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호 마루대문 찬란한 유산의 시작 강화도에서 우리 민족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2021.09.01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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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유산의 시작 강화도에서

우리 민족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글·사진 이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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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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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江, 빛날 華. 강 아래의 아름다운 고을이라는 의미를 가진 강화도는 제주도, 거

제도, 진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큰 섬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동안 우리

의 역사와 함께한 곳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의 시작인 단군신화가 시작된 곳이면

서 숱한 외세 침입의 역사에서 마지막까지 버티던 그곳. 탐방팀은 우리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 강화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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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산 정상에서 바라본 강화도 남쪽 바다



마니산, ‘민족의 영산’으로 꼽혀

두악·마루 등 다양하게 불려져

단군이 천제를 올린 ‘참성단’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곳

1969년 강화대교가 놓이기 전까지 섬으로만 있던 강화도. 하지만 왕래의 편의성을 떠나 강화도는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 주조연으로 나타났다. 강화도의 첫 등장은 우리 민족의 첫 나라 ‘고조선’을 세운 ‘단군’과 함께한다. 


강화도 남쪽에 자리한 ‘마니산’은 백두산과 한라산 가운데에 위치한다. 그래서 함께 ‘민족의 영산’이라고도 불리며 ‘기(氣)’가 센 곳으로도 유명하다.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와 마니산 정상에서 제사를 지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니산 정상 참성단에서는 매년 10월 3일에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마니산은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마리산(摩利山)이라고 적혀 있었다. 마리산 외에도 마루산, 두악산(頭嶽山)이라고도 불렸는데 그만큼 ‘민족의 머리가 되는 산’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 <신증동국여지승람>부터는 현재의 이름인 마니산이라고 기록돼 있다. 해발 472 의 마니산은 강화도의 산 중에서 가장 높다. 정상

까지 여러 곳에서 오를 수 있어 등산객들은 다양한 코스로 산을 즐긴다. 지금은 크게 계단로, 단군로, 함허동천로, 정수사로로 구분되는데 계단로와 단군로는 초보자도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오를 수 있다. 하지만 반대 방향으로 오르는 함허동천로와 정수사로는 암릉구간이 있어 험하지만 암릉만의 화려한 맛이 더해져 색다른 풍광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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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산 올라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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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산을 오르는 길에는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돌탑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이러한 화려한 암릉구간을 지나 정상에 오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참성단(塹星壇)’을 볼 수 있다. 이 참성단은 단군이 하늘에 제를 올리기 위해 만들어진 제단이다. 자연석으로 둥글게 쌓은 하단은 하늘을 뜻하며 네모나게 쌓은 상단은 땅을 뜻한다. 이는 예부터 우리 민족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고 생각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고려·조선시대에는 이곳 참성단에서 국가제사를 지냈다. <고려사>와 <신동국여지승람>에서 단군이 천제를 지냈던 곳이라 적혀있으며 고려 후기 이암이 엮은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단군이 마니산에 제천단을 쌓고 세 아들을 보내어 삼랑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적혀있다. 이 외에도 조선시대 이종휘의 시문집인 <수산집(修山集)>에서는 “제천단은 강화도 마니산에 있으니, 단군이 혈구(穴口, 강화의 옛 이름)의 바다와 마니산 언덕에 성을 돌리어 쌓고 단을 만들어서 제천단이라 이름했다”고 기록돼 있다. 불교의 나라였던 고려와 유교의 나라였던 조선이 참성단에서 도교식 제사를 지냈다는 점이 의아스럽지만 그만큼 마니산의 참성단은 우리 민족 제1의 성지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해방 이후에도 개천절 경축식을 참성단에서 진행했고 지금까지 제천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전국 체전의 성화를 이곳에서 시작하는데 태양열을 이용해 밝히고 있다.


이러한 참성단 외에도 마니산 정상에서는 경기만과 영종도 등 드넓은 강화도를 볼 수 있는데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넓은 지형을 갖고 있지 않았다. 현재 강화도는 본도를 중심으로 석모도·교동도·주문도 등 11개의 유인도와 18개의 무인도로 구성돼 있다. 원래는 이보다 더 많은 섬들로 구성됐었으나 간척사업으로 본도로 편입이 됐다.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간척사업

남한에서 가장 큰 강화지석묘

오래전부터 문명의 꽃 피워



강화도의 간척사업은 생각보다 꽤 오래전인 고려시대부터 시작이 됐다. 이는 몽고의 침입으로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기자 좁은 섬에 갑자기 많은 사람이 몰리게 되면서 이를 해결하고자 간척사업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간척사업은 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지는데 현재 마니산이 있던 곳도 ‘고가도’라는 섬이었으나 간척사업으로 현재의 모습이 됐다. 


