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호 마루대문 광복을 위한 노래

2022.08.27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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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을 위한 노래 


글 백은영



광복(光復) 77주년을 맞았다. 빛도 자유도, 주권도 없이 일제 식민지 아래 살아왔던 질곡의 36년이 지난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그토록 그리던 광복을 맞았다. 태극기를 마음껏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목놓아 외치던 이들. 그날 그들이 흘린 눈물은 분명 나라를 되찾은 기쁨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주권을 잃다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강제로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해 국권을 상실한 치욕의 날을 이르는 말이다.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과 일제 사이에 병합조약이 강제로 체결됐다.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병합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일주일 뒤인 29일 이 조약이 공포되면서 대한제국은 국권을 상실하게 됐다. 공포 당시 반발을 두려워한 일제는 정치 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했을 뿐 아니라 원로 대신들을 연금하는 등 적법한 비준 절차를 무시하고 이 모든 것을 강압적으로 진행했다. 이는 국제법상으로도 엄연히 무효인 불법조약이었다. 


한편 일제는 이보다 앞선 1905년 11월 17일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강제로 조약을 체결했으니 바로 ‘을사늑약’이다. 이 을사늑약 역시 고종 황제가 끝까지 재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인 무효의 조약이다. 이후 1906년 일제는 조선 황실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한국 통치기구인 ‘통감부’를 설치해 완전한 한일 강제병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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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서대문형무소의 모습(출처: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민족의 정체성을 없애라

나라 없는 국민이 없으며 국민 없는 나라도 없다. 나라가 주권을 잃었으니 어제와 같은 땅을 밟고 있어도 일제강점기 아래 사는 삶은 죽은 삶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유는 물론 우리의 말과 글, 심지어 이름까지도 빼앗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는 내선일체, 황국 신민화 등의 구호를 내세워 우리말과 우리 역사 교육을 금지했으며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이름마저도 일본식으로 고치게 했으며 이를 따르지 않는 학교는 폐쇄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조선인들은 유구한 역사적 자부심과 문화에 대한 긍지가 높아 통치가 어렵다. 그들을 대일본제국의 신민(臣民)으로 만드는 방법은 그들의 가장 큰 자긍심인 역사를 각색하여 피해의식을 심는 것이다. 조선인을 뿌리가 없는 민족으로 교육하여 그들의 민족을 부끄럽게 하라. 문화 역시 일본의 아류임을 강조하여 교육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스스로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 거듭나고 싶어할 것이다.” 

 - <조선식민통치사> 中 


제3대 한국 통감이자 경술국치 이후 초대 조선총독을 지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조선 통치 전략 중 하나가 바로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는 것이었다. 


일제 조선총독부 총독의 <조선인 역사 교육> 지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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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독립을 외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한 독립투사들의 모습.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역사·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럼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先人)들의 무위(無爲), 무능(無能), 악행(惡行)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들의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기둥으로 만들라… 단군을 부정하게 하라. 조선인을 뿌리가 없는 민족으로 교육하여 그들의 민족을 부끄럽게 하라. 이것이 식민지 국민을 만드는 비법이다.”


일제는 19세기부터 조직적이고 계획적이며 치밀하게 한국의 역사와 정신문화를 말살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일제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1910~1911년까지 51종 약 20만 권의 사서를 강탈하고 불태웠으며, 1911년에는 대한제국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약 10만 권의 장서를 몰수했다. 또한 1911년 제1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면서 교육을 통제하고 우리의 문화를 말살하기 시작했다. 1938년 3월 제3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해 초등 및 중등학교에서의 조선어 과목을 폐지했다. 이는 조선어사전 편찬 금지로 이어지는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강제해산 사건과 동년의 진단학회 해산으로 이어졌다. 민족말살정책에서도 가장 큰 반발을 불러온 것은 창씨개명(創氏改名)이다.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을 개정해 한국 민족 고유의 성씨제를 폐지하고 일본식 씨제도를 설정해 “씨는 호주가 이를 정함”이라 했다. 1940년 2월 시행된 이 제도는 같은 해 8월 10일까지 성씨를 결정해 제출하도록 명령했다. 협박과 강요에 의해 진행됐으며 이에 불응하는 자는 ‘비국민’ 또는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낙인찍고 미행하는가 하면 식량 등 배급대상에서 제외하는 등 사회적 제재와 갖은 압박을 가했다. 특히 일제는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왜곡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조선사 편찬 사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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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회원들 모습



