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호 마루대문 100년 만에 다시 열린 왕의 길, 새로운 광화문을 만나다

2023.11.15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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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만에 다시 열린 왕의 길,

새로운 광화문을 만나다 


이예진 사진 박준성 사진제공 문화재청



‘빛을 널리 비춘다’는 의미가 담긴 광화문(光化門). 서울의 중심을 지키고 있는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필수로 다녀가는 장소다. 그런 광화문이 조금은 또 새롭게 지난달 국민들을 찾아갔다. 광화문의 현판과 월대가 100년 만에 복원됐기 때문이다. 화려하게 돌아온 광화문은 일제에 의해 훼손됐던 모습을 벗어버리고 이제 온전히 완성된 모습으로 웅장하게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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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5일 서울 광화문 앞 광장에서 열리는 월대(越臺, 月臺·건물 앞에 넓게 설치한 대)와 현판 복원 기념식에 앞서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광화문 월대와 경복궁을 바라보고 있다. 문화재청은 일제강점기 때 훼손된 서울 광화문 앞 월대 복원 작업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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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광화문 월대(출처: 도서출판 서문당)



“임금이 백성과 직접 소통하는 자리”

광화문은 경복궁이 창건될 당시 함께 만들어졌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함께 소실됐지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광화문도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경복궁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자리를 잡게 되고 광화문은 건춘문의 북쪽으로 이전됐다. 이후 6·25전쟁으로 문루가 소실되면서 아픈 역사와 함께 경복궁과 광화문은 수난을 겪어야 했다. 그런 가운데 1990년대 들어서 경복궁 복원 사업이 진행됐고 현재의 모습으로 점차 바뀌었다.


그러면서 이번에 공개된 월대(月臺)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당시 경복궁의 격을 높이기 위해 만든 것이다. 각종 의식을 행하거나 건물의 위엄과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월대는 궁궐의 정전과 같이 중요 건물에 넓게 설치한 것으로 궁궐 정문에 난간석을 두르고 기단을 쌓은 경우는 광화문 월대가 유일하다.


1865년 4월 1일부터 1868년 7월 4일까지 3년 3개월의 공사를 기록한 <경복궁 영건일기>에 따르면 “1866년 3월 3일 광화문 앞에 월대를 쌓았다. 모군(인부)이 궁 안에 쌓아둔 잡토를 지고 왔는데 실로 4만여 짐에 이르렀다(光化門前築月臺 以募軍負宮內所積雜土而實之至四萬餘負)”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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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영건일기>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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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월대 유적 전경



광화문 월대는 동서 외곽에 잘 다듬어진 장대석(길이 120~270㎝, 너비 30~50㎝, 두께 20~40㎝)을 이용해 2단의 기단을 쌓고 그 내부는 서로 다른 성질의 흙을 교차로 쌓아 주변보다 높게 대를 만들었다. 남쪽에는 장대석을 이용해 계단을 조성했는데 어도와 연결되는 중앙부는 소맷돌(계단의 좌우측 양단을 장식하거나 마감하기 위해 높이는 경사 부재)을 이동하여 동서 계단과 분리했다. 특히 어도계단지의 경우 일제강점기 전차선로에 의해 일부 훼손됐으나 소맷돌을 받쳤던 지대석(계단 면적 또는 소맷돌을 놓기 위해 지면에 놓이는 받침돌)이 확인돼 월대의 원형을 복원하는 중요한 단서가 됐다.


또 광화문 월대는 축조 이후 4단계의 변화과정이 있었다. 1단계에서는 월대 축조 당시 남쪽에 경계가 나누어진 3개의계단이 존재했으며 당시 월대의 평면 형태는 역절차형태였다. 2단계에서는 중앙의 어도계단지가 경사로로 변화됐으며 3단계에서는 경사로의 범위가 확장되면서 계단이 동서 외곽으로 축소 변형됐다. 이 시기에 단선(외줄) 형태의 전차선로가 설치됐다. 4단계에서는 전차선로의 복선(겹줄)화가 진행되면서 월대가 파괴됐고 난간석 등도 철거되고 광화문도 옮겨지면서 도로로 사용됐다.


