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호 마루대문 역사를 품고 낙동강은 흐른다

2023.09.29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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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품고

낙동강은 흐른다 


글 이예진 사진 이예진, 김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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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를 관통하는 낙동강은 남한에서 가장 긴 강이다. 강원도 태백에서 발원해 경상남도 김해까지 이어지는 이 낙동강은 수천 년의 시간을 흐르며 어느 시대에는 농업의 용도로, 어느 시대에는 상업의 용도로, 이제는 관광의 용도로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오랜 시간 우리 곁에서 역사를 함께한 낙동강의 세계로 이번 탐방을 떠났다. 다만 아직까지 우리에게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고대의 세계를 품은 청도와 그 일대다.


청도로 향하기 전 경북 영주에 잠시 들려보자. 이곳에는 신기한 바위상이 하나 있다. 바로 영주시 평은면 왕유동에 있는 ‘강동리 마애보살입상’이다. 이곳을 가면 이 바위에 대해 적힌 표지판에는 불교유적으로 적혀 있지만 이 바위상을 단순히 고려시대 불교유적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구석들이 있다. 이에 대해 이번 탐방에서 낱낱이 알아보기로 한다.


청도 비슬산 천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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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범곡리지석묘군


이서국을 아시나요

한반도의 역사는 고조선에서 시작된다. 물론 그전에도 한반도에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은 있지만 국가가 세워지고 문명이라는 것이 꽃피운 때는 고조선부터다. 하지만 고조선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한강 이남 지역은 여러 부족국가가 세워졌으며 꽤 오랜시간 번성했다. 이는 청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과 공기가 좋은 청도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청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명확하게 나오는 것은 없으나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 증거가 바로 청도 곳곳에 있는 고인돌(지석묘)이다. 청도 범곡리지석묘군을 비롯해 곳곳에 있는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이는 이서국과도 연관이 된다.


아무래도 낙동강 묘역과 인근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청도의 지형은 과거 수렵과 채집을 중심으로 했던 선사시대 사람들이 살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특히 청도를 관통하는 청도천 중심으로 지석묘군이 모여 있는데 그 가운데 범곡리지석묘군은 청도에 있는 지석묘군 중 가장 많이 밀집돼 있다. 80m 간격을 두고 동쪽으로 22기, 서쪽으로 12기의 지석묘가 남동~북서 방향으로 위치해 있는데 더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개간으로 인해 파괴됐다고 전해진다. 대형 지석묘는 없으나 많은 지석묘가 밀집된 것으로 보아 큰 취락지가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금오촌은 지금 청도 땅이며 청도는 즉 옛 이서군이다.”

- <삼국유사(三國遺事)> - 


그만큼 오래전부터 청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끝내 큰 국가를 이루지는 못했으나 이서국(伊西國)이라는 작은 나라도 있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삼한(三韓)시대에 있던 변진 계통의 부족국가 78개국 가운데 ‘이서국’이 있었다고 한다. 이서국은 지금의 청도군 이서면과 화양읍 일대에 있었다. 하지만 멸망에 대해서는 시기가 다르게 적혀 있는데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의 14대 왕인 유례이사금(유례왕) 14(297)년에 이서국이 금성을쳤다고 되어 있지만 <삼국유사>에서는 신라의 3대왕 유리이사금(유리왕) 14(39)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서국이 먼저 신라의 금성을 침공했고 신라가 위협당하고 있을 때 홀연히 대나무 잎을 꽂은 이병(異兵)이 나타나 신라를 도왔다고 한다. 그래서 신라 사람들은 유례왕의 선왕인 미추왕의 왕릉에 대나무 잎이 있는 것을 보고 미추왕이 도와준 것이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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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면사무소 앞 이서고국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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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발원지인 강원도 태백의 황지연못. 낙동강권역에 속하는 청도천은 청도 가운데를 관통한다.



두 기록의 연도 차이가 나지만 분명한 것은 이서국은 신라 금성을 침공할 만큼 규모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이서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아직까지도 국내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이전의 한반도 역사에 대해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적다. 남겨진 자료가 적기에 땅에서 나오는 유물로 파악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기, 명확하게 밝혀내지 못했기 때문인 것일까. 


