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호 마루대문 스크린에 되살아난 그날들

2일 전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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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에 되살아난 그날들 


글 백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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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가에 다큐멘터리 바람이 불고 있다. 그중에서도 정치와 역사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잇달아 개봉하면서 많은 이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극장가에 다큐멘터리 바람을 몰고 온 영화로는 작년 11월 개봉한 영화 <서울의 봄(감독 김성수)>을 들 수 있다. 픽션이 가미되긴 했지만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라는 점,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충분히 전달됐다는 점에서 영화 <서울의 봄>은 성공한 역사 영화, 다큐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서울의 봄>은 누적 관객 수 1300만 명을 넘기면서 역대 9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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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포스터



영화, 역사를 말하다

영화 <서울의 봄>을 필두로 지난 1월에는 영화 <길 위에 김대중(감독 민환기)>, 2월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건국 1세대들의 희생과 투쟁을 조명한 작품 <건국전쟁(감독 김덕영)>, 3월에는 <다시 김대중-함께 합시다(감독 김진홍)> 등 역대 대통령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개봉되면서 극장가에 때 아닌 ‘정치 다큐’ 붐이 일고 있다.


이렇듯 역대 대통령을 다룬 영화들이 잇달아 개봉하자 일각에서는 총선을 앞두고 정치 양극화 속 진영 싸움이 ‘영화 판’에서도 일고 있다며 비판의 목소리도 일고 있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정치권에서는 각 영화를 보고 난 후 관람평과 인증 등을 남기기도 하며, 관람을 독려하기도 한다.


이미 개봉된 다큐멘터리 외에도 <외인구단> <별들의 고향>등을 만든 이장호 감독이 이승만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을 조명한 <하보우만의 약속>도 5월 개봉을 준비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가수 김흥국이 자신의 이름을 딴 제작사 ‘흥 픽쳐스’를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그리고 하얀 목련이 필 때면>을 제작, 9월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처럼 극장가에 정치 다큐멘터리 바람이 부는 이유로 한 영화 관계자는 “다큐멘터리 영화 특성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싶다”라며 “기존에 몰랐던 인물의 어떤 면을 조명하면서 영화를 통해 그 인물의 삶을 간접적으로 되돌아보고 느껴볼 수 있는 이런 지점들이 극장을 많이 찾는 요인이 되지 않았나 싶다”고 전했다.


반면 역대 대통령에 대한 기록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인물이나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이나 사건을 돌아보기보다는 진보와 보수 양 진영의 지지층 결집에만 활용된다는 지적은 무시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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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전쟁> 스틸컷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현대 정치사에서 논쟁적인 인물들을 다룬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면 편향됐던 의식이나 역사의식을 걷어내고 상대방을 품을 수 있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필요하다”라며 “여야 정치권에서 상대방에 대한 폄하나 비하만 하기보다는 같이 이 영화를 보면서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는 지혜가 아쉽다”는 평을 내기도 했다.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는 SNS를 통해 “영화가 지지층을 결집하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라며 “이들 영화가 사실을 반영하기는 하지만 제작진의 편견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다. 오히려 중도층의 반감과 이탈을 불러올 수 있다”고 의견을 표하기도 했다.


한편 역대 다큐 영화 흥행 4위를 기록한 <건국전쟁>의 김덕영 감독은 영화 내용이 일방적이라는 비판과 함께 심지어 볼필요 없다는 일각의 평에 대해 “주관을 최대한 배제한 채 객관적인 증거와 시각 자료들을 입수해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냈다”라며 “비판을 하더라도 일단 영화를 보고 판단해주면 좋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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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전쟁> 포스터



영화, 무엇을 다뤘나

영화 <서울의 봄>은 군사반란이 일어난 1979년 12월 12일 저녁 7시부터 이튿날 새벽 4시까지의 9시간을 다뤘다. 사실을 기반으로 한 영화이지만 감독의 상상력으로 구성된 부분, 극적 재미를 더하기 위해 과장된 부분도 있어 영화 속 모든 부분이 실제 일어난 일은 아니다. 다만 역사 속 12·12 군사반란을 다뤘다는 점, 영화의 흥행과 더불어 역사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다는 점에서 영화가 갖는 힘을 느낄 수 있다.