한편 광화문 월대 조사를 통해 기단석 하부에 여러 매의 지대석을 놓고 적색 점토로 보강한 기초 시설, 철편과 점토, 석회를 이용한 장대석 사이의 수평 맞춤, 장대석의 밀림 방지를 위해 점토와 깬 돌을 섞어 보강한 뒷채움 방식 등을 통해 당시 조선시대의 건축기법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광화문 월대 복원 과정에서 일제가 철거한 월대의 난간석을 구리시 동구릉에서 발견했으며 지난 8월에는 시민 제보에 의해 호암미술관 야외에 있던 서수상(瑞獸像: 상상 속 상서로운 동물상) 1쌍이 월대의 어도 앞에 있던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이에 고(故) 이건희 삼성회장 유족은 문화재청에 서수상을 기증했다.


기증된 광화문 월대의 서수상 1쌍은 뿔 1개에 목에는 갈기털이 있는 모습으로 너비 57㎝, 길이 198㎝, 높이 60㎝이다. 제자리로 찾아간 서수상은 복원된 월대를 찾은 국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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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대 유적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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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된 서수상



이런 수난을 겪었던 월대를 100년 만에 복원하면서 가진 지난달 15일 기념식에서 최응천 문화재청장은 “여러 역사 기록에 의하면 광화문 월대를 비롯한 궁궐의 월대들은 임금이 백성과 직접 소통하는 공간이었다”며 “오늘 첫 선을 보인 광화문 월대가 이러한 역사적 가치를 전승해 앞으로도 우리 국민들과 세계인,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소통하는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한다”고 전했다.


복원에 복원을 거듭한 현판

본래는 흰 바탕의 검은 글씨로 있던 광화문의 현판은 검은 바탕의 금빛 글씨로 새롭게 탈바꿈했다. 사실 이 현판은 오랜시간 논란과 여러 번의 복원 끝에 제작됐다. 광화문 현판은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한글로 ‘광화문’을 쓴 뒤 2010년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한자 ‘光化門’이 적힌 현판으로 교체를 했다. 하지만 교체하고 공개 3개월 만에 현판에 균열이 생기면서 부실 복원 논란이 생겼고 문화재청은 그 해에 재제작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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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상의 받침대 유구 사진(서수상 위치 표시, 파란색 원)



재제작 계획을 발표한 지 13년 만에 공개된 이번 광화문 현판은 경복궁 중건 당시 글씨를 썼던 훈련대장 임태영의 해서체 그대로 복원됐다. 사실 광화문 현판을 이전처럼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제작하려고 했으나 이번에 공개된 것과 같이 검은 바탕에 금빛 글씨로 교체된 것은 지난 2018년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의 소장 사진(1893년경), <경복궁 영건일기>등의 자료와 과학적인 분석 연구로 확실한 검증이 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결정으로도 재제작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광화문 현판 글자 마감 재료인 동판을 제작하기 위해 석달에 걸쳐 시범 제작을 진행했다. 현판 동판을 제작해 본 경험이 있는 장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두석장(국가무형문화재 제64호, 가구에 덧대는 금속 장식을 만드는 장인) 보유자 박문열씨와 문화재수리기능자 박갑용(도금공)씨가 함께 제작하면서 동판으로 글자를 실제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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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현판(출처: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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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5일에 공개된 새로운 광화문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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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5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광화문 월대 및 현판 복원 기념식에서 광화문 월대 앞 해치상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새롭게 공개된 광화문 현판에 대해 최 문화재청장은 “오랜 시간 광화문 현판은 흰 바탕에 검은 글씨였다”며 “그런데 새로운 기록과 거듭된 연구 끝에 검은 바탕에 금색 글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지난한 과정을 거쳐 복원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월대를 걸으며 광화문을 바라보며 본 모습을 찾은 현판을 꼭 바라봐 달라”며 “그리고 한 번 훼손된 문화유산이 본 모습을 찾기까지 얼마나 오랜 노력과 시간이 걸리는지도 생각해 주면 감사하겠다”고 덧붙였다.