흥미로운 부분이 매우 많다. 예를 들면 인근 경주나 합천, 김해 등에서 튀르키예 이스탄불제의 유리잔(로만글라스)이나 이스라엘제 유리잔 등이 출토된 점이다. 또 최근에는 함안의 옛 무덤에서도 로만글라스가 발견됐다. 이는 결국 고대 한반도에서도 지금과 같이 서역과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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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리 구슬
아래) 함안 말이산 고분군에서 발견된 유리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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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풍각면 성곡저수지



이러한 증거는 청도에서도 나타난다. 청도 풍각면에 있는 성곡저수지는 성곡댐을 건설하면서 생긴 저수지다. 저수지를 만들기 위해 동네 일부를 수장하기 전 2008~2009년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이 발굴조사에서 수많은 과거의 흔적을 찾았다. 신라시대 석곽묘(石槨墓)나 석곽옹관묘(石槨甕棺墓) 852기를 비롯해 목탄묘(숯가마) 1기, 집터 10곳 등 총 940기에 이르는 각종 유적이 발견됐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서국은 어떻게 신라와 비등하게 싸울 정도로 큰 세력을 갖고 있었을까. 그 답은 청도의 이름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맑은 길 ‘淸道’

청도를 먼저 떠올리면 푸르른 숲이 우거지고 맛있는 과실들이 탐스럽게 열리는 고장이다. 그래서 청도 반시, 복숭아 등 과일나무를 많이 만날 수 있다. ‘청도’라는 지명은 고려시대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 이름은 아무래도 청도의 지형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다들 ‘청도’라고 하면 ‘靑(푸를 청)’을 떠올리기 쉬우나 ‘淸(맑을 청)’을 사용한다. 그럼 청도는 ‘맑다’라는 것인데 무엇이 맑다는 것일까.


바로 청도를 관통하는 청도천이다. 과거 하천은 단순한 물줄기가 아닌 식수이자 농업에 필요한 도구였으며 세상과 연결되는 통로였다. 이는 인근 김해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낙동강의 마지막 종착지인 김해(金海)는 과거 국제 교역의 통로였다. 


단적인 사례로 금관가야(가락국)의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설화를 예로 들 수 있다. 단군왕검 신화를통해서도 알 수 있듯 신화나 설화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반영

한다. 이에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설화를 단순히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설화가 적힌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허황후가 된 허황옥(許黃玉)의 본 고향은 아유타국이다. 아유타국은 지금의 인도가 있는 곳으로 아유타국의 공주였던 허황옥은 부왕(父王)과 왕후의 꿈에 상제(上帝, 하나님)가 나타나 공주를 가락국 수로왕에게 시집을 보내라고 했다 한다. 이에 가락국(금관가야)의 초대 황후가 되었으며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됐다.


조금은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 있으나 지금 김해에 있는 김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을 가면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수로왕비릉에 가면 커다란 봉분 앞에 파사석탑이 있다. <삼국유사>에서 이르기를 허황옥이 인도에서 건너올 때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싣고 왔다. 원래 호계사에 있던 것을 옮겨 온 것인데 현재 6층을 이루고 있다. 네모난 석재에는 옅은 무늬가 있는데 한반도에서 나는 돌이 아니라고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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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비릉 앞 파사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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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읍성에서 바라본 비슬산 전경



또 김수로왕릉에 가면 납릉정문(納陵正門)에 쌍어문이 그려져 있다. 쌍어문은 이름 그대로 한 쌍의 물고기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물고기와 함께 파사석탑, 코끼리 문양이 그려져 있어 인도와의 교류를 나타내는 근거가 되고 있다.


