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호 마루대문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그곳, 남도 여행을 떠나다

2022.12.30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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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그곳,

남도 여행을 떠나다 


글 이예진 사진 이지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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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2022년의 마지막 달이 되었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연말연시가 되면 지나가 버린 시간에 대한 후회와 앞으로 다가오는 시간에 대한 기대감이 생긴다. 이처럼 사람은 현재를 살면서도 과거에 대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꿈꾸는 가운데 이번 탐방은 새로운 세상을 바랐던 선인들의 숨결이 아직도 살아 숨 쉬는 남도로 향했다. 그중에서도 무등산(無等山)을 품고 함께 해온 전라남도 담양과 화순을 찾았다. 이곳을 거쳐 간 그들이 꿈꿨던 미래의 새로운 세상은 어떤 곳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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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입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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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고인돌유적지에 있는 핑매바위




오래전부터 문명을 꽃 피운 곳

호남지방은 예로부터 곡창 지대로 우리나라 제1의 쌀 생산지였다. 넓은 평야가 발달해 우리의 주식인 쌀농사 짓기에 알맞은 지형을 갖춘 이곳은 아주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바로 고인돌유적지다.


고인돌유적지에 대한 이해에 앞서 우리나라의 지형을 보면 동고서저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북쪽과 동쪽에 높은 산들이 있으며 서쪽과 남쪽은 낮은 산들과 평지들로 이뤄져 있다. 이는 오랜 침식으로 낮은 지형으로 발달됐다가 제3기중신세 이후 지반이 융기한 탓이다. 북쪽과 동쪽에 높은 산들이 모여 있는 덕분에 강의 줄기가 서쪽으로 흐르면서 호남지방에는 비옥한 충적평야가 이뤄졌다. 풍부한 물과 비옥한 땅은 사람들을 모으기 충분한 조건이었기에 오래전부터 사람이 터를 잡은 것은 당연했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부터 철기시대까지 있었던 거석문화(巨石文化)로 고대국가가 만들어지기 직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지역에 따라 고인돌을 부르는 명칭이 다른데 한국과 일본에서는 지석묘라고 부르며 중국에서는 석붕, 유럽 등에서는 돌멘(Dolmen) 등으로 불린다.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서는 거대한 돌을 채취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고인돌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은 예로부터 많은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는 증거가 되며 특히 집단을 통치하는 권력자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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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고인돌유적지에 있는 채석장. 고인돌 축조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특히 우리나라는 ‘고인돌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전 지역에 골고루 분포돼 있다. 그중에서도 인천 강화도와 전남 화순·고창은 고인돌의 밀집도가 높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보존·관리되고 있다. 넓은 평야가 아닌 강화도·화순·고창에 고인돌의 밀집도가 높은 이유는 고인돌을 만들 당시의 지형과 지금의 지형이 다르기 때문이다.


많은 노동력을 필요하는 고인돌 

집단 거주, 강력한 권력자 상징

강화도·화순·고창, 유네스코 등록



당시에는 해수면의 높이가 지금보다 높았으며 습지였던 평야지역은 개발되기 전이었기에 사람들이 사는데 적합하지 않았다. 이에 지금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 구릉지대는 물과 땔감을 구하기에 용이한 곳이었기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 적합했던 것이다.


화순 고인돌유적지는 효산리에서 대신리로 넘어가는 계곡에 약 500기의 고인돌이 10㎞ 정도에 걸쳐 분포해 있으며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 편에 속한다. 이에 유네스코는 좁은 지역 내에 고인돌이 집중 분포하고 있는 점과 덮개돌 무게가 100톤 이상 되는 커다란 고인돌이 수십 기 있으면서 200톤이 넘는 고인돌이 있는 점, 주변의 자연환경이 그대로 보존된 것과 채석장을 통해 고인돌 축조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점 등이 이곳의 세계적 가치로 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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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월산




화순 고인돌유적지에 있는 고인돌 중 ‘핑매바위’는 200톤이 넘는 세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한다. 길이 7m, 높이 4m인 핑매바위는 200톤이 넘는 덮개돌 아래 5개의 고임돌과 일정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핑매’라는 이름은 ‘돌을 주워 던진다’는 의미로 마고할매 전설, 장군바위 전설 등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마고할매 전설’은 마고할매가 치마폭에 돌을 싸 운주골로 가지고 가다가 치마폭이 터져서 그만 바위를 놓고 가버렸다는 내용이다. 특히 바위 위에 구멍이 있는데 이 구멍에 돌을 던져 들어가면 아들을 낳고, 들어가지 않으면 딸을 낳는다는 전설도 함께 내려오는데 ‘핑매바위’라는 이름은 여기서 전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핑매바위 위에는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돌들이 산란해 있다.


