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호 마루대문 도심 속 숨어 있는 역사를 찾아서

2023.07.30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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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 숨어 있는 역사를 찾아서 


글·사진 백은영


우리가 딛고 서 있는 터는 그 어느 한 곳도 역사의 기억을 간직하지 않은 곳이 없다. 그저 대지 위에 건물들이 세워지고, 무너지고 다시 또 세워지면서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갈 뿐이다. 그렇게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길목 어딘가에는 이러한 역사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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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광화문광장으로 바뀐 육조거리는 조선시대 한양의 중심가로서 주요 정책들이 만들어지던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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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보신각 타종 행사 (출처: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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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월대 및 주변부 전경



세종로의 옛 이름 육조거리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상징하는 것 중 하나가 광화문이다. 이제는 여러 의미를 품고 있는 광화문 앞 광장은 국내외 관광객을 비롯해 인근 직장인들로 늘 분주한 곳이다.


광화문(光化門)은 법궁인 경복궁의 정문으로 이름에서처럼 ‘빛이 널리 비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건립 당시에는 정문(正門) 혹은 오문(午門)으로 불리다가 1425(세종 7)년 집현전 학자들에 의해 ‘광화문’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바로 이 광화문 남쪽 양편으로 조선시대 6개 중앙관청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육조거리’로 불렸다. 육조거리는 오늘날의 세종로로 광화문 앞에서 황토현(黃土峴, 현재 광화문사거리)까지 이르는 대로다. 1395년 정도전이 조선 태조 이성계의 명을 받고 한양으로 천도할 당시에 조성한 거리로, 경복궁의 남쪽 정문인 광화문 앞 좌우에 조선시대 최고 행정기구인 의정부를 비롯해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의 육조(六曺) 등 주요관아가 건설되면서 형성됐다. 광화문에서 볼 때 왼쪽에는 의정부, 이조, 호조, 한성부가 위치해 있었으며, 오른쪽에는 삼군부, 예조, 중추부, 병조, 형조, 공조가 있었다.


여기서 이조는 관리를 뽑거나 알맞은 부서로 배치하는 인사에 관한 일, 호조는 세금과 계산, 예조는 나라의 행사나 제사를 관장하고 과거시험을 진행했으며, 병조는 국방과 병사에 관한 일, 형조는 범죄와 법률에 관한 일, 공조는 토목 공사나 공업에 관한 일을 맡았다. 이들 각 조의 우두머리는 ‘판서’로 정2품 이상의 관리가 맡도록 했다.


육조거리는 임진왜란(1592년) 당시 경복궁과 함께 화재로 피해를 입은 뒤 19세기 말 흥선대원군 때 재건됐지만,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조선시대 관아(官衙)는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이후 2008년 9월 광화문광장 조성공사 현장에서 육조거리의 흔적이 발견돼 발굴 조사가 진행됐으며, 지난 2021년 5월 육조거리 문화재 유구를 언론에 공개했다. 올 3월에는 광화문 월대와 삼군부, 의정부 등 육조거리 발굴조사 성과를 시민들에게 공개하기도 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조선시대 육조거리의 모습을 축소해 놓은 모형을 전시하고 있으니 한 번쯤 들러 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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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1902년 육조대로 (제공: 서울시)




종로에서 역사 찾기

조선시대 한양의 상징거리였던 종로는 조선 건국 이래 도성의 중심지로 현재까지 발전해왔다. 조선시대에는 중앙관청과 관련된 관리들이나 시전행랑의 상인 등 중인의 거주지가 있었으며, 당시 시전(市廛)은 국가가 설치한 상설시장으로 주민들의 일상 생활용품과 정부에서 쓰는 물건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한마디로 종로는 조선시대 상업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말해주듯 서울 종각역에는 시전행랑(市廛行廊) 유적이 있다. 시전은 국가에서 점포를 건설해 상인들에게 임대하고 세금을 받는 관설시장으로, 조선 태종대(재위 1400~1418)에 종로와 남대문로를 따라 양쪽에 건물이 길게 늘어선 행랑을 조성하고 이곳에서 상업활동을 하게 했다. 시전 행랑 유적은 종각역 1번 출구 앞쪽으로 나오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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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1호선 종각역 1번 출구로 나와 조금만 걸으면 조선 태종대에