마니산의 흔적 외에도 강화도는 오랜 세월 사람이 산 흔적이 남아 있다. 강화도의 서쪽 고려산을 중심으로 고인돌이 대거 분포돼 있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유물로 우리나라는 대표적인 고인돌 유적지다. 


강화도에는 약 150기의 고인돌이 있으며 그중에서 70기가 고창·화순과 함께 2000년 12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 고인돌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본다. 그중에서도 부근리에 있는 사적 제137호의 강화지석묘는 대표적인 탁자식고인돌로 남한에서 가장 큰 고인돌이다. 


길이 6.4 , 폭 5.2 , 두께 1.1 의 덮개돌만 무게가 53톤이며 받침돌을 합한 무게는 총 75톤에 다다른다. 이와 같은 거대한 고인돌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약 1000명의 인원이 동원된 것으로 보이며 이를 통해 큰 집단이 살았던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강화도는 예로부터 기온이 온화하고 강우량이 많아 농경이 발달했고 바다로부터 해산물도 쉽게 구할 수 있어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정착했을 것으로 본다. 이에 거대한 고인돌을 축조할 만큼 큰 집단이 형성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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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탁자식 고인돌 강화 부근리 지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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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마니산 ‘참성단’



단군의 아들이 성을 쌓다

강화도에는 마니산과 함께 꼽히는 산이 하나 더 있다. ‘삼랑산’이라고 불리는 정족산이다. 정족산(鼎足山)은 산의 생김새가 마치 세 발 달린 가마솥을 뒤집은 모양과 같다는 뜻에서 이름이 붙여졌다. 이 산 위에는 돌로 만든 산성이 있는데 ‘정족산성’ 또는 ‘삼랑성’이라고 불린다. 이 성이 언제 축조됐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있다. 이것이 ‘삼랑성’이라고도 불리는 이유다. 정족산은 마니산 참성단에서 제사를 지낼 때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기거하면서 준비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니산은 아버지의 산, 정족산은 어머니의 산과 같이 여겨지고 있다.


산성의 구조는 삼국시대 석성구조를 보여주고 있으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보수와 중수가 이뤄졌다. 


그리고 이곳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장사각(藏史閣)과 <족보>를 보관하던 선원보각(璿源譜閣)이 있었다. 왕조의 실록과 족보를 보관했다는 것은 이곳이 그만큼 안전하다는 것과 그 정통성에서도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산의 정상을 오르면 알 수 있지만 가운데 옴폭 들어간 지형은 아무나 침략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정족산성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전등사를 거쳐야 한다. ‘전등사(傳燈寺)’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자 강화도에서 가장 큰 사찰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2(372)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해 ‘진종사(眞宗寺)’라고 처음에 불렸다. 현재의 이름인 전등사는 고려 충렬왕 때 정화궁주가 절에 옥등(玉燈)을 시주하면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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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족산성 안에 있는 전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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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장사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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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왕실의 족보를 보관했던 선원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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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궁지 내에 있는 외규장각




고려의 수도이자 항몽 격전지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정착해 살던 강화도는 고려시대의 수도 역할을 하기도 했다. 자그마한 섬이 한 나라의 수도가 된 것에는 아픈 역사가 담겨 있다. 한반도는 예부터 외세의 침략이 잦았다. 고구려가 전성기를 이룰 때는 중원지역까지 호령했던 우리 민족이지만 이후로는 수많은 외세의 침입을 받고 막아내는 역사가 이어졌다. 고려 역시 마찬가지였다. 


918년 태조 왕건이 궁예를 축출한 후 개국한 고려의 수도는 송악이라고도 불렀던 개경이었다. 하지만 고려 고종 19(1232)년 몽고의 침략으로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최우는 도읍을 천혜의 요새였던 강화도로 옮겼다. 이때부터 원종 11(1270)년까지 38년간 고려의 수도 역할을 했던 강화도는 지금도 그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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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11일 인천 강화군 강화읍 고려궁지 내 외규장각에서 

열린 ‘외규장각 의궤 귀환 환영행사’에서 외규장각 도서 봉안식을 

재현하고 있는 모습. 한편 외규장각 의궤는 프랑스에게 강탈당한 

지 145년 만인 2011년 고국 품으로 돌아왔다. (출처: 뉴시스)




강화읍에 있는 고려궁지는 강화도에 도읍을 옮기고 2년 후인 1234년에 건축을 마친 후 송도로 환도할 때까지 사용됐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최우는 이령군(二領軍)을 동원하여 이곳에 궁궐을 지었다. 규모는 비록 작으나 송도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었고, 궁궐의 뒷산 이름도 송악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자리에는 행궁·이궁·가궐 등 여러 궁궐과 정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그 궁궐들의 정확한 위치와 범위는 파악되지 않는다. 