이처럼 국내에는 수많은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다. 강화도·화순·고창 외에도 분지 지역인 대구에도 많은 고인들이 있었으며 산기슭인 경북 청도, 강원도 춘천 등에서도 확인됐다. 이는 오래전부터 한반도는 사람들이 살기에 적합한 땅이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문화가 꽃피웠음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금수강산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는 이곳이지만 높은 산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광주광역시와 화순군, 담양군에 걸쳐 있는 무등산(無等山)은 1187m의 높이를 자랑하며 순창군과 담양군을 품고 있는 추월산은 전라남도 5대 명산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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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정상인 천왕봉. 현재 군부대가 있어 통제 지역으로 되어 있다.



가을의 보름달이 산에 닿을 만큼 드높다는 의미의 추월산은 기암괴석과 깎아지른 석벽을 자랑한다. 봄·여름·가을·겨울 4계절의 변화가 뚜렷하며 다양한 약초가 많아 예로부터 명산으로 불렸으며 ‘작은 내장산’이라는 별명이 있기도 하다.


높이는 731m로 크게 높지는 않으나 빽빽한 노송으로 길이 좁고 산능선이 꽤 구불구불해 산악인들의 발걸음을 모으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독수리 형상의 수리봉에서는 사방이 탁 트여 전망이 아주 좋아 담양호와 무등산을 볼 수 있다.


광주 ‘어머니의 산’ 무등산(無等山)

‘등급을 매길 수 없다’는 뜻 담겨

<반야심경>의 절대평등을 의미


1972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무등산은 2012년 국립공원으로 승격됐다. 북쪽으로 나주평야, 남쪽은 남령산지의 경계에 있어 산세가 웅장해 광주의 진산이다. 이에 광주시민들에게 무등산은 ‘어머니의 산’으로 여겨진다.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비롯해 전국에서도 찾는 무등산은 ‘견줄만한 상대가 없어 등급을 매기고 싶어도 매길 수 없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등급을 매길 수 없다는 ‘무등(無等)’은 <반야심경>에서 부처가 말하는 절대평등을 의미한다. 모든 것에 등급을 매겨 순위를 결정하는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이상향의 세계다.


무등산은 과거 ‘무진악’ 또는 ‘서석산’으로도 불렸다. 이는 토산과 석산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는 무등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무등산은 단순히 높이가 높은 것뿐만 아니라 용암이 식을 때 생기는 ‘주상절리’가 장관을 이룬다. 무등산의 주상절리는 약 7000만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대표적으로 서석대, 입석대, 규봉의 광석대가 있다.


해발 1000m가 넘는 곳에 100m 크기의 주상절리는 세계에서 찾기 어려운 특이한 사례이며 한국의 주상절리 중 최대 크기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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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의 작은 사찰인 규봉암 뒤로 광석대가 병풍처럼 웅장하게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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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서석대 인근에 있는 억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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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3대 주상절리 중 하나인 입석대



무등산 고개 중 하나인 장불재에 오르기 전 만날 수 있는 광석대는 사찰인 규봉암 뒤에 커다란 병풍같이 서 있으며 높이 30~40m, 최대 너비 7m를 자랑한다. 이러한 규모는 세계적으로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웅장함을 자랑한다. 정상부 인근에 있는 입석대와 서석대는 장불재에서 멋들어지게 만날 수 있다.


해발고도 950m에 있는 입석대는 너비 1~2m의 40여 개의 돌기둥이 120m에 걸쳐 우뚝 솟아있다. 입석대 상부에는 ‘승천암’이라는 기둥이 옆으로 기울어져 하늘로 솟아오르는 모양을 가진 독특한 형태를 만날 수 있다. 서석대는 해발고도 1100m 부근에 있다. 특히 저녁노을에 반사되면 수정처럼 반짝거려 ‘서석의 수정병풍’이라고도 전해진다. 과거 ‘서석산’이라고 불린 것도 서석대의 아름다움과 연관이 깊다.