종로와 남대문로를 따라 형성된 시전행랑 유적과 시전이 설치돼 수

많은 점포가 들어서 ‘사람과 물화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운종가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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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도시유적전시관 내 일부 모습.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사용했던 골목길이 확인돼 이문안길과 전동 골목길을 직접 걸으면서 

조선시대에 와 있는 느낌을 체험할 수도 있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

지난 2015년 공평1·2·4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조선 한양에서 근대 경성에 이르는 역사도시 서울의 골목길과 건물터가 온전하게 발굴되자 서울시는 도시유적과 기억을 원래 위치에 전면적으로 보존하고자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을 조성해 2018년 9월 12일 개관했다.


2014~2015년에 걸쳐 실시된 발굴조사를 통해 조선 초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총 108개 동 건물지와 중로, 골목길 등의 유구와 1000여 점이 넘는 생활유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중 유구의 상태가 가장 온전히 남아있는 16~17세기 Ⅳ문화층 유구를 전시관 내부로 이전해 복원했다. 전동 큰집, 골목길 ‘ㅁ자’ 집, 이문안길 작은 집 등 3개 건물지가 핵심 콘텐츠로 각 건물지별로 1/10 축소 모형, 가상현실(VR체험), 출토된 유구 위에 1:1 복원 모형 등 다양한 전시기법을 통해 16~17세기 한양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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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시전(市廛)이 표시된 유일한 지도인 <수선총도(首善總圖)> 위에

관람객들이 건물 모형을 위치에 맞춰 올려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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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좌포도청터(최시형 순교터 및 단성사터). 오른쪽) 우포도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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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 포도대장의 모습



포도청터

지하철 1, 3, 5호선 종로3가역 9번 출구 단성사터에는 ‘좌포도청(左捕盜廳)터’ 표지석이, 광화문우체국 앞 화단에는 ‘우포도청(右捕盜廳)터’ 표지석이 자리 잡고 있다.


포도청(捕盜廳)은 조선시대 죄인의 심문과 도적의 포획 및 도적·화재 예방을 위해 순찰 등의 일을 맡았던 관서로 포청(捕廳)이라고도 한다. 좌포청(左捕廳)은 중부 정선방(貞善坊) 파자교(把子橋) 동북쪽(현재 서울 종로구 수은동 56번지 일대)에, 우포청(右捕廳)은 서부 서린방(瑞麟坊) 혜정교(惠政橋) 남쪽(현재 종로구 종로1가 89번지 일대)에 있었다. 포도청은 중종 무렵에 설치돼 1894(고종 31)년 갑오경장 때 좌·우포도청을 폐합해 경무청(警務廳)을 설치하기 전까지 350여 년 동안 존속했다.


우포도청의 경우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장소이기도 하다. 1879년 드게트 신부와 함께 체포돼 우포도청에 수감됐던 이병교 레오, 김덕빈 바오로, 이용헌 이시도로가 이곳에서 아사해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가 됐다.


보신각, 제야의 종은 왜 33번 울리는가

지하철 1호선 종각역 4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만날 수 있는 보신각은 유명하다. 매년 12월 31일이면 새해를 맞이하는 의미로 보신각종을 33번 치는 ‘제야의 종’ 타종행사가 열리기 때문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인 ‘옛 보신각 동종’은 대한민국 보물 제2호(1963년 1월 21일 지정)로 조선 세조 14(1468)년에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세조의 명으로 정릉사에 배치됐다가 이후 원각사로 옮겨졌지만, 원각사가 연산군에 의해 폐사가 된 후 중종은 원각사를 허물고 종은 숭례문으로 옮겨지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화재로 종루가 불타고 종도 크게 훼손돼 광해군 때 종을 복구해 사용했으나 고종 6(1869)년에 다시 한 번 화재로 크게 손상을 입게 된다.


이후 종을 다시 고치고 고종 32(1895)년에 종각을 새로 건설하면서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바로 이때부터 ‘보신각종’이라고 불렀다. 보신각을 중건한 1953년부터 제야의 종 타종이 연례행사로 진행됐으며, 종이 너무 오래돼 훼손이 우려됐기 때문에 1985년 국민들의 성금으로 만들어진 새 보신각종이 현재 보신각에 걸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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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각. 서울보신각종을 걸어 놓기 위해 만든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이다.