훼손의 상징에서 역사·문화의 중심으로

경복궁을 비롯해 광화문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며 훼손돼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 박정희 대통령 시기부터 복원이 진행됐다. 일제에 의해서 옮겨졌던 광화문은 1968년 제자리를 되찾았지만 다만 목조건물이던 누각은 철제 콘크리트로 덮여버렸다. 당시 철제 콘크리트는 산업화와 경제 성장의 상징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경복궁 복원은 1980년대부터 논의됐다. 정부는 1984년 경복궁을 포함한 5대 궁 복원에 대한 내용을 발표했고 김영삼 정부는 1991년 ‘경복궁 본원 기공식’을 진행하면서 경복궁 복원 공사는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현재까지 경복궁 2차 복원 정비 사업을 진행 중이다. 1차 복원 정비 사업은 1990년부터 2010년까지 진행됐다. 1990년 당시 경복궁 내의 남은 전각은 36동이었다. 고종 때 있었던 전각의 7% 수준으로 사실 빈 벌판이 더 많았다. 이에 1차 복원 정비 사업은 총 5단계에 걸쳐 진행됐는데 1단계 1990~1995년에는 왕의 침실인 강녕전과 왕비의 침실인 침전 권역을 복원했다. 이어 2단계 1995~1999년에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자선당 및 동궁 권역을 복원했다.


이후 3단계 1996~2001년에는 흥례문, 영제교 등을 복원했다. 그리고 그 사이 4단계가 진행됐는데 1997년부터 시작된 태원전과 그 주변 행각은 2005년에 마무리됐다. 1차 복원 정비 사업의 마무리는 광화문의 복원이었다. 2001년부터 2010년까지 진행된 5단계 사업은 기존 광화문을 2006년에 다시 철거됐으며 철제 콘크리트가 발려졌던 광화문은 조선시대 원형대로 나무로 문루를 지었다. 또 박정희 대통령이 적었던 광화문 현판을 한자로 바꿨으며 틀어졌던 축대도 원래의 자리를 되찾았다. 다만 현판이 공개 3개월만에 갈라지면서 논란을 낳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2차 복원 정비 사업은 총 5단계에 걸쳐 2045년에 마무리될 예정이다. 2011년부터 2021년까지 진행된 1단계에서는 궁중 생활 권역을 복원했다. 소주방 및 흥복전 영역의 건물 28동을 복원했다. 현재는 2단계가 진행되고 있는데 동궁 및 오위도총부 영역의 건물을 복원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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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5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광화문 월대 및 현판 복원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이번 행사는 광화문 제모습 찾기를 시작으로 그동안 추진된 월대와 현판 복원이 마무리됐음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기념하기 위해 ‘광화문 월대 새길맞이’라는 슬로건으로 마련됐다.




이처럼 지속해서 진행되고 있는 경복궁 복원 정비 사업으로 경복궁은 고종 중건 당시전각 500여 동의 25% 이상 수준으로 제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2차 복원 사업을 통해 80동을 복원할 예정인데 원래 254동을 복원하고자 했으나 관람객 불편 최소화 등의 이유로 사업 규모를 줄였다.


이렇게 제모습을 찾아가는 경복궁은 매년 10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찾고 있다. 한국을 찾는 해외 관광객들의 필수 관광 코스가 되고 있다. 또 지난해 광화문광장이 새롭게 개방되면서 많은 시민들이 방문하는 곳이 되고 있다. 게다가 이번에 ‘월대’와 ‘현판’이 새롭게 선보이면서 많은 이들의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으며 특히 월대 앞 해치상에 대한 관심도도 높아지고 있어 더 많은 발걸음이 다녀갈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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