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호 마루대문 을사년, 과거와 현재를 생각하다
을사년,
과거와 현재를 생각하다
글 백은영
을사년(乙巳年) ‘푸른 뱀의 해’가 밝았다. 육십간지의 42번째로 천간은 청색, 지지는 뱀을 상징한다. 천간의 ‘푸르름’을 생각하면 새롭게 밝아온 2025년이 희망으로 가득했으면 하는 바람이 크지만, 지금 대한민국은 아수라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적 갈등은 더욱 격화되고 사회는 분열된 목소리로 가득하다. 정치적 양극화가 극에 달한 만큼 국민들의 불안감도 커질 수밖에 없다. 상생과 화합은 온데간데없고 분열과 분쟁만 생산해내며, 나라와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다. 눈앞의 실리(實利)를 챙기기에만 급급해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형국이 과거의 한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120년 전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체결된 조약인 <을사늑약(乙巳勒約)>이다.
십이지신 가운데 여섯 번째 동물인
뱀을 표현한 그림
1905년 11월 17일 오후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와 하세가와 요시미치 사령관(마차에 앉은 왼쪽과 오른쪽)이
경운궁 수옥헌으로 향하고 있다. 훗날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수옥헌은 중명전으로 고쳐 불렀다.
강압 아래 체결된 <을사늑약>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대한제국(이하 한국)을 강압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문에는 제목도 없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으로 기재돼 있을 뿐이다.
이 조약은 을사년에 체결돼 ‘을사조약’, 모두 5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져 ‘을사5조약(乙巳五條約)’이라고도 불리지만 조약 체결 과정의 강압성으로 ‘을사늑약’으로 통용된다.
을사늑약의 주요 내용은 한국의 식민화를 위해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統監府)와 이사청(理事廳)을 두어 내정(內政)을 장악하는 것이다. 명목상으로는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돼 있으나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19세기 말 일본은 자국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목표로 대한제국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려고 했다. 또한 일본의 침략 야욕이 드러나기 시작한 시기로 러일전쟁(1904~1905)에서 승리한 일본은 본격적으로 군국주의 및 제국주의의 길로 나아갔다.
1907년에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의 부당함과 일본 제국의 침략을 전 세계
에 알리기 위해 비밀리에 네덜란드 헤이그 시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보낸 3명의 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의 모습
이러한 가운데 체결된 을사늑약은 한반도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꾸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조약은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강제로 넘기면서 일제강점기의 서막을 열었다. 이후 한국은 독립 국가로서의 지위를 잃고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주권회복을 꿈꾸던 고종은 1907(광무 11)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일본 침략의 부당성과 을사늑약의 무효화를 세계에 호소하려 했으나 국제적 정세와 열강의 무관심 속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고종 황제의 퇴위를 칼
로써 위협한 군부대신 이병무
이 사건은 고종의 강제 퇴위라는 후폭풍을 낳았다. 일본의 압력과 친일 대신들에 둘러싸여 철저하게 고립된 고종은 송병준의 협박과 칼을 뽑아 자기 목을 찌르면서 퇴위를 강요한 군부대신 이병무 등의 위협을 이기지 못했다. 결국 7월 19일 “군국(君國)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케 한다”는 조칙을 내리게 된다. 여기서 고종은 ‘대리케 한다’는 말로 양위할 뜻이 없음을 밝혔으나 이토와 그 내각은 이를 양위로 굳혀버렸다. 양위식은 두 명의 내관들이 대신했다.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 을사5조약)은 내각의 참정대신(내각수반)이 반대했으나 다섯 대신의 동의를 받아내는 데는 성공했다. 조약 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인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을 일컬어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한다.
<평화회의보> 1907년 7월 5일자 기사. <평화회의보> 편집장 스테드와
이위종 선생의 특별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고종 황제(왼쪽)와 순종
경술국치, 나라를 잃다
을사늑약 이후 5년이 흐른 1910년 8월 29일, 결국 나라를 잃었다. ‘경술년에 있었던 국가적 치욕’이라는 의미의 ‘경술국치(庚戌國恥)’는 일제가 대한제국에게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함을 규정한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이를 공포한 날을 일컫는 말이다.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형식적인 회의를 통해 합병조약(合倂條約)을 통과시켰다. 이 또한 강제로 체결된 조약이었다. 일주일 뒤인 8월 29일 합병조약이 공포되면서 국권을 상실한 대한제국은 일본에 편입됐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됐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 후 한일수뇌 기념 촬영 모습
1910년 3월 26일 일본은 안중근 의사를 처형하며 국제적으로 큰 관심을 모았던 사건을 종결짓고 한반도 병합을 서둘렀다. 같은 해 5월 30일, 병약했던 소네를 통감직에서 퇴임시키고 현역 육군대장이자 육군대신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새 통감으로 임명했다.