1270년 환도할 때 몽골의 요구로 모두 허물었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1622(광해군 14)년에 태조 영정을 봉안하는 봉선전을 건립하고 인조가 고려궁터에 행궁과 전각, 강화유수부, 규장외각 등을 세웠고 민가까지 함께 들어오면서 고려시대 때 궁궐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지어진 건물마저도 병자호란 때 함락되고 1866년 병인양요 때 약탈당했다. 지금의 고려궁지에 있는 이방청과 동헌, 외규장각은 조선 때 만들어진 건물들을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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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대몽항쟁 기간에 <팔만대장경>을 간행했던 선원사지. 1996~2000년에 발굴 조사가 진행되다가 중단됐다.



이 중에서 외규장각은 조선 정조 때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이다.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나 관련 서적들을 보관했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들이 의궤를 포함한 서적 등을 약탈해갔으며 나머지는 다 불태워 버렸다. 지난 2010년 11월 12일 G20정상회의를 통해 프랑스와 한국 대통령 간에 외규장각 도서를 5년마다 임대하는 형식으로 합의하면서 외규장각 도서는 145년 만에 국내로 들어오게 됐다.


여전히 묻혀있는 불심

이러한 아픈 역사 가운데 가장 안타까운 곳이 있으니 바로 옛 ‘선원사 터’다. 선원사(禪源寺)는 최우가 창건한 사찰로 진명국사가 초대 주지를 맡은 후 원오국사, 자오국사, 원명국사 등 당대 이름 높은 고승들이 국사와 주지를 겸직하며 차례로 뒤를 이었다. 당시 순천에 있던 송광사와 함께 2대 사찰로 손꼽혔던 선원사는 조선 초기 훼철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곳의 가장 중요한 것은 대몽항쟁 기간 동안 민심을 모으고 부처님의 힘으로 국난을 이겨내고자 만들었던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던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 기록상으로는 이곳에서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없으나 <조선왕조실록>에서 태조 7(1398)년에 이곳에 있던 <대장경판(大藏經版)>을 서울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함께 대장도감의 본사가 강화도에 있었고 승려들이 경판을 필사·조각했다는 점과 입지적 조건이 <대장경판> 간행사업을 하기에 알맞은 점 등이 뒷받침하고 있다. 


선원사는 궁성과 가까운 곳이었으며 부두와도 가까워 목판 재목을 운송하기에도 알맞았기 때문이다. 또 충렬왕 당시에는 이곳을 궁전으로 사용할 정도로 규모가 컸기 때문에 학계는 이곳에서 <팔만대장경>을 만들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또 절터에서 보상화문전을 비롯해 명문이 새겨진 막새기와, 치미, 원숭이 상 등 수많은 유물이 함께 출토됐다. 



팔만대장경 간행했던 ‘선원사’

고려시대 가장 큰 사찰로 꼽혀

2000년 이후 발굴 조사 중지돼



하지만 선원사는 태조 7(1398)년 <대장경판>을 서울로 옮겼다는 기록 이후로 더 이상 찾을 수가 없다. 이후 까맣게 묻혀있던 역사가 1976년 동국대학교 강화학술조사단에 의해 세상 밖으로 꺼내졌다. 조사가 시작된 후 선원사지는 1977년 사적 제259호로 지정됐다.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진행됐던 발굴 조사를 통해 독립된 건물지 21개소와 부속 행랑지 7개소가 확인됐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 더 이상 조사가 진행되고 있지 않다. 막대한 예산 탓에 시와 강화군 등이 국비 지원을 요청했지만 정부에서 매번 반영하지 않았고 현재는 터만 덩그러니 있는 상태다. 선원사지 앞에 지금의 ‘선원사’를 세운 성원스님은 “마지막 발굴 조사를 통해 선원사가 불에 탔다는 것은 알아냈지만 언제, 왜 훼철됐는지 알 수 없다. 지속적인 조사를 통해 밝혔으면 좋겠다”며 “역사적·문화적으로 중요한 팔만대장경을 만든 선원사의 터는 아직 발굴 작업조차 끝나지 않아 안타깝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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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사 복원에 힘쓰고 계신 성원스님.
 


강화도는 해가 뜨는 나라 ‘조선(朝鮮)’의 시작점이었다. 한(韓) 민족인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의 시작이자 우리 문명의 시작을 알린 곳. 기독교의 경서 <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에덴도 해가 뜨는 곳 ‘동방’에 있었다. 자그마한 나라이나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이 한반도에 살아가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로부터 우리 한반도는 하늘의 신이 함께하는 곳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우리보다 몇 배나 큰 외세로부터 침략을 당해도 하늘의 힘을 빌려 이겨낼 수 있었으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워 냈다. 이러한 역사를 알 때에 우리에게는 여전히 빛날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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