택과 더불어 챔니스, 스윗즈 주택이 함께 있으며 

대구에 기독교가 전파되던 초기에 선교사들이 거주하던 곳이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 가곡 <동무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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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근대골목 청라언덕에 있는 기념비. 청라언덕은 이윤상 

작사의 노래 <동무생각>의 무대가 된 곳이다




블레어 주택, 챔니스 주택, 스윗즈 주택으로 불리고 있는 이곳에는 개항장이었던 부산을 통해 대구로 와 의료와 교육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한 선교사들이 머물렀다. 현재 이 주택들은 교육·역사박물관, 의료박물관, 선교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휴관하고 있다.


그리고 주택들이 있는 청라언덕은 푸를 청(靑), 담쟁이 라(羅)를 써서 담쟁이덩굴이 함께하는 언덕이다. 대구 출신의 작곡가 박태준이 작곡하고 이은상이 작사한 <동무생각(思友)>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주택들 사이에 <청라언덕> 노래비가 있으며 많은 이들이 찾아와 추억에 젖어드는 곳이다.


이렇게 대구에는 이곳 출신의 문인·예술가들이 많다. 그중에 한명이 일제강점기에 펜을 들어 맞섰던 저항시인 ‘이상화’다. 근대골목 끝자락에 가면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던 서상돈의 고택과 함께 이상화 고택이 함께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이상화는 말년(1939~1943)을 보냈으며 마지막 작품 <서러운 해조>를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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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이상화 고택 내부. 시인 이상화의 대표작으로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있으며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저항시다.




분지 지형의 대구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오랜 세월 많은 이들이 거쳐 가면서 남긴 이야기는 지금의 우리를 위해 있는 역사다. 그렇게 생각하면 대구에 근대 역사 문화의 흔적이 남은 이유는 팔공산 탓이 크다.


팔공산으로 이어지는 낙동강 전선에서 쏟은 피로 인해 오히려 대구 시내는 지금까지 흔적을 남길 수 있었고 우리에게 전해져 오고 있다. 피를 쏟은 덕분에 남겨진 흔적. 아이러니하지만 그것이 바로 역사다. 


‘지즉위진간(知則爲眞看)’이라고 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뜻이다. 이상화는 시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라고 의문을 던지며 소망을 표한다. 지금 우리는 봄을 맞이했다. 하지만 과연 온전한 봄을 맞이했는지 생각해본다. 


하늘이 생각하는 때와 인물이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하늘에서는 오래전부터 우리의 역사 속에 오늘날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이 앞서 언급했던 ‘갓’과도 같으며 ‘갓’과 함께 입었던 ‘흰 두루마기’도 생각해볼 수 있다. <성경>에 보면 예복인 ‘흰옷’에 대해서 언급을 한다. 마지막 구원자가 나타나는 때에 흰옷을 준비해야 맞이하고 함께할 수 있다. 우리는 오랜 세월 ‘백의의 민족’으로 살아왔으며 그 많은 색상 중 굳이 흰옷을 고집했을까. 이러한 모든 것은 하늘이 모든 것을 미리 예비해뒀음을 짐작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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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숭겸유적지


이육사의 <광야>에 보면 1연에서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라고 한다. 닭의 방언을 ‘달구’라고 하는데 대구의 옛 지명인 ‘달구벌’이 생각난다. 마치 까마득한 밤에도 결국 닭이 울면 아침이 오듯 ‘달구(닭)’가 우는 달구벌(대구)에서 하늘이 열리는 것 같지 않은가. 그리고 마지막 연에서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라고 한다. 마지막 때에 흰 말을 타고 오는 자를 끝까지 기다리는 곳. 그곳이 바로 우리가 찾아가야 하는 곳이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빼앗긴 들은 잃어버린 조국을 의미하지만 지금 우리가 생각해보면 이제 빼앗긴 ‘들’을 찾아왔다. 하지만 우리는 해방 이후 많은 문제들을 직면했고 지금까지도 무수한 다툼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과연 봄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모든 역사는 산으로 시작해 산으로 끝난다. 분지 지형의 널따란 대구는 그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산으로 둘러싸인 덕에 존재할 수 있었다. 이처럼 산은 모든 것을 모으고 품는 존재이면서 함께하는 곳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 대해 ‘인산인해(人山人海)’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성경>에도 보면 마지막 때가 되면 산으로 도망가야 한다고 기록돼 있다. 과연 그 산은 또 어디인 것일까 생각해 보면 마지막 때 등장하는 구원자가 나타나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우리 모두가 마지막 때 구원자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는 지금에 과연 ‘봄’이 올 것인지, 아니면 이미 온 것인지 자연만물에 신의 성품을 담아놓는다 했으니 팔공산을 바라보며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하지만 우리에게 ‘봄’은 어느덧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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