여기서 잠깐, 한양 천도 당시부터 종로1가에는 도성의 8개 문을 여닫게 하는 종의 누각이 세워져 있어 이곳을 종로(鐘路) 혹은 종루(鐘樓)로 불렀다고 한다. 또한 ‘제야의 종’ 타종행사 때 보신각종을 33번 치는 이유는 오경(새벽 4시)에 사대문(숭례문, 숙정문, 흥인지문, 돈의문)과 사소문(흥화문, 광희문, 소덕문, 창의문)이 열리는 것을 알리기 위해 종각(보신각)이 33번 타종한 것에서 유래했다. 오경에 종을 치는 것을 파루(罷漏)라고 하는데 이는 불교의 수호신인 제석천이 이끄는 하늘

의 삼심삼천에게 나라의 태평과 국민의 무병장수, 평안을 기원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참고로 보신각 왼쪽으로는 ‘3·1독립운동기념터:보신각 앞’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1919년 3·1 독립만세 시위의 중심지이자 4·23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한성정부를 선포한 곳임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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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기념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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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비 있던 곳


척화비 있던 곳

종각역 4번 출구에 위치한 보신각은 잘 알고 있지만 보신각 정면 앞쪽 길가에 있는 ‘척화비 있던 곳’이라는 표지석은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이곳 표지석에는 ‘19세기 후반 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서양인의 조선침투를 방어 격퇴시켰다는 의미로 전국 주요 지역에 세웠는바 그중의 한 척화비가 있었던 곳’이라고 적혀있다.


척화비는 조선 고종 때 문호 개방에 부정적이었던 흥선대원군이 ‘서양과 양인과의 교류 및 접촉을 배제하고 서양의 침범에 대비해 싸우지 아니함은 나라를 파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세웠던 석비(石碑)다.


척화비는 신미양요가 일어났던 1871년 처음 건립됐으며, 신미양요 이후 한양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 널리 세워졌다. 그러다가 흥선대원군이 1882년 청나라로 납치돼 정치에서 실각한 이후 철거되거나 매장됐으며, 광복 이후에도 삼전도비와 마찬가지로 부끄러운 역사의 증거라는 이유로 종종 척화비를 훼손하는 일이 벌어졌다. 척화비는 대부분 똑같은 것을 여러 기 만들어 세웠으며 상당수는 통상수교 거부정책(쇄국정책)이 끝난 뒤 폐기처분되거나 방치, 훼손됐으나 워낙 많이 만들어져 지금도 전국 각지에 여러 기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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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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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종각역 5번 출구와 6번 출구 사이에는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던 녹두장군 전봉준의 동상이 서 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한 번쯤은 들어왔을 이 전래민요는 조선 말,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했던 녹두장군 전봉준에 관한 것으로 전봉준은 어려서부터 몸집이 작아 ‘녹두’라고 불렸다고 한

다. 여기서 녹두꽃은 전봉준, 파랑새는 일본군, 청포장수는 조선의 백성들을 상징한다. 1894년 동학농민군은 부패한 벼슬아치를 몰아내고 폐정을 바로잡기 위해 전봉준 장군을 필두로 봉기했지만, 우금치에서 농민군관 관군·일본군 사이에 우금치전투가 벌어져 농민군이 패배함으로써 결국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이때 녹두장군 전봉준도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당하게 된다. 이 동상은 순국 123년을 기념해 2018년 4월 24일 전봉준이 서울로 압송돼 처형됐던 장소인 전옥서가 있던 자리(종로구 서린동 영풍문고 앞)에 세워졌다. 


한편 전봉준 동상 바로 앞에는 전봉준을 비롯해 천주교 신자들이 형조로 이송돼 심문을 받고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수감됐던 전옥서가 있던 터인 ‘한국 천주교 순교터이자 신앙 증거터’ 표지석과 1898년 남궁억 등이 창간한 국한문 혼용의 애국계몽 일간지 ‘황성신문터’ 표지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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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옥서터




조선시대 수자원, 우물

종각역 1번 출구로 나와 광화문 쪽으로 가다보면 조선시대 청진8지구 우물을 재현한 것을 만날 수 있다. 청진8지구 우물은 사람들의 통행이 잦은 피맛길과 피맛2길이 만나는 곳에서 발견됐으며, 축조방식과 재료가 우수하고 특히 남측에 배수로의 보강을 위해 2단 이상의 판재를 사용해 구축한 것이 특징이다.