‘서울의 봄’은 대한민국에서 수많은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1979년 10월 26일부터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 17일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가 단행되기 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에 비유한 것으로 ‘서울의 봄’은 신군부가 투입한 계엄군에 의해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무력 진압되면서 종결됐다.


12·12 군사반란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김진기 육군 헌병감 등을 체포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전두환은 대한민국을 장악하고 정치적인 실세로 등장, 이후 1980년 5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5·17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5·17 쿠데타에 반항한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 계엄군을 보내 학살과 진압으로 강경 대응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업적을 다룬 영화 <건국전쟁>은 지난 2월 1일 개봉 후 100만 관객을 넘어 국내 다큐멘터리 영화 역대 흥행 순위 4위(3월 21일 오전 기준 116만 4873명)를 기록했다. 1위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 480만)>, 2위는 <워낭소리(2009, 295만)>, 3위는 <노무현입니다(2017, 185만)>이다.


<건국전쟁>은 사실 개봉 전까지 존재감 자체가 미미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개봉 직후 건국 1세대들의 희생 및 투쟁에 공감한 고연령층이 대거 영화관을 찾으면서 2월 극장가를 뜨겁게 달궜다. <건국전쟁>은 2021년부터 김덕영 감독이 3년 동안 걸쳐 만든 다큐멘터리로 이승만 대통령의 생애와 정치적 행적 등에 초점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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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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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 김대중> 스틸컷



영화가 개봉된 후 이승만 전 대통령 재평가를 요구하는 여권을 중심으로 관람 독려가 이뤄지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역사를 올바르게 알 수 있는 기회”라고 평한 것으로 전해졌으며,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오는 데 있어 굉장히 결정적인, 중요한 결정을 적시에, 제대로 하신 분”이라며 “그분의 모든 것이 미화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하지만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농지개혁 등) 굉장히 중요한 시대적 결단이 있었고 그 결단에 대해 충분히 곱씹어 봐야 한다”고 평했다.


물론 4·19혁명을 부른 1960년 3·15 부정선거와 같은 오점을 다루는 데 있어 측근들의 권력욕 탓으로 돌리며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과오를 축소하거나 미화했다는 평가도 존재해 <건국전쟁>에 대한 갑론을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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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 김대중> 포스터



영화 <길 위에 김대중>은 김대중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영화로 목포의 청년사업가 출신의 김대중이 온갖 고초를 겪으며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과정과 1987년 대선 후보로 나서기까지의 스토리를 담았다. 이 과정에서 유신에 저항해 해외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 일본에서 박 정권에 납치된 사건, 신군부의 쿠데타와 5·18민주화운동, 전두환에 의한 사형선고와 수감생활 등 한국 현대사의 파란만장했던 사건들을 마주할 수 있다. 그렇기에 <길 위에 김대중>은 그저 한 사람, 한 대통령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이전에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들여다보는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영화 속에 그려진 납치사건의 경우 고증 면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김 전 대통령을 납치하는 과정에서 수장하려 했다는 부분은 당사자인 김 전 대통령이 “직접적으로 수장을 시도하는 행위는 없었다(국가정보원,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주요의혹사건편 상(Ⅱ)>, p.507)”고 밝힌 바, 세간에 알려진 그대로 영화 속에 재현해 냈다는 것이 아쉽다는 평가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학)는 이 영화를 두고 “1987년 이전을 경험한 사람들은 역사를 돌아보고 반추하는 추억의 영화”라며 “이 영화를 꼭 봐야 하는 이들은 민주화 이전의 암울한 정치 상황을 모르는 젊은 세대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람 그리고 사건

정치 다큐 외에도 극장가에 분 다큐 영화는 다양하다. 일반영화에 비해 상영시간도 길고 다소 지루할 수도 있는 다큐멘터리가 스크린을 종횡무진하는 데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데 있다.