이처럼 전라남도는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 곳곳에 많다. ‘어리석은 사람조차 이곳에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지리산을 비롯해 이번 탐방으로 만난 무등산과 추월산 역시 각각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삼천리 금수강산(錦繡江山)’이라는 표현이 전혀 아깝지 않은 절경 중의 절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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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의 제자 양산보가 낙향해 지은 담양 소쇄원




모두가 바라던 그 세계

이곳 전라남도 담양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벗 삼아 많은 문인들이 찾은 곳이다. 이는 이곳에서 발달한 가사 문학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가사 문학이란 시조(時調)와 더불어 한국 고시가의 대표적 장르다. 가사 문학의 특징은 시조나 한시처럼 어느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우리 고유의 민요적 율격 위에 내용을 담아 만들어졌다. 그래서 우리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시가 장르로 평가받기도 했다.


고려시대 말부터 형성된 가사 문학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향유됐는데 특히 담양에서는 조선 중기 이곳으로 낙향한 사림(士林)들에 의해 발전됐다. 대표적으로 이서

의 <낙지가>,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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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 담장 밑으로 흐르는 계곡. 이를 통해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느낄 수 있다.



이처럼 담양은 수많은 사림이 거쳐 간 곳이다. 사림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의리와 명분을 중요시했으며 성종 때부터 정계에 진출했는데 조선 초기 공신으로 이뤄진 훈구파와 대립하면서 사화를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지방에서 탄탄한 힘을 키우면서 훈구파와 끝까지 대립했으며 결국 조선 중기 선조 때부터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담양, 낙향한 사람이 거쳐간 곳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의 소쇄원

자연과 인공의 아름다운 조화



사림은 사화를 당했을 당시 지방으로 많이 내려갔는데 그곳 중 하나가 담양이다. 특히 지금도 잘 가꿔 많은 이들이 찾고 있는 ‘소쇄원(瀟灑園)’은 조광조의 제자 양산보가 낙향해 거주한 정원으로 자연과 인공의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루는 곳으로 손꼽힌다.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의 소쇄원은 명승 제40호로 지정돼 있다. 소쇄원 중 으뜸은 오곡문(五曲門) 담장 밑으로 흐르는 계곡이다. 담장이라면 벽돌을 쌓아 바깥과 안을 구분하는 장치임에도 자연인 계곡을 살리기 위해 담장 밑을 과감하게 뚫어놨다. 이 밑으로 흐르는 계곡은 제월당과 광풍각 앞으로 지나가며 은은한 운치를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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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이 과거 급제 전 머무르며 많은 학자들과 교류했던 환벽당




이렇게 자연과 벗 삼은 정자는 광주호의 상류 창계천을 중심으로 담양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환벽당 역시 창계천 인근에 있는 곳으로 정확하게는 광주광역시 북구에 위치해 있는데 을사사화 이후 김윤제가 고향에 내려와 지은 별당이다.


고향에 내려온 김윤제는 이곳에서 자연을 벗삼아 후학을 키웠는데 그중 한 명이 송강 정철이다. 송강 정철은 27살에 과거에 급하기 전까지 10여년을 이곳에서 머무르며 많은 학자들과 교류를 했다.


환벽당 인근에는 식영정, 면앙정, 송강정, 취가정 등이 함께 모여 있다. 전라남도기념물 제1호인 식영정은 환벽당, 송강정과 함께 정송강 유적으로 불린다.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의미를 가진 식영정은 송강이 <성산별곡>을 지은 곳이기도 하다. <성산별곡>은 “어떤 지날 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 서하당 식영정의 주인아 내 말들어 보소”라고 시작하며 가사에 ‘식영정’을 지은 김성원을 칭송한 내용이 담겨 있다.


송강 정철이 정계에 진출하기 전에 들린 곳이 환벽당과 식영정이라면 그가 정계 진출 후 동인으로부터 탄핵을 당하고 내려와 머물렀던 곳은 ‘송강정’이다. 송강정은 원래 ‘죽록정’이라는 이름이었으나 1770년 후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다시 세우면서 ‘송강정’이라 했다. 송강은 이곳에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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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이 동인으로부터 탄핵 당한 후 내려와 머물렀던 송강정. 이곳에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지었다.