세종은 1426(세종 8)년 한양의 각 관청에 우물을 두 개씩 파서 물을 저장하라는 명을 내려 국가에서 만든 행랑과 인근의 화재에 대비토록 했다. 또한 나라의 우물이었던 청진8지구 우물은 도성민의 식수확보에도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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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송 중인 전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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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수자원 우물 청진8지구 우물을 재현했다.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4번 출구 혹은 종각역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직진하다 보면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가 나온다. 1902(광무 6)년에 세워진 이 비에는 고종(조선 제26대, 재위 1863~1907)이 즉위한 지 40년이 된 것과 51세가 되어 기로소(耆老所, 조선시대 70세가 넘은 정이품 이상의 문관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 들어간 것,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 칭호를 쓰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고 쓰여 있다.


비를 보호하는 작은 비각에 ‘기념비전(記念碑殿)’이라는 현판을 달아 격을 높였다. 전통적으로 건물은 그 권위에 따라 ‘전-당-합-각-재-헌-루-정’ 순으로 분류되는 것을 볼 때에 기념비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비각은 2중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서 있는 정자(亭子)형 건물로 20세기 초 전통적 건축 양식이 사라지기 직전에 세워진 것 중 가장 아름답다고 손꼽힌다. 건물 남쪽에는 돌기둥 위에 ‘만세문(萬歲門)’이라고 새긴 무지개 모양 문이 있다.


1954년에 비각을 보수하면서 일본인에게 팔렸던 돌로 된 만세문과 담장을 찾아다 일부를 복원했으며, 1979년에 전면적으로 다시 고쳐 옛 면모를 되찾았다. 1967년경 광화문 지하보도 건설과 종로 확장공사로 인해 원래의 위치에서 북동쪽으로 약간 이전했으나, 설치 당시에는 정궁인 경복궁 근처에 설치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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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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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도>에는 궁동산 끝자락에 연희궁(붉은 원)이 표시돼 있다.


 

연희궁터

신촌역 2, 3번 출구 연세대학교 정문 안 교내 오른쪽 큰 길가에는 ‘연희궁터·서잠실터’ 표지석이 있다. 연희궁은 조선 초기에 지은 이궁(離宮) 중 하나로 1420년 세종이 부왕인 태종을 위해 고쳐지었으며, 세종 역시 1426년에 이곳에 잠시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은 이 궁에서 국립양잠소 격인 잠실도회(蠶室都會)를 설치했으며 이후 이곳을 서잠실(西蠶室)이라고 했다. 연희궁은 조선 제2대 정종이 2년의 재위 후 왕위를 동생인 방원에게 물려주고 잠시 머물렀던 곳으로 이후 제4대 세종이 이행한 적이 있다. 연산군 11(1505)년에는 창의궁 밖에 탕춘대를 쌓고 서교에 연희궁을 짓고 이를 유희소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는 중의 지위를 잃었던 것으로 보이며, 곧 폐궁되어 흔적이 사라지게 됐다.


이외에도 서울 도심 속에는 ▲순화궁터(조선조 헌종의 후궁 경빈김씨(김재청의 딸) 사당인 순화궁이 있던 자리) ▲충훈부터(국가에 공훈이 있는 공신들에게 상을 내리고 공적을 보존하는 일을 맡아보던 조선시대 관아) ▲김종서 집터(조선조 단종 때 좌의정 절재 김종서의 집터) ▲민영환 집터(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이에 격분해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 집터, 조계사 경내) ▲전관원터(조선시대 일반 길손이 머물 수 있던 서울 근교 네 숙소 중 한 곳, 행당중학교 교문 앞) ▲혜정교터(청계천 지류인 중학천에 있던 다리로 과거 탐관오리를 처형하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등 수많은 역사의 흔적들이 녹아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어제의 내가 있기에 오늘의 내가 있고, 또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를 만드는 것처럼 우리는 수백, 수천 년의 역사 위에 새로운 오늘을 써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를 내일의 후손들이 기억해주기를 바라듯 우리 또한 선조들의 ‘오늘’이었던 그날의 역사 속으로 한번쯤 들어가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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