지난 2022년 세계에서 손꼽히는 피아노 콩쿠르인 반 클라이번 대회에서 사상 최연소로 정상에 오른 18살 소년 임윤찬. 그의 당시 연주 실황을 담아낸 2시간짜리 다큐멘터리 <크레센도 반 클라이번 콩쿠르 실황(2024)>은 1월 개봉 당시 다회차 관람 열풍을 몰고 왔으며, 누적 관객수 7만 명이라는 기록을 이끌어냈다.


지난 1월 개봉한 마들렌 개빈 감독의 다큐멘터리 <비욘드 유토피아(2024)>는 관객이 예상보다 많지는 않았지만 미국, 영국 등 외국에서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탈북민 일가족의 탈북 과정을 생생하게 담은 이 영화는 북한인권의 실태를 보여주며, 탈출하려는 이들의 목숨을 건 여정과 이들을 돕는 김성은 목사의 헌신적인 이야기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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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드 유토피아>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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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세월> 스틸컷



지난해 1월 세계 최고의 독립영화제인 미국 선댄스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았으며, 2023 햄튼국제영화제 2관왕 등에 오르는 등 많은 관심을 받은 탈북 인권 다큐다.


이 영화의 공동 제작자인 수 미 테리 전 월슨센터 국장은 “전세계 사람들에게 북한의 실상에 대해 알리고 싶었다. 이를 통해 인권과 피난민에 대한 세계인들의 인식을 높이고자 했다”라며 “자유를 얻기 위해 어딘가에서 이토록 처절하게 발버둥 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고 제작하게 된 목적을 밝히기도 했다. 자유를 향한 목숨을 건 2만 2000㎞의 생생한 북한 탈출기 <비욘드 유토피아>는 오는 4월 11일 재개봉을 앞두고 있다.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지난 3월 27일 개봉한 <세월: 라이프 고즈 온>과 4월 3일 개봉을 앞두고 있는 <바람의 세월>,제주 4·3 사건 당시 불법 군사재판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수형인들의 생생한 증언을 담은 <돌들이 말할 때까지(4월 17일 개봉)> 등도 극장가 ‘다큐 붐’을 이어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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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세월>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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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라이프 고즈 온> 포스터



마지막으로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일어난 관동 대학살에 대해 다룬 김태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1923>도 개봉을 앞두고 있다. 1923년 9월 일본에서 일어난 관동대지진으로 조선인 6661명이 집단 학살을 당한 비극적인 사건을 담은<1923>은 조선인 학살의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3년 동안 추적 촬영해 온 영화로, 비극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평생을 바쳐온 일본과 한국의 진실 추적자들의 이야기도 담겼다.


연출을 맡은 김태영 감독은 “진실을 추적해 온 이들이 밝혀낸 학살 증거를 세상에 공개하고 100년간 철저히 봉인해 온 일본 정부의 은폐 공장을 파헤쳐 가는 영화”라고 소개했다.


영화에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집단 학살의 진실을 추적해 온 4명의 일본인과 1명의 한국인이 등장한다. 이 중에는 40년 가까이 조선인 학살의 사진 자료를 전 세계에서 찾아 수집하며, 국내에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수차례 사진전을 열어온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가 있다.


정성길 관장은 “관동대지진 당시 자행된 조선인 대학살 사건이 명백한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학살) 범죄로 유엔에서 공식 인정하는 그날까지 끔찍한 만행의 실체를 전 세계에 알리는 일을 쉬지 않겠다”라며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일본 정부의 사죄를 받아내기 위해 협력해줄 것”을 당부했다.


다큐멘터리 영화가 스크린에 많이 걸리는 것은 환영할 만한일이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역사적 사실 혹은 진실에 근접할 수도 있고, 편향됐던 생각이나 가치관의 중심을 잡을 수도 있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대학살에 대한 진실을 파헤쳐 역사를 바로잡고 일본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사죄를 받아낼 수도 있다. 분명 다큐멘터리가 주는 순기능은 존재한다. 다만이 다큐들이 정치적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항간에 이런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왜 농담을 다큐로 받느냐”고 말이다. 다큐 붐이 일고 있는 지금 “다큐는 다큐로 받아야 하지 않는가”라는 말을 조심스레 건네고 싶다. 다큐는 다큐로 받아야지 결코 정치적 선전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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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된 사람들 속에서 가족을 찾는 모습(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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