이처럼 사림은 자연과 벗 삼아 자신들이 바라는 이상향의 세계를 꿈꿨다. 자신들이 바라는 세상을 위해 훈구파의 대립에도 멈추지 않고 후학을 양성했으며 자신의 길이 꺾였을 때도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고 미래를 그렸다. 이러한 끊임없는 노력이 결국 사림이 정계의 주류가 되는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결국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믿음, 가치관을 정립하면 그 미래의 세계를 그린다. 이는 화순의 운주사(雲住寺)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화순의 운주사는 특이

한 절 중 하나인데 사찰에 흔히 있는 천왕문, 사천왕상, 울타리나 문이 없다. 대신 수많은 석탑과 석불이 존재한다. 이에 ‘운주사 천불천탑’으로 유명하다. 그 가운데 운주사지 계곡 정상에 있는 와불(臥佛)이 가장 유명하다.


환벽당·송강정·식영정, 3대 정송강 유적지

운주사의 천불천탑, 많은 이의 염원 담겨

신앙, 신이 약속한 것을 믿고 따르는 것


‘운주사 와불’로 불리는 ‘운주사 와형석조여래불’은 높이 12.7m, 입상 높이 10.26m로 국내 있는 와불 중 가장 큰 규모의 석불이다. 석불 2구가 나란히 누워있는 운주사 와불은 운주사를 창건한 도선국사가 천불천탑을 세운 후 와불을 마지막으로 일으켜 세우려고 했으나 새벽닭이 울어 누워있는 형태로 두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렇다면 운주사에는 왜 수많은 석탑과 석불 그리고 와불이 있는 것일까. 먼저 종교는 신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종교 생활인 신앙생활은 신이 약속한 것을 믿고 그것이 이뤄졌을 때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신앙인은 신이 약속한 것이 이뤄지길 염원하며 기다린다. 그렇다면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불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는이 세상을 구원할 ‘누군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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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운주사에 있는 와형석조여래불(와불)




불교에서는 이를 ‘미륵불’이라고 하며 유교 경전에서는 ‘정도령’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성경>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진리의 성령이 함께하는 보혜사 ‘이긴자’를 가리킨다. 각자 말하는 명칭은 다르지만 의미하는 바는 같다. 세상을 구원할 구원자. 그가 오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운주사의 천불천탑은 새로운 세상을 구원할 이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다. 그 마음이 모이고 모여 천불천탑으로 그리고 와불로 드러났다. 즉 이를 만든 이는 어지러운 세상 속 와불이 일어서는 좋은 세상을 바란 것이다. 하지만 땅에 박혀 있는 돌은 절대 일어날 수 없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현재의 세상을 바라보면 말세라고 할 정도로 어지러운 때이다(末世之末). 모든 것이 부패하고 타락해 온전한 것이 없다. 곳곳에서는 전쟁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으며 안타까운 목숨이 스러져가고 나라를 이끌어간다는 지도자들은 자기 잇속을 채우기에 급급하다.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이 좋은 세상을 바랐음에도 ‘좋은 세상’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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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운주사에 있는 천불천탑 중 일부. 많은 이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



하지만 끝이 있다면 새것이 도래한다. 바로 ‘송구영신(送舊迎新)’이다. 부패하고 쇠하여진 시대를 청산하고 이것을 뒤집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시대를 이끄는 이를 우리는 찾아야 한다. 바로 모든 종교가 바란 그 ‘구원자’다.


모든 종교가 염원하는 ‘구원자’

오늘날, 송구영신(送舊迎新)의 때

이미 일어난 와불을 찾아야



우리는 이곳 광주와 전남 담양, 화순을 다니면서 과거 발자취를 남겼던 이들이 꿈꿨던 한 시대와 그 시대를 이끄는 ‘구원자’에 대해 다시금 생각했다. 문명이 꽃피웠던, 그리고 많은 문인들이 찾아와 자연과 벗하며 꿈꿨던 이상 세계. 우리 역시 바라는 송구영신 호시절(送舊迎新 好時節)을 해가 바뀌는 지금 생각해본다.


다만 알아야 할 것은 송구영신 호시절이 오기 전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으며 그곳에 온갖 귀신들이 몰려온다. 그러니 우리는 눈을 뜨고 준비를 해야 한다. 눈을 뜨지 않은 채 좋은 시절만 기다리고 있으면 알아보지 못한다. 땅에 묻힌 와불을 바라보며 와불이 일어나기만을 바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와불은 이미 일어났으며 우리 곁에 숨 쉬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새시대를 발견하고 나아가는 새로운 한 해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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