이처럼 큰 국가가 성립되기 전에도 한반도에서는 해상을 통한 외부 교류가 적극적으로 이뤄졌다. 김해 양동리와 대성동의 고분군 등에서도 보면 유리 구슬이 다량 출토되면서 이를 반증해주고 있다. 결국 한반도는 육로를 통한 교류 즉 중국과의 교류도 활발했지만 바다를 통한 해양 교류도 적극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한반도로 왔던 먼 타국의 사람들은 김해에만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이전의 나라인 사로국, 청도에 있던 이서국에도 다녀갔다. 김해의 낙동강을 통해 지금의 청도까지 흘러온 이들은 어느 날부터 이서국에 자리를 잡았으며 이들이 바로 디아스포라로 불리는 유대인들이었다. 사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이서국(伊西國)’은 서쪽의 나라라는 뜻을 담고 있다. 누군가는 당시 큰 나라였던 서라벌(후에 신라, 지금의 경주)의 서쪽 나라라는 뜻이라고도 하지만 바다를 건너 저 서쪽에서 온 이들이 모여 있는 나라라는 뜻도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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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왕릉 납릉정문(納陵正門)에 그려져 있는 쌍어문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에 의해 점령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자신의 나라가 아닌 세계 곳곳으로 떠났고 그중 한 곳이 한반도였던 것이다. 그 가운데 예수님의 12제자 중 하나인 도마도 한반도에 왔다. 한반도의 끝자락인 김해에 왔던 도마는 석공의 기술을 갖고 있었고 그의 석공 실력은 청도에까지 전해졌다.


한반도에 예수님의 제자가 오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바로 앞서 제기했던 영주 강동리 마애보살입상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성경> 사도행전 1장 8절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나온다. 바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계 곳곳을 다니며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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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왕릉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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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도마상이라고 불리는 영주 강동리 마애보살입상



그 가운데 도마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예수님의 12제자 중 도마는 가장 의심이 많은 인물로 여겨진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않고도 믿을 때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손발에 난 못자국을 확인했다. 그래서 도마를 향해 의심이 많다 할 수도 있으나 그는 확실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예수님의 못자국을 확인한 도마는 곧장 예수님을 향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요 20:28)”라고 고백한다.


그렇게 불변의 믿음을 얻은 도마는 이스라엘의 동쪽 인도로 향했고 인도에 이어 바닷길을 통해 한반도에 닿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영주 강동리 마애보살입상이다. 아직도 불상으로 알려져 있는 이 마애보살입상은 기독교계에서는 일명 ‘도마상’으로 불린다. 불상으로 보기에는 어딘가 다른 점들이 많기 때문이다.


처음 이 바위상을 발견한 때는 1987년이다. 영등포여고에 재직 중이던 한 교사가 발견했다. 그는 신앙심 깊은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 이 바위를 찾을 것을 알렸다고 한다. 이에 영주까지 내려온 그는 도마상을 발견했다.


현재는 얼굴이 없는 석상인 도마상은 불상이라고 보기 힘든 점들이 여러 개 있다. 먼저 석상 왼쪽 어깨 옆에 ‘도마’를 의미하는 히브리어가 새겨져 있으며 석상의 손 역시 일반적인 불상의 손과 다르다. 보통 불상의 석상은 엄지와 중지를 맞붙여 한 손은 위로 한 손은 아래로 하는 ‘아미타 구품인’이나 양손을 편 상태로 한 손은 아래에 한 손은 배에 위치하는 ‘항마촉지인’ 등의 모양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영주 석상의 경우 왼손의 끝은 손등을 보이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바깥을 보이고 있다. 이는 불상에서는 보기 힘든 손 모양이다.


또 석상 아래에 새겨진 ‘야소화왕인도자(耶蘇花王引導者)’를 볼 수 있는데 ‘야소’라는 것은 ‘예수’, ‘인도자’는 ‘전도자’를 의미한다. 사실 ‘야소화왕인도자’는 눈으로 확실하게 확인할 수 없으나 그 왼편으로는 비교적 선명한 ‘지전행(地全行)’이라는 글자를 볼 수 있다. ‘지전행’은 땅 끝까지 전하는 도마의 행적을 알 수 있다. 또 발에 있는 신발 역시 중동지역에서 신었을 것 같은 샌들을 신은 모습을 볼 수 있어 일반적인 불상과 명확하게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 한반도에 기독교가 언제부터 있었는지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가질 수 있다. 보통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이스라엘에서 시작해 유럽, 중국을 거쳐 조선시대 서학으로 전래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영주의 도마상을 통해 아주 오래전 한반도에는 바다를 통해 직접적인 기독교가 전해졌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결국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뜻을 받은 12제자들은 목숨을 다해 세계 곳곳에 다녔던 것이다.


*다음호에 탐방기획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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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흐릿하지만 히브리어로 적힌 도마

아래) 도마상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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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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