그렇게 16년에 걸쳐 일본이 만들어낸 35권의 조선사. 일제는 조선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추고 과장해 후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보편적으로 존재했던 정치적 대립을 조선에만 있던 ‘당쟁’으로, 실재했던 고대 고조선의 역사를 허구인 ‘단군신화’로 만들었다. 또한 500년 역사와 전통을 가진 ‘조선’을 이씨들만의 나라 이씨조선 즉 이조(李朝)로 축소, 얕잡아 불렀다. 


“조선의 청소년들은 자국의 모든 인물, 역사에 대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 조선사 편찬을 독려하며 中


빼앗긴 들보다 무서운 식민교육

“우리는 패했지만 한국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데 한국민이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한국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으며 찬영했지만 현재 한국은 결국은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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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9일 오후 4시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중앙청)에서 열린 종전협정에 대한 항복문서 조인식에서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대장, 

조선군사령관 고즈키 요시오(上月良夫) 중장(왼쪽), 진해경비사령관 야마구치 기사부로(山口儀三郞) 제독(오른쪽)이 함께 

참석해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출처: 미국 국립문서보관청)




일본의 36대 총리이자 마지막 조선총독인 아베 노부유키가 조선총독부의 마지막 업무에서 남긴 것으로 알려진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이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는 우리 민족의 유구하고 찬란했던 역사가 일제강점기 동안 왜곡되고 폄하됐다는 사실이다. 아직도 일제의 식민사관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아베 노부유키의 발언이 전부 잘못됐다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1945년 패망한 일본은 자기 땅으로 돌아갔지만 그들이 남겨놓은 식민사관은 떠난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광복은 왔으나 완전한 광복은 아니라는 이유가 여기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동북아 고대사에서 단군조선을 제외하면 아시아 역사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만큼 단군조선은 아시아 고대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데 한국은 어째서 그처럼 중요한 고대사를 부인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일본이나 중국은 없는 역사도 만들어내는데 한국인은 어째서 있는 역사도 없다고 그러는가. 도대체 알 수 없는 나라이다.”


1982년에 <고조선 역사> 펴낸 러시아 학자 유엠 부틴이 고대사 세미나 중 남긴 뼈 있는 말이다. 지금이라도 일제가 남긴 식민교육의 잔재를 청산하고 제대로 된 역사와 문화부터 회복해야 참다운 ‘광복(光復)’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문명의 회복이 중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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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큰사전> 전권




암흑 속 한 줄기 빛

시인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통해 일제 치하의 조국의 모습을 서정적이면서도 날카롭게 묘사함과 동시에 빼앗긴 조국을 향한 애정과 언젠가는 다시금 찾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함축해 놓았다. 그저 일제 치하의 암울한 상황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진정한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빼앗긴 땅을 되찾아야 한다는 의미를 깔아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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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이육사 시인의 모습(출처: 이육사문학관)

오른쪽) 만해 한용운 초상화(제공: 만해기념관)




우리가 잃었던 주권을 다시 찾고 자유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수많은 독립투사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름 없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많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수많은 이름들이 쌓아 올린 조국의 광복. 그리고 글로써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조국의 독립을 염원한 수많은 시인과 작가들. 조국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시를 쓰는 것조차 부끄럽다고 말하던 시인 윤동주와 일제 치하에서 강렬한 저항 의지를 시로 노래한 대표적인 저항시인 이육사.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던 이육사의 외침과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며 나라 잃은 설움과 그리움을 노래하며 빼앗긴 주권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보인 만해 한용운의 시는 칠흑과도 같은 암흑 속에 살아가던 우리 민족에게 한 줄기 빛과 같았을 것이다.


광복 77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우리는 빼앗긴 들에 다시 찾아온 봄을 맞이하고 있으며, 내 마음속에서 떠나보낸 적 없던 님을 다시금 마주하고 있다. 조국의 광복을 그토록 바라던 시인 이상화, 윤동주, 이육사, 한용운은 안타깝게도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그들을 향해 말해주고 싶다. 결코 쉽게 씌어진 시(詩)가 아니었기에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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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문학관에 있는 시비 <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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