6월 24일, 일본은 박제순 내각에 한국 경찰사무의 전면 위탁을 강요하며 협정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한국의 기존 경찰 관제는 폐지되고 통감부는 경무총감부를 설치해 경찰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통감부는 헌병경찰제를 도입, 헌병사령관이 경무총장을 겸임하고 지방의 헌병대장이 각도의 경찰부장을 맡도록 했다. 헌병 경찰의 수 또한 대폭 증가시켜 한국의 저항을 철저히 탄압할 체제를 구축했다.
고종과 원로대신들(소장자: 故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호머 헐버트가 발행한 <코리안 뉴스페이퍼(Korean Newspaper)>에 실린 1905년 <을사늑약> 풍자화.
<한일협약도(韓日脅約圖)>라는 제목과 ‘일본이 한황을 위협해 조약을 늑정’이라고 설명해 조약의 부당성을 고발했다.
7월 23일, 서울에 도착한 제3대 통감 데라우치는 일본 수상으로부터 병합조약 초안과 병합 이후의 통치방침을 전달받았다. 그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대한민보>의 발행을 중단시키고 <대한매일신보>의 판매를 금지하며 한국인의 저항을 사전에 봉쇄했다. 이후 7월 29일 부상에서 회복된 이완용을 다시 총리대신으로 임명하고 박제순을 내부대신으로 하는 내각을 구성했다.
1910년 8월 22일 서울 도심에는 15간마다 일본 헌병이 배치됐고, 순종 황제 앞에서 형식적인 어전회의가 개최됐다. 이 자리에서 이완용 내각은 ‘한일병합’이라는 안건을 결의하는 절차를 거쳤다. 이날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는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으나 한국민의 반항을 두려워한 일본은 사회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원로대신들은 연금한 뒤 8월 29일 이를 반포했다.
<한일병합조약> 전문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는 양국 간에 특수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고려, 상호의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고자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이 선책이라고 확신, 이에 양국간에 병합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해 일본국 황제폐하는 통감 자작 데라우치를, 한국 황제폐하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각기의 전권위원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므로 전권위원은 합동협의하고 다음의 제조를 협정하였다. 제1조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에 기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전연 한국을 일본제국에병합함을 승낙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한국 황제폐하·황태자전하 및 그 후비와 후예로 하여금 각기의 지위에 적응하여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것을 유 지함에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 이외의 한국 황족 및 그 후예에 대하여도 각기 상응의 명예 및 대우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것을 유지함에 필요한 자금의 공급을 약속한다. 제5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에 적당하다고 인정된 자에 대하여 영작(榮爵)을 수여하고, 또 은급을 줄 것이다. 제6조 일본국 정부는 전기 병합의 결과로 한국의 시정을 담당하고 같은 뜻의 취지로 시행하는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충분히 보호해 주며, 또 그들의 전체의 복리증진을 도모할 것이다. 제7조 일본국 정부는 성의로써 충실하게 신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을 가진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한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국 관리로 등용할 것이다. 제8조 본 조약은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의 재가를 받은 것으로서 공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한다. 이상의 증거로서 양국 전권위원은 본조에 기명 조인한다. - 융희 4년 8월 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메이지 43년 8월 22일 통감 자작 데라우치 마사타케 |
뱀띠 해 특별전 <만사형통>
120년의 시간이 흘러 또 한 번의 을사년 뱀띠 해가 밝았다. ‘뱀’은 그 생김새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무섭고 징그러운 존재로 여겨지지만, 한편으로는 지혜와 총명의 상징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특히 한국인들은 뱀띠 해에 태어난 사람을 총명하다고 여긴다.
뱀에 대해 전하는 이야기는 대개 뱀을 두려운 존재로 표현하지만 뱀이 허물을 벗으며 성장하는 모습과 겨울에 사라졌다가 봄에 다시 출현하는 생존 본능을 경이롭게 보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뱀이 신성한 존재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악한 존재의 표상이기도 하다. 이렇듯 뱀에 대한 인간의 복합적인 인식이 담긴 전 세계의 민속문화를 엿볼 수 있는 전시가 마련됐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오는 3월 3일까지 본관 기획전시실2에서 을사년 뱀띠 해 특별전 <만사형통>을 개최한다. 뱀과 관련된 유·무형의 자료 6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열두 수호신 가운데 여섯 번째 뱀신상
먼저 뱀은 총명하다고 여겨진다. 뱀띠 해에 태어난 사람이 총명하고 특출나다는 관념도 지혜로움을 상징하는 십이지에서의 뱀과 연결된 것이다. 특히 십이지에서 비롯된 띠 개념은 우리의 운명과 특성을 논하는 데 자주 활용된다. 십이지는 통일신라 시대에 우리나라에 전해져 지배계층의 무덤에 십이지상을 조각하는 풍습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방위와 시간을 나타내는 십이지 개념은 민간에도 퍼져 시계, 나침반과 같은 일상용품에도 활용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뱀은 남남동쪽을 가리키며 오전 9~11시를 가리켰다.
십이지 문양 재털이
뱀은 또한 두려운 존재로 여겨졌다. 뱀의 날카로운 눈매와 갈라지고 날름거리는 혀, 뾰족한 이빨, 은밀하고 빠른 움직임은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뱀에게 물려 피해를 본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무서운 이야기는 뱀을 더욱 두려운 존재로 만들었다. 반면 다양한 문화권의 이야기 속에서 뱀은 어리석거나 욕심 많은 인간을 경고하거나 벌을 주는 존재로도 나타났다
복숭아 형태의 표주박(桃形瓢, 20세기 초)
뱀은 두려운 동시에 신성한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다. 인간은 땅속을 오가는 뱀을 보며 뱀이 이승과 저승의 서로 다른 두 세상을 오갈 수 있는 신비로운 존재라고 여겼다. 뱀과 비슷한 모양 또는 뱀이 그려진 도구를 만들어 신과의 소통이 필요한 의례에 사용했던 것도 이러한 관념에서 비롯됐다.
허물을 벗으며 성장하고 한 번에 10여 개의 알을 낳는 뱀은 강한 생명력과 풍요로움을 상징하기도 했다. 특히 뱀의 생명력은 인간에게 풍요와 안정을 가져다주는 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져 농사가 잘되도록 비를 내려주는 수신(水神)이 되기도 했다.
특별전의 주요 전시품으로는 ‘땅을 지키는 열두 수호신 가운데 여섯 번째 뱀신(十二支神圖-巳神 珊底羅大將. 1977)’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불교 행사 때 벽사의 의미로 뱀의 방위인 남남동쪽에 건다.
치켄차타
‘복숭아 형태의 표주박(桃形瓢, 20세기 초)’은 먼 길을 떠날때 휴대하고 다니며 물이나 술을 마실 때 사용한 것으로 뱀의 형상이 고리로 표현돼 있다. 물과 뱀은 생명력과 함께 부정을 물리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 생활용품에 장식됐다.
이외에도 뱀을 잡는 도구, 인도 힌두교의 푸자 의례에서 등잔에 채울 기름을 뜰 때 사용하는 ‘치켄차타(20세기)’가 있다. 치켄차타 손잡이 부분은 뱀 머리 모양으로 힌두교에서 뱀은 무한과 영원을 상징한다.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스리랑카의 ‘마라 코라 가면’은 산니댄스 악마의 춤에서 사용되며, 18가지 병의 악마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한다. 가면에 조각된 뱀을 비롯해 악성 전염병의 악마들을 제관이 달래고 물리치는 과정이 담긴 치료의식에 사용된다.
오늘 그리고 120년 전 그날
한 해의 시작이 늘 희망차고 아름다울 순 없지만 애써 나라를 혼란스럽게 할 필요는 없다.
어수선했던 2024년의 마지막이 꼬리를 물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서 해결하지 못한 정치적 상황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지만 이를 당쟁의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1910년 일제가 강압적으로 체결한 <한일병합조약>의 내용을 보면 그럴싸하다. “상호의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고자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이 선책이라고 확신한다”의 내용은 궤변에 불과하다.
허울 좋은 말들은 많다. 그렇기에 그 안에 들어있는 사실과 진실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참과 거짓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지만 당파를 떠나 논리적으로, 이치적으로 생각해보면 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참과 거짓에 대한 것보다 우선시하는 것은 없는지 돌아봐야 한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어도 된다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다. “시끄럽고 귀찮으니 들어주겠지!” “우는 아이에게 젖 한번 더 물린다.”는 말이 더 이상 통하는 세상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 앞에 성큼 다가온 을사년 새해.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등록된 코멘트가